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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가 부여에 살다보니 부여의 여러 곳을 다니면서 그에 따른 답사도 하곤 한다. 부여의 유적지를 답사하면 할수록 부여가 넓게 느껴지고 문화재도 굉장히 많다란 생각이 들기도 한다. 지난 1년 반 동안 그래도 다른 이들보단 제법 다녔다고 생각하는데, 막상 지도를 펼쳐놓고 보면 아직 가지 않은 곳도 수두룩하다.

마침 주말에 시간이 나서, 어딜 갈까 둘러보던 중에 평소 사는 곳과는 약간 거리가 있는 홍산 쪽에 가보기로 하였다. 홍산에는 생각보다도 많은 문화재가 있었는데, 이 중에서 태봉산성을 먼저 가기로 하였다.

▲ 태봉산성 전경. 백제시대부터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조선시대까지 계속 사용된 토성이다. 최영장군의 홍산대첩 현장이기도 하나 지금은 체육공원이 들어서 있다.(충청남도문화재자료 제 368호)
ⓒ 송영대
태봉산성(胎峯山城)은 충청남도문화재자료 제368호에 지정된 문화재다. 표고 90m의 그다지 높지 않은 산꼭대기에 만들어진 산성으로 흙을 쌓아 만든 이른바 토축산성이라고 한다. 둘레는 약 430m라고도 하며 700m 정도라고 하기도 한다.

버스에서 홍산면사무소 쪽에 내리자 태봉산성이라는 표지판을 어렵잖게 찾을 수 있었다. 그 표지판을 따라 천천히 올라가니 자그마한 산이 보였다. 그 산에는 사람이 올라가기 좋도록 길이 나 있었는데, 직감적으로 바로 저게 태봉산성이구나란 생각이 들어 올라갔다. 포장이 잘 되어 있어 올라가는 데는 별로 어렵지 않았다.

▲ 태봉산공원이라고 쓰여져 있다. 태봉산성이란 이름보단 현지의 사람들에겐 공원으로서 인식되지 않을까란 생각이 든다. 지금은 이곳이 체육공원으로 되어 있다.
ⓒ 송영대
태봉산성이라는 안내판이 있어 역시 예상이 맞았다. 그런데 그 옆에 돌기둥에 무엇인가가 적혀 있었다. 태봉산공원(胎峯山公園)이라…. 이때부터 약간 이상한 냄새가 났다. 태봉산성이라고 써 놓으면 무슨 문제라도 된다는 말인가. 왜 공원일까란 생각이 자꾸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 태봉산성으로 올라가는 길. 시멘트로 잘 닦아 놓았다. 위의 길도 아스팔트로 잘 해 놓았는데, 그러면서 놓친 성곽의 유구가 있지 않을까란 걱정도 든다.
ⓒ 송영대
태봉산성으로 올라가는 길은 모두 아스팔트로 잘 닦아 놓았다. 차가 올라가도 끄떡없을 정도였는데 길을 걷다가 토기편을 발견하기도 하였다. 산성에 올라가다 보면 이처럼 토기 조각들이 여럿 보이곤 하는데 이는 단순한 의미를 넘어, 우선 옛날 이곳에 사람이 살았음을 말해준다. 그리고 그 토기의 종류가 무엇인지 보고 하나하나씩 비교하면 언제 때 사람들인가도 추측할 수 있으며, 이게 다수 출토되는 곳은 그쪽에 생활 유적이 있었다는 식으로도 유추할 수 있다.

하지만 이렇게 개발이 된 곳에서는 그러한 예상이 맞을 수도 있지만 도리어 맞지 않을 가능성도 많다. 개발할 때 흙을 치우면서 자연히 바깥으로 밀려나가게 되고, 이 경우 지표면에서 수집된 유물은 정확히 그 위치일 가능성이 낮다. 땅의 풍화작용에 의해서 바깥에 드러나고, 그에 인위적인 지표면의 변형이 가해지면 생각보다 그 의미는 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물이 많을 경우 유물 산포지라고 하여 그곳에 무엇인가 있었을 것이라 추측하는 것은 가능하다.

태봉산 정상까지 올라가자 기자를 반긴 것은 태봉산성의 우람한 모습이 아닌 태봉산 동네체육시설이었다. 체육시설 배치도까지 친절하게 나와 운동하기에 좋게 꾸며졌다. 그러나 정작 더 중요하다면 중요할 수도 있는 성곽에 대한 정보는 어디에도 없었다. 결국 열심히 성의 흔적을 찾아 태봉산 곳곳을 헤맬 수밖에 없었다. 사실 이 체육공원의 진입로를 만들기 위하여 성벽의 서쪽 부분이 잘려나갔다고 한다. 대충 그 부분이 어디인지 추측은 되나 확언하기도 힘들다. 기존에도 그 흔적이 별로 안 남은 게 문제일 수도 있으나 이미 개발이 되어 흔적을 찾기가 생각보다 쉽지 않기 때문이다.

