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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신사는 오늘날의 대통령 비서실장이다. 비록 품계는 낮지만 왕명을 출납하는 막중한 관직이다. 업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균형감각을 잃거나 사리사욕이 끼어들면 임금의 통치행위에 누가 된다. 왕의 최측근에 있으면서 요설로 왕의 총명을 흐린다는 이유로 고려 말 정3품 밀직사를 종5품 지주사로 격하했으나 조선 건국과 함께 부활하여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다.

태종 재위 18년 동안 여덟 명의 신하가 지신사 자리를 거쳐 갔다. 지의정부사로 승진한 박석명이 있는가 하면 권력을 남용하여 문책 당하거나 이관처럼 파면된 사람도 있다. 후세에 이름을 남긴 황희도 있고 유사눌처럼 귀양 간 사람도 있다. 임금과 신하를 연결하는 징검다리에서 부침이 심한 자리다.

유사눌은 내약방에 들여오는 약재 소합유(蘇合油) 납품사건에 개입하여 권력을 남용한 혐의로 의금부에 투옥된 후 풍해도 안악으로 귀양 갔다. 하지만 이것은 구실에 불과하고 이숙번을 향한 유탄에 희생된 셈이다.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진 격이다. 대신들의 팽팽한 세력전에 중심을 잃고 한쪽으로 경도되어 새우등이 터졌으니 자업자득이다.

인도의 변방 소합국에서 유일하게 생산되어 소합향이라는 별칭을 갖고 있는 소합유는 한약재다. 우리나라 사신이 명나라에 들어가면 황제가 하사품을 내린다. 사향(麝香), 용뇌(龍腦), 침향(沈香) 등과 함께 그 목록에 낄 정도로 희귀한 약재다. 혈액순환을 촉진하여 중풍, 협심증에 탁월한 약효가 있는 희귀약재다.

치료 목적 외에 사기(邪氣)를 물리쳐 꿈에서 가위에 눌리는 일이 없도록 하고 오랫동안 복용하면 정신이 맑아지고 몸이 가벼워지며 장수 한다는 설 까지 퍼져 부르는 게 값이었으며 일본을 통하여 소량이 수입되기도 했다.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진 지신사

조선에 나와 있던 일본인 평도전(平道全)이 소합유를 내약방(內藥房)에 납품하는 과정에서 변질된 불량품이 발견되었다. 약방대언(藥房代言) 탁신이 벌레가 생겼다는 이유로 수납을 거절하자 유사눌이 압력을 행사하여 납품을 통과시키고 제용감(濟用監)으로 하여금 면주 66필과 목면 5필을 주게 하였다. 임금이 변질된 약재로 탕제한 약을 마시게 한 것이다.

대사헌 이원의 밀계로 이 사실을 알게 된 태종은 대노하여 유사눌과 탁신을 의금부에 하옥하라 명하고 의금부 제조 이천우와 허조를 불렀다.

"유사눌을 신임하였으나 나의 편견이었다. 유사눌과 같은 일은 발각 즉시 계달(啓達)하여 직책을 다하도록 하라. 옛날에 위징(魏徵)이 말하면 태종이 받아들여 정관지치(貞觀之治)를 이루었으니 임금의 허물을 포양(布揚)한 뒤에야 언관의 직책을 다하는 것은 아니다. 유사눌을 사전(詐傳)한 율(律)은 어떠한가?"

"사죄(死罪)입니다."

"과인을 속인 유사눌은 죽어 마땅하지만 그래도 사죄는 과하다. 곤장 100대를 쳐 풍해도 안악에 부처하라."

유사눌을 귀양 보낸 태종은 내약방 의원이 변질된 소합유를 폐기처분 하려하자 버리지 말고 보관하라 명했다. 변질 되었지만 꼭 쓸 곳이 있다는 것이다.

태종은 이숙번을 불렀다. 인적이 끊긴 창덕궁, 어둠이 내린 광연루에 조촐한 술상이 마련되었다. 대형 연회가 열리던 광연루에 임금과 신하가 술상을 마주하고 독대하는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이다. 태종이 작심한 자리다. 마주 앉긴 했지만 임금과 신하이기 때문에 북면과 남면이다. 북산에 둥지를 튼 부엉이가 가끔 울어댈 뿐 고즈넉하다.

