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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여행을 꿈꾼다. 폭염의 태양 아래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밭일을 하시는 우리의 이웃 아주머니나, 에어콘으로 사방이 차단된 채 찬바람속에 감금되어 책상앞에 쭈구려 앉은 넥타이 맨 앞집 아저씨나, 오다가다 등산길에서 만나는 여행객보다도 더 여행객 차림을 한 중늙은이도 사람들은 여행을 꿈꾸며 원한다. 날씨가 더운 여름이면 덥기 때문에, 날씨가 추운 겨울이면 춥기 때문에, 날씨가 청명해지는 가을이면 여행하기가 좋아서, 날씨가 풀리는 봄이면 마음이 싱숭생숭해져서 사람들은 여행을 떠나고 싶어한다.

사람들은 왜 여행을 가고 싶어 하는 걸까. 명승고적지를 찾아가 그 경관을 구경하고 싶어서? 사람이 드문 한적한 곳에 외토리로 앉아서 청풍명월을 읊어며 일상의 때를 씻어내려고? 대하기 어려운 낯선 문화에 텀벙 뛰어들어 그속에 빠져보는 게 좋아서? 잠시 맞딱뜨리기 힘든 현실을 피해 숨어있을 목적으로? (그래 그런 사람이 더러 있었지, 가짜박사도 있었고, 부도난 사장도 있었고, 선거에 진 정치꾼도 있었지). 아니면 이 어느 것에도 속하지 않은 무엇을 찾아 나서는 또 다른 이유라도 있는 것일까.

▲ 여행의 첫 결심이자 끝 마무리인 공항
ⓒ 제정길
밴쿠버 섬을 오가는 배(훼리)에서 내린 차는 바로 시애틀로 머리를 돌렸다. 한낮이 넘었다고는 하나 여름의 태양은 아직도 그 입김이 만만찮게 뜨거운데, 우리가 탄 차의 맥빠진 에어콘으로는 그들을 막아내기가 힘에 부치었다. 예상대로 차는 털털거렸고 앞창문은 열리지 않았고 좌석은 불편하였다. 사람들은 차안에서 별로 말이 없었다. 기숙학교를 졸업한 학생과 그 어머니는 맨 뒷자리에, 최 선생 내외와 동행은 중간 열에, 나는 운전석 옆에 각각 널부러져 멀어져가는 캐나다의 접경지역을 무료히 쳐다보았다. 길옆의 나무들도 집들도 멀리 낮게 내려 앉은 산들도 산머리에 기댄 구름들도 저들도 제 각각 널부러져, 떠나는 우리를 본 척도 하지 않았다.

가이드이자 운전기사인 이 선생만 바쁜 와중에도 한손으로 마이크를 잡고 지나치는 주변 경관의 짧은 설명에 이어 기나 긴 그의 이민사를 독백하듯 쉬엄쉬엄 풀어놓았다. 잘 살아보려고 30여년 전에 그가 택한 여행길은, 여행길을 떠난 사람들을 도와주는 업(業)으로 멈추어 섰고, 그는 그의 업에 별반 회한 같은 것은 없어보였다. 조심스럽게 내가 물어보았다.

"이민 온 것 후회해 본 적은 없으세요?"
"후회는요, 한국에 그대로 있었다면 자식 공부시키고 이만큼 살 수 있었겠어요?"

그는 지난해 같이 이민 왔던 조강지처를 저 세상으로 보내고 한국여성과 재혼했다고 한다. 어쩌면 그것이 그를 재취업하게 한, 수모를 당하면서도 밴쿠버 섬까지 우리를 쫒아오게한 숨은 이유는 아니였을까 하는 생각이 언뜻 들었다. 좀이라도 젊은 아내에게 더 잘해주고 싶은 마음 때문이리라.

힘들고 벌이 안되는 밴쿠버-시애틀 간의 관광객 운송이 주로 그의 담당이라는 말을 듣자 가슴 밑바닥에 어디로부터 연유하는지 모르는 강물이 쏴아 하고 흘렀다. 과연 생이란 여행은 누가 떠나고 싶어해서 떠나는 여행인건지.

▲ 내가 좋아하는 바닷가의 시장통, 시애틀
ⓒ 제정길
해거름이 다되어 시애틀에 도착하였다. 크루즈 여행을 하기위해 앵커리지행 비행기를 타고 시애틀을 떠난지 14일 만이었다. 시가는 일요일 답게 한적하게 누웠고 우리가 찾아간 시장통만 번잡하게 일어서서 흥청거렸다. 최 선생이 꼭 가보고 싶어했던 스타벅스 1호점은 그 시장통의 한켠에 다른 건물들과 마찬가지로 나즈막히 엎디어 있었다. 다만 1912년이란 간판을 이마에 두른 점만 남 달랐다.

