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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소리 열사가(烈士歌). 웬만큼 소리를 좀 들어보았다는 사람도 고개를 갸우뚱한다. 판소리 중에 열사가라는 것이 있었던가. 그도 그럴듯이 ‘열사가’는 몇몇 명창들에 의해 근근이 맥을 이어오며 소리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아는 사람들만’ 아는 소리로 여겨져왔기 때문이다.

이 열사가가 15일 광복절 저녁, 전주 전통문화센터에서 불린다. 이번 무대를 준비한 이는 정소영 명창. 한참 막바지 연습중인 그녀를 12일, 그의 국악연구소에서 만나보았다. 삼복더위 때문인지, 정명창이 내뿜는 열정 때문인지 연구소 안에 들어서니 후끈한 기운이 감돈다.

▲ 광복절 저녁, <열사가>완창무대를 갖는 정소영 명창. 윤봉길 열사가의 한대목을 부르고 있다.
ⓒ 안소민
-더운 날씨에 수고가 많으십니다. 이번 무대를 준비하시면서 감회가 남다르실 것 같습니다.
"광복절을 앞두어서 그런지 감격스럽기도 하고 그러네요."

-부끄러운 얘기지만, 저는 판소리중에 열사가가 있다는 것을 이번 기회에 처음 알게되었습니다. 정명창께서는 열사가를 어떻게 처음 접하게 되었나요?
"열사가가 있다는 얘기는 예전부터 들었지만 본격적으로 배우게 된 것 2003년도였어요. 20년전부터 제가 쭉 알고 모셔왔던 이성근 선생님이라는 분이 계시는데 제가 그분 수양딸이거든요. 이 선생님은 국내에서 열사가를 사사하신 분 중 몇 안되는 분이세요. 그분은 늘 입버릇처럼 ‘이제 열사가 한번 배워야지 않겠냐’고 말씀하셨거든요. 그래서 2003년도 겨울부터 2004년 2월까지 배웠어요."

-이번에 부르는 열사가에 대해 간략하게 소개를 해주세요.
"이번 열사가는 이준, 안중근, 윤봉길 열사가예요. ‘이준열사가’에는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민족독립을 외치며 할복자살한 이준 열사의 순국정신이 담겨있고요, ‘안중근 열사가’는 특히 옥중에서 모친과 상봉하는 비장함이 극에 달한 작품이예요. ‘윤봉길 열사가’는 폭탄을 던지는 윤봉길 의사의 의거를 나타내며 해방이후의 기쁨을 함께 그린 작품입니다."

-처음 열사가를 접했을 때 느낌이랄까요, 어땠나요?
"처음엔 별 느낌없었어요. 너무 어렵기도 하고 힘들어서 ‘내가 지금 이걸 왜 배우나’ 싶은 적이 한두번도 아니었어요. 특히 당시 선생님께서 함께 배웠던 동생들이나 동기들 앞에서 날 어떻게나 호되게 꾸짖고 무안을 주시던지. 아마 제가 수양딸인게 이물어서(허물이 없어서) 그랬던가봐요. 근데 그때는 선생님이 얼마나 야속하고 밉던지 눈물이 다 났다니까요. 그 때는 열사가 테이프도 듣기 싫더라구요. 그러니 무슨 공부가 얼마나 되겠어요."

-그 당시에는 이렇게 열사가 완창발표회까지 하게되리라고는 생각지 않으셨겠죠. 무슨 결정적인 계기가 있었을 것 같아요.
"전주MBC <얼쑤 우리가락>에서 명창을 소개하는 코너가 있었어요. 지금도 하는 것 같던데. 어쨌든 거기서 올해 봄에 이성근 선생님을 소개하면서 열사가를 함께 소개하고 싶어하더라구요. 근데 선생님께서는 치아가 좋지않아서 틀니를 했거든요. 판소리는 소리꾼의 치아 상태가 무척 중요해요. 발음이 조금만 새거나 바람소리가 나도 제대로 된 발성을 할 수 없으니까요. 그래서 그 자리에 선생님 대신 제가 나가게 되었어요. 그리고 그것이 바로 제가 열사가를 다시 만날 수 있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고요."

눈물 쏙빠지도록 혼나면서 배웠던 기억

-그 당시 부른 대목이?
"‘안중근 열사’ 대목이었어요. 그 방송 준비하면서 열사가를 정말 열심히 배우기 시작했어요. 그러면서 드는 생각이 이 열사가를 좀더 열심히 배워서 완창회를 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죠. 그런데 그때가 3·1절을 얼마 앞두지 않았을 때였어요. 마음같아서는 3·1절에 하고 싶었지만 그러기엔 시간이 너무 촉박했죠. 그렇다고 평일날 하는 것도 좀 밋밋할 것 같고 그래서 광복절날 발표회를 하자고 결심했죠. 그리고 전통문화센터에 가서 바로 대관신청을 했죠."