우선 태봉산 정상부로 올라갔다. 정상부에는 무엇인가 있으리라는 막연한 기대감 때문이었다. 정상부로 올라가는 길도 돌로 된 계단으로 잘 꾸며 놓았다. 자꾸만 산성에 온 것이 아닌 공원에 온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어찌 보면 그게 사실일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게 바로 주객전도(主客顚倒)가 아닐까란 씁쓸함도 들었다.

▲ 태봉루. 1990년에 세운 것으로서 육모지붕을 한 정자이다. 이곳을 찾는 주민들과 관광객을 위해 세운 것이다.
ⓒ 태봉루
태봉산 정상으로 오르자 태봉루(胎峯樓)가 눈에 띄었다. 육모지붕의 태봉루는 세워진 지 별로 오래되지 않은 건물이다. 1990년에 세운 태봉루는 홍산 시가지와 그 주위를 둘러보기에 매우 적절하다. 아마도 이 태봉루나 정상 가운데 부분에 장대(將臺 : 장군이 군사를 지휘하는 곳)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태봉루 건립기

이곳 태봉산은 고려 우왕 2년 서기 1376년 최영장군께서 우리 고장에 침입한 왜적을 섬멸하기 위하여 강병을 양성하던 훈련장으로서 서쪽을 바라보면 홍산을 상징하는 비홍산이 창공을 향해 날을 듯이 우뚝 솟아있고 동북으로는 비옥한 구룡평야가 끝없이 펼쳐있으며 바로 산 아래에는 평화롭고 날로 발전하는 홍산 시가지가 한눈에 볼 수 있는 매우 아름답고 유서 깊은 곳으로서 일직이 이곳을 찾는 수많은 관광객들이 쉬며 갈 곳이 없어 못내 아쉬워하는 이 많아 아담한 정자를 세우기로 결심하고 임봉순 부여군수께 건의하여 일금 3천 만 원을 지원받아 여기에 이 누각을 세웠고 또한 우리고장 조현리 출신이시며 현재 우리나라 서도대가이신 원곡 김기승선생의 글씨를 받아 태봉루라 현판 하였으니 모름지기 이곳을 찾는 제형들께서는 이 누각을 내 집같이 아끼고 모든 시설물은 물론 풀 한포기 나무 한그루까지도 내 몸같이 보호하여 애국선현들의 얼이 깃든 이 역사의 현장을 영원무궁토록 후손에게 물려주기를 간절히 바라며 이 누각을 세우다

서기 1990년 11월
홍산면장 조종환 글
대추 김기환 씀 / 조종환, 김기환

태봉산 정상에 오르고 어렴풋이 든 느낌은 바로 이게 성곽이라면 체육공원이 있는 곳은 성곽의 내부가 되며 그 가운데에 인위적으로든 자연적으로든 높게 쌓아 놓아 장대가 있어서 적을 볼 수 있도록 해 놓았으리란 생각이다. 나무들만 약간 없다면 적의 동태는 쉽게 관측 할 수 있어 지리적으로 큰 이점을 갖게 되는데, 사실상 방어의 측면에서는 그다지 좋지 않은 편에 속한다는 생각이 든다. 도리어 방어의 측면보다도 적들을 탐색하고 그 길목을 알아내어 그에 따라 군사를 적시적소에 배치하기에 적절하다고 판단된다.

▲ 홍산대첩비. 고려시대 최영장군의 홍산대첩을 기려서 만든 비석으로 1977년에 세웠다. 홍산대첩은 그 당시 홍산 일대를 노략질하던 왜구들을 최영장군이 일거에 소탕한 전투를 말한다.
ⓒ 송영대
여기에는 최영 장군을 기려 만든 홍산대첩비가 있다. 이 비석은 1977년에 세운 것으로서 최영 장군과 고려군에 대해서 써있고, 홍산대첩의 대승에 대해 적혀 있다. 홍산대첩은 고려 우왕 2년인 1376년에 최영 장군이 이끈 고려군이 왜구를 무찌른 사건으로 <고려사> 권 113「최영열전」에는 그에 대한 자세한 기록이 남아 있다.

사건은 이렇다.

왜구가 지금의 논산 개태사에 쳐들어와 원수 박인계(朴仁桂)를 죽이고 고려군은 패하게 된다. 이게 고려 조정에 알려지자 최영은 우왕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늙을 몸을 이끌고 왜구를 무찌르러 떠나게 된다. 이때 최영은 이렇게 말하였다.