▲ 전 세계에서 최초라는 1912년에 세워진 스타벅스 1호점
ⓒ 제정길
몇군데를 더 둘러보고 예약해둔 호텔로 돌아왔다. 최 선생 내외는 오늘 밤 비행기로 샌프란시스코로 갈 것이고, 아주머니와 학생은 서울로, 우리는 새크라멘토로 내일 돌아갈 것이다. 그러면 이번 여행도 끝이나는 셈이다. 헤어지며 우리들은 이 선생에게 60불을 모아드렸다. 예정에 없든 거였다. 원래 오늘분 팁까지 밴쿠버에 도착한 첫날 계산해 드렸고, 시애틀의 관광은 추가 비용 없이 하기로 합의한 것이었으나 어쩐지 그렇게 해드리는게 옳을 것 같아서였다.

▲ 스타벅스 1호점의 실내 모습
ⓒ 제정길
여행은 막판에 망그러졌고 여행이라 불리기에 우스운 꼴이 되어버렸지만 그것은 이 선생만의 잘못은 아니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이 선생의 잘못이긴커녕 여행의 재미는 알짜로 챙기고 도급 주듯 가이드에게 책임을 떠넘겨버리고는, 관리도 감독도 없는 'K'라는 여행사가 책임져야할 부분이고, 음식에 이물질이 들었어도 뻔뻔하게 사과 한번 안하는 식당이 책임져야 할 부분이고, 싼값에 빨리빨리 어딘가 유명지를 가보는데 급급한 우리 관광객 모두의 여행 행태가 책임져야할 부분이었다.

호텔에 짐을 풀어놓고 저녁을 먹으러 라마다인 호텔 레스트랑에 들렀다. 비싸지 않은 값에 해산물이 푸짐히 나왔다. 해는 서녘으로 지며 노을이 붉게 물들었는데 산 아래로 멀리까지 묘지들이 구릉을 이룬게 보였다. 묘지는 지는 햇살을 받아 연푸름에서 어스름으로 서서히 침잠해 가는데 태양이 보낸 마지막 화살 몇 촉이 묘비에 부딪혀 잠시 반짝이다 그마저 되꺾여서 노을속으로 재빠르게 숨어 들어갔다. 태양은 그의 여행을 마치고 천천히 산 너머로 가라 앉는다.

▲ 태양도 그의 여행을 마치고 천천히 산 너머로 가라 앉는다.
ⓒ 제정길
우리의 여행도 천천히 태양과 함께 가라 앉는다. 아이 머리통만한 와인잔의 밑바닥에만 담긴 와인을 홀짝홀짝 마시면서 우리는 우리의 여행이 지는 것을 조용히 쳐다보았다. 우리는 여행에서 무엇을 보았는가. 무엇을 얻으려고 그 기를 써서 여행을 떠나 온건가. 우리는, 아니 나는 왜 여행을 떠나고 싶어했을까. 명승고적지를 찾아가 그 경관을 구경하고 싶어서? 사람이 드문 한적한 곳에 외톨이로 앉아서 청풍명월을 읊으며 일상의 때를 씻어내려고? 대하기 어려운 낯선 문화에 텀벙 뛰어들어 그속에 빠져보는 게 좋아서? 잠시 맞딱뜨리기 힘든 현실을 피해 숨어있을 목적으로?

어두워지는 하늘가에 들새들이 집을 찾아 날아드는 게 뿌옇게 보였다. 하나 그들도 '파랑새'는 아니었다.

덧붙이는 글 | 캐나디안 록키 여행은 엉성하게 끝이 났다. 그것은 엔딩마크를 찍지 않고 우물쭈물 불이 들어와버린 영화관처럼 스산하고 황당한 느낌을 주었다. 그러나 되돌아서 보면 그것 또한 여행이고 그것 또한 인생의 한자락일 터였다. 새크라멘토에서 출발한 여행은 시애틀-앵커리지-스캐그웨이-쥬노-캐치칸-밴쿠버-골든-밴프-벨마운트-밴쿠버-시애틀-새크라멘토로 돌아오는 14일간의 긴 일정이었다. 전반부는 크루즈라는 선상의 패키지 여행이었고 후반부는 한인 단체관광 패키지 였다. 잠시 숨을 돌렸다가 다음 여정을 올려려 한다.


태그:#여행, #늘근백수, #시애틀, #캐나다, #록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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