ⓒ 안소민
-열사가는 부르시기에 어떤 가요? 다른 다섯마당 소리와 비교하면요?
"‘열사가’가 힘든 건 사실이예요. 다른 소리에 비해 내용도 딱딱하고 소리도 억세죠. 처음에 열사가를 배울 때는 이건 무슨 국사책 읽는 것 같아서 당체 적응이 안되더라니까. (웃음) 남자 목에 맞춰진 소리라 그런지 여자인 제가 부를 때면 다른 소리 몇 편 한 것처럼 곱절이나 피곤하고 힘들어요. 다루(판소리에서 꾸밈음)도 굉장히 많고.

근데 묘한 게 요게 부르면 부를수록 매력이 있는 거예요. 다른 사람들이 들으면 웃을지 모르겠지만 부를수록 애국심 비슷한 것도 생기고 가슴도 뭉클하게 그래요. 안 불러본 사람은 물라요."

-열사가 중 특별히 마음에 든다거나 감동적인 부분이 있다면요.
"이번 발표회에서는 이준 열사와 안중근열사, 윤봉길 열사를 불러요. 각 대목마다 감동적인 부분이 다 다른데 이를테면 이준 열사의 경우, 나라 걱정하는 마음이 잘 드러나는 대목이 그렇고 윤봉길 열사의 경우, 해방의 기쁨과 환희가 드러나는 대목이 그래요.

안중근 열사의 경우에는 면회 온 안중근 열사의 모친께서 한탄하는 대목이 가장 절절해요. 정작 당신의 아들 앞에서는 의연하면서 뒤돌아나오면서 한스럽게 우는 대목이 어찌나 가슴이 아픈지. 저도 일곱 살난 딸아이의 엄마라서 그런지 그 대목이 가슴깊게 다가오대요.

(진양조) 태연히 돌아서서 옥문밖을 나갈적에 어간이 먹먹 흉간이 꽉 차오르고 하날이 빙빙 돌고 땅이 툭 꺼지난 듯 섰던 자리에 주저 앉더니만은 아이고 이자식아 너의 의열은 장커니와 늙은어미는 어쩌라고 네맘대로 허였느냐 너를 낳서 기를적에 특재 총명이 하날로 떠오르기로 쥐면 끌까 불면 날까 금옥같이 길렀더니 오늘날 만리타국에 와서 모자 영별이 웬일이냐 아이 흉측한 왜놈들아 너희를 쫙쫙 찢어 사지를 갈라놓아도 이원수를 내가 언제나 갚을거나 주먹을 쥐여서 가슴을 뚜다리며 복통단장으로 울음을 운다’ -안중근 열사가 중-

-이번 공연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이성근 선생님께서 누구보다 기뻐하셨을 것 같은데요, 뭐라고 하시던가요?
"겉으로 표현은 안 하시지만 속으로는 무척 기뻐하고 계셔요. 그렇잖아도 맥이 끊겨가고있는 마당에 열사가를 배운다는 것만도 대견한데 여러 사람 앞에서 완창발표회까지 연다니 매우 대견해하고 계시는 것 같아요. 그것도 광복절에 맞춰서 한다니 감개무량하시겠죠. 그래도 겉으로는 표현 안 하세요. 오히려 ‘너 하다가 가사 까먹어버리믄 어쩐다냐’ ‘잘해야할텐디’라며 늘 걱정이시죠.(웃음) 이번 공연에서는 고수를 맡아주세요."

▲ <정소영 열사가 완창발표회>포스터
ⓒ 정소영 국악연구소
-포스터를 보니 이번 공연에 여러명이 출연하는 것 같던데요. 여러명이 부르는 대목도 있나요?
"윤봉길 열사 대목에서 해방의 기쁨을 나타내는 부분이 있어요. 기쁨의 표현은 한 사람보다는 여러명이 함께 부르는 것이 더 감격적이고 극적일 것 같아서 초등학생 8명과 지인 7명이 동참하기로 했어요. 그리고 그 대목이 끝나고 나면 관중들과 함께 태극기를 흔들며 ‘아리랑’을 부르는 대목도 준비했어요.

-멋진 광경이 되겠네요. (책상에 놓인 태극기를 가르키며) 이것이 그 태극긴가요?
"이것은 저희 출연자들이 쓰는 거고요, 관객용 태극기는 공연이 끝난 뒤 회수가 어려워 종이로 만들었어요. 저쪽 박스에 따로 다 포장해두었죠. 제 것은 한 화가분께서 손수 그려주셨답니다. (태극기가 그려진 합죽선을 가리키며) 예쁘죠?"