"안성군과 술 한 잔 나누고 싶어서 불렀소이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이숙번은 임금이 내린 술잔을 예를 갖춰 받았다. 때마침 떠오른 보름달이 술잔을 가득채운 술 위에도 떠있다. 묘한 느낌이다. 조금은 두려움으로 다가온다. 기생을 데리고 술 마실 때는 어여쁜 여인의 얼굴처럼 다가오던 보름달이 오늘은 그게 아니다. 마음을 열고 속내를 보여 달라는 것만 같았다.

▲ 이숙번 수결
ⓒ 이정근
"우리가 밤을 새운 것이 여러 날 이지요?"
"감회가 새롭습니다."

이방원 야인시절 하륜의 천거로 이숙번과 처음 만난 후, 왕업을 이루기 위하여 수많은 밤을 새우던 일을 떠올리는 질문이다. 태종은 이숙번에게 또 한 차례 술을 쳐주었다. 역시 술잔에 보름달이 떠있다.

"나들이를 떠난다면서요?"
"송구스럽습니다. 몸이 찌쁘뜨 하여 온천에나 다녀올까 합니다."

며칠 전, 태종에게 일급 첩보가 접수되었다. 이숙번이 갑사 이징옥과 군사 몇 명을 대동하고 백천 온천에 나들이를 준비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괘씸했다. 신하가 군사를 대동하고 다닌다는 것도 불쾌했지만 따라 다니는 장수들도 한심스러웠다. 태종 이방원이 가장 싫어하는 아킬레스건을 건드린 것이다. 태종은 평소 붕당을 짓고 사병을 거느리는 것을 금기사항으로 생각했다.

"누구랑 떠나는 게요?"
"시종 몇 명과 가벼운 마음으로 다녀올까 합니다."

이숙번은 실수하고 있었다. 임금은 신하를 상대로 속내를 내보이지 않으면서 진실게임을 하고 있는데 이숙번은 그걸 몰랐다. 술잔에 떠오르는 보름달처럼 환하게 속내를 보여줬어야 했는데 그러하지 못했다. 이숙번이 나라의 정예군 갑사(甲士) 이징옥과 군사들을 시종쯤으로 생각하고 있다면 대단한 도발이었지만 태종은 애써 충격을 감추며 냉정을 잃지 않았다.

"안성군이 벌써 온천에 다닐 나이가 되었소?"
"불혹을 넘겼습니다."

이 때 이숙번 나이 마흔 셋이었다.

"하하하, 그래요. 난 아직 어린아이처럼 보이는데…."
"황공하옵니다."

또다시 이숙번의 빈 잔에 술을 쳐주었다. 이때까지 태종은 한 잔의 술도 마시지 않았다.

마지막 기회를 놓친 이숙번

"벌써부터 온천엘 찾아다니는 부원군에게 좋은 약재를 하나 내려 주리다. 소합유라고 아주 귀한 약재요."
"황공무지로소이다."

태종은 의약방에 명하여 버리려던 소합유를 가져오게 하여 이숙번에게 주었다. 이튿날 예궐한 이숙번이 임금을 배알했다.

"전일에 내려 주신 약은 매우 좋았습니다."

태종은 이숙번이 가소로웠다. 변질되어 벌레가 생긴 약을 먹고 좋았다니 가증스러웠다. 소합유 사건으로 귀양간 유사눌을 이숙번이 슬그머니 비호한 것 같았다. 곤장을 쳐 귀양 보낸 처사를 비꼬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태종은 내색을 하지 않았다.

이숙번이 온천에 다녀온 후 임금의 의중을 알았을 때는 이미 늦었다. 큰 죄를 지은 것 같아 병을 핑계 삼아 입궁하지 않고 근신하고 있는 동안 활시위를 떠난 화살이 이숙번을 향하여 날아오고 있었다.

태그:#이방원, #이숙번, #소합유, #지신사, #유사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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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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