“보잘것없는 왜놈이 횡포하기를 이와 같이 하니 지금 제어하지 않으면 뒤에 반드시 도모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만약 다른 장수를 보내면 반드시 이길 것이라고 생각할 수 없으며 군사도 평소에 훈련하지 않았으니 또한 가히 쓰지 못할 것입니다. 신이 비록 늙었으나 뜻은 쇠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종사(宗社)를 편히 하고 왕실(王室)을 방위하고자 함이오니 원컨대 빨리 부하를 거느리고 가서 치게 하여 주옵소서.”

이런 최영이 군사를 이끌고 가서 왜구와 싸우게 된 곳이 바로 홍산이었다. 홍산에선 당시 왜구가 크게 기세를 떨치고 있었는데, 이들과 최영의 고려군은 맞닥뜨리게 되었다. 최영이 왜구와 맞닥뜨렸을 때 지형적 우위는 도리어 왜구에게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왜구의 단점은 수가 많지 않다는 점이었고, 최영은 이 점을 이용하였다.

적의 위세가 강하여 다른 장군들은 쉽게 앞으로 나아가기 힘든 상황에서 도리어 최영 장군은 정공법을 택하였다. 정공법은 아군으로서는 큰 피해를 입을 수도 있는 위험함도 있지만, 그 아군의 위세가 강할 시엔 도리어 적을 당황하게 함으로써 혼란을 줄 수 있다.

최영이 노린 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최영이 앞장서서 돌진하고 적을 베자 적들도 서서히 당황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한 적이 숲 속에서 최영을 향해 화살을 쏘았는데, 이게 입술을 맞추게 된다.

여기에서 최영은 역시 백전노장의 모습을 보여준다. 입술은 피가 가장 나기 쉬운 부분으로 한눈에 보아도 몸에 이상이 있음을 잘 보여준다. 그 상황에서 최영은 침착하게 자신도 활을 쏘아 자기를 쏜 적을 죽이고 얼굴색도 하나도 변하지 않은 채 입에 맞은 화살을 빼내었다.

그러고는 다시 적을 향해 돌진하니, 아군의 사기도 하늘을 찌르게 된다. 결국 군사 수에서도 불리한 입장이었던 왜구는 그러한 정공법에 제대로 당하게 되고 그동안의 상승세를 이 한 전투로 마감하게 된다. 최영의 군사적 재능과 위기에 대한 대응력이 빚어 낸 고려군의 대승리로서 후세에 홍산대첩이란 이름으로 알려지게 된다.

▲ 대옹 파편. 대옹이란 큰 항아리를 말하며 여기에 곡식이나 물을 담아 놓았다. 즉 대옹이 있다는 말은 여기에 여러 사람들이 살고 있었거나 창고가 있엄음을 의미한다.
ⓒ 송영대
성 내부에는 수많은 토기 조각과 기와 조각들이 널려 있다. 여러 조각들을 수집하였는데, 개중에는 한 뼘도 넘는 대옹(大甕), 즉 큰 항아리의 파편도 남아 있었다. 이러한 대옹은 주로 창고에서 쓰는 것으로 당시에 여기에 군량을 넣었거나 물을 보관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대옹이 발견된다는 것은 이곳에 여러 사람이 거주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기와가 있다는 것은 건물이 있었다는 말로 즉 여러 사람이 상주했다는 증거다. 즉 군사적으로 그 가치가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여기에서 살았고, 성을 쌓아 적의 동정을 살펴보았다는 것이다. 이처럼 작은 유물들로 그 당시 상황을 파악할 수 있는데, 이에는 여러 정보들을 유기적으로 연결시킴으로써 그 소산물이 나올 수 있다.

▲ 성벽으로 추정되는 곳. 태봉산성의 성벽은 정확히 무엇인지 단정짓기가 어렵다. 오랜 세월이 흘러서이기도 하지만, 애초에 우리가 생각하는 일반적인 성과는 약간 거리가 먼 보루 정도일 수도 있다.
ⓒ 송영대
태봉산성의 성벽이 어디라고 확실히 지목하기는 사실 무리가 없을 수가 없다. 이미 그 흔적이 많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체육공원 둘레가 성벽일 확률이 높다는 것과 그 위에 장대가 있었을 것이라는 정도는 어느 정도 예측 할 수 있다.

이에 대한 자세한 발굴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에 서운함을 감추기 힘들다. 그러나 산성은 옛 모습을 간직하든 그렇지 않든 그에 따른 깊은 뜻은 아직도 그대로일 것이다. 그 뜻을 우리가 알고 이게 체육공원이면서 홍산대첩의 현장임을 기억한다면 그 또한 나름의 가치를 지니지 않을까란 생각이 든다.

덧붙이는 글 | 2007년 5월 17일 홍산일대에 답사한 것에 대해 쓴 답사기입니다. 홍산일대 답사에 대해 4회에 걸쳐 연재할 계획입니다.


태그:#부여, #홍산, #태봉산성, #홍산대첩, #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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