-와! 준비를 많이하셨네요.
"광복과 관련된 필름도 상영해요. 아무래도 귀로만 듣다보면 좀 따분하고 지루할 수도 있으니까요. 관중석 오른 편에 슬라이드 필름을 공연시간 내내 상영할 예정이에요. 귀로도 듣고 눈으로도 보고 합창도 하고."

-퍼포먼스도 하고요.
"네. 만세 삼창도 합니다."

-열사가 완창무대, 이번으로 끝내시지는 않겠죠?
"물론이죠. 내년부터는 초등학생 아이들을 좀 더 많이 섭외해서 창극형식의 공연을 준비할 생각이에요. 그리고 한가지 바람이 있다면 해외공연도 꼭 하고 싶어요. 특히 저희 교민들이 사는 곳에 가서 무대에 서고 싶습니다. 저도 그렇고 해외교민들도 그렇고 그 감회가 남다를 것 같아요.

▲ 이날 공연 마지막에는 관중과 출연자가 함께 '아리랑'을 부르는 시간이 준비되어있다. 이 시간만큼은 모두 한마음이 되어 태극기를 휘날리리라.
ⓒ 안소민
저도 열사가를 부르기까지, 열사들이나 애국 지사들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어요. 그냥 막연하게 훌륭하신 분들이다는 생각만 했을뿐이죠. 그런데 열사가를 배우며 그분들 삶을 찬찬히 되돌아보게 되었어요. 그리고 참 눈물겨우면서도 진실한 삶을 살다가 간 분들이라는 것을 새삼 느끼고 있어요. 그냥 해마다 으레히 맞는 광복절이려니 생각하지 말고 이번 기회를 통해 그분들의 삶과 혼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는 그런 자리가 되었으면 하는게 저의 작은 바람입니다."

해방후 생겨난 '열사가', 박동실명창에 의해 창작,보급
대중들사이 폭넓은 인기누려...군사시절, 암묵적으로 금지되기도

창작판소리 <열사가>는 해방을 전후하여 생겨났다. <열사가>는 일제의 부당한 식민지 지배에 대한 강력한 항의의 의미를 띤 예술 형태로 주로 이준, 안중근, 윤봉길, 유관순 등 일제에 대하여 폭력적 저항을 했던 인물의 행적을 소개하고 이들의 행위를 판소리로 기리는 것이다. 이 <열사가>는 대체로 일제 지배의 부당함을 지적하면서 항일민족의식을 고취하고자 하는 목적이 있었다.

<열사가>를 창작하여 보급시킨 인물로는 박동실이 대표적이라고 하겠다. 판소리 창자 가운데서 특히 박동실은 이념적 성격이 특히 강한 인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박동실은 서편제의 소리를 하였다. 그는 박유진, 이날치의 맥을 이어온 명창으로 특히 판소리의 보급뿐 아니라 교육에 뛰어난 능력을 가졌다. 그러나 박동실은 1950년경에 월북하여 그의 예술세계에 대한 전반적인 검토가 이루어질 기회가 없었다. 박동실의 음반자료는 아주 드문 편인데 최근 그가 부른 흥보가 한 대목이 소개된 바 있다.

박동실에서 열사가를 배운 사람으로는 한승호, 김동준, 장월중선, 김소희 명창을 들 수 있다. 해방직후에는 <열사가>가 유행처럼 번져서 수많은 창자들이 이 작품을 배웠다. 고흥출신인 송영석은 정권진 명창과 한 짝이 되어 보성 일대를 순회공연하기도 했다하니 그 폭넓은 인기를 짐작할 만하다.

이 <열사가>는 1960년대 초반까지는 판소리 창자들이 짤막하게 부르는 주된 레파토리였는데 1961년 군사지배가 시작되고 이들 집단이 일본과 외교를 수립하는 과정에서 노골적으로, 혹은 암묵적으로 이 노래를 공개된 자리에서 부르지 못하게했다고 한다. -정소영 열사가 완창발표회 안내문중에서 발췌-

덧붙이는 글 | 정소영 명창은 원광대학교 국악과를 졸업했으며 박동진 명창 명고대회 명창부 최우수상 등을 수상했으며 성우향, 김수연 명창으로부터 춘향가, 수궁가, 심청가, 흥보가를 사사했다. 현재 정소영 국악연구소를 운영, 후학양성에 힘쓰고 있다.


태그:#광복절, #열사, #정소영, #온고을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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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아픈 것은 삶이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도스또엡스키(1821-18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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