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 현경 미 유니온신학대 교수.
ⓒ 오마이뉴스 강이종행

"우리는 죽고 싶지 않아요."

자신의 이름을 싱조힌(Sing Jo Hin)이라고 밝힌 한 피랍여성이 AFP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이 같이 말했다. 이 여성은 모두 공포 속에서 지내고 있으며 그들이 우리를 죽이겠다고 협박하고 있다고 전했다. 그녀의 이 말은 살려달라는 절규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인간의 한계와 마주친 그들이 제발 인질의 생명 끈을 놓아버리지 말라고 호소한 대목은 가슴을 친다.

잘잘못을 떠나, 우리 국민 23명이 아프간 무장세력에게 피랍된 뒤 이미 2명이 죽고 남은 21명이 매일 총구 앞에서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한 채 지낸다는 건 그 자체로 경악이다.

남은 21명이 모두 안전하게 돌아올 수 있는 모든 방법을 강구해야 할 이때, 평소 큰 목소리를 자주 내던 한국 기독교 지도자들이 세계를 향해 인질석방과 아프간 평화를 위한 집단적 목소리를 내지 않는 점이 고개를 갸웃하게 하기도 한다.

이 가운데 한 여성 기독교 신학자가 입을 열었다. 아시아 여성 최초로 종신교수가 된 진보신학의 명문 미국 유니언신학대 현경 교수다.

▲ 25일 아프가니스탄 경찰 차량이 가즈니주의 탈레반에게 살해된 한국인 인질이 발견된 장소에 도착하여 경계근무를 서고 있다.
ⓒ AP 연합뉴스

"탈레반의 가슴을 움직여라!"

그는 지난 4일 다니엘 A 고메즈이바네스 종교간 세계평화위원회 사무총장과 함께 귀국했다. 오는 10월 강원도 화천에서 열리는 세계평화회의 준비 차 온 것이다. 현경 교수는 조만간 종교간 세계평화위원회 명의로 인질석방을 촉구하는 성명을 발표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서울의 하늘을 짓눌렀던 먹구름이 가라앉은 5일 오전 강원도에 머물고 있는 그와 전화로 만났다. 밝고 경쾌한 목소리의 현경 교수는 휴머니즘적 접근이야말로 인질석방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피랍자의 어머니들이 직접 아프가니스탄 NGO와 협력해 현지를 방문, 인질석방을 호소하는 것이 정치적인 협상보다 빠른 길이 될 수 있다고 전하기도 했다.

"사람들은 절더러 순진한(naive) 생각을 한다고 할지 모르겠으나, 탈레반도 가족이 있잖아요? 우리가 반미집회나 반탈레반 집회 같은 형식의 데모를 하는 것보다 지금과 같은 때는 인간적인 호소가 훨씬 더 큰 힘을 발휘할지 모릅니다."

현경 교수는 피랍자 가족들이 아프가니스탄 현지 인권단체의 도움을 받아 직접 방문하는 것도 중요한 석방수단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탈레반의 가슴을 움직이는 게 전혀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는 것이다.

무엇보다 그는 국내 네티즌여론 가운데 탈레반을 악마로 비유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그것은 사태를 푸는 데 결코 도움이 안 된다고 피력했다. 한국정부가 무능하고, 미국정부가 잘못된 정책을 쓰고 있다는 주장은 정확히 맞는 말이지만, 지금 이 순간은 각자의 약점을 드러내고 비판하는 것보다 서로의 지혜를 모으는 게 중요하다는 판단이 든다고 했다.

"촛불집회 할 때 부정적인 말들만 쏟아낼 게 아니라 탈레반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감성적 접근은 없나 고민해봐야 합니다. 정치색을 배제하고, 아주 평화적인 방법으로 촛불집회를 하면서 인질은 모두의 자식이니 풀어달라고 하는 것도 도움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 아프가니스탄에서 탈레반에 의해 피랍된 뒤 살해된 것으로 확인된 고 심성민씨가 활동하던 샘물교회 장애인들을 위한 예배학교 '사랑부' 조혜숙씨가 지난달 31일 오후 경기도 분당 피랍가족대책본부에서 21명 피랍자들의 석방을 호소하며 눈물을 흘리고 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인질이 살아 돌아올 수 있는 가장 낮은 확률은 군사행동"

현경 교수는 이번 사태를 풀어가면서 절대로 폭력을 통한 군사행동을 고려해서는 안 된다고 수차례 강조했다. 군사행동은 더 많은 사람들을 상처 입게 할 것이며, 21명의 인질이 살아서 돌아올 가장 낮은 확률이라고 못 박았다.

"미국은 탈레반세력을 와해시키기 위해서라도 인질을 미끼로 군사작전을 펼 가능성이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그것은 비평화적이며 반인권적인 것입니다. 미국이 행여라도 그런 행동을 하지 못하도록 시민사회가 원천봉쇄해야 합니다."

현경 교수는 우리 정부가 절대로 군사행동은 없다는 점을 미국과 아프가니스탄 정부에 다시 쐐기를 박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우리 국민들이 직접 나서서 목에 칼이 들어와도 군사행동은 절대 안 된다는 점을 정부에 전달해야 한다는 것이다. 탈레반이 이 점을 신뢰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도 강조했다.

이어 그는 "지금 상황을 보자면 아프가니스탄과 미국정부가 인질석방을 위해 별로 성의를 보이지 않고 있는 게 사실"이라며 "정부협상단은 파슈툰부족이 어떤 역사적 맥락을 갖고 있는지 잘 알고 대응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파슈툰족은 순박한 시골사람과 같아요. 옛 소련-아프간 전쟁에서 미국과 한 편이 돼 싸웠던 세력이 바로 탈레반이잖아요. 미국이 길러낸 사람들이죠. 이 단순한 농부들이 지금 자기들이 알고 있는 단편적인 신학지식만을 토대로 본인들이 정당방위를 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사실 이슬람 전통에 따르면 여성과 어린이를 포로로 삼는 것은 말이 안 돼요."

현경 교수는 피랍자 가족들이 직접 아프가니스탄에 가서 그 사회의 존경받는 부족의 어른, 이맘이나 물라 같은 종교계 지도자들과 만나 직접 호소하는 게 좋겠다고 조언했다. 이슬람과 기독교, 가톨릭, 불교와 같은 세계 종교계에도 직접 당부하면서 세계적 여론을 움직이는 방법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 배형규 목사에 이어 심성민씨가 아프간 탈레반에 의해 추가 살해된 지난달 31일 저녁 서울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열린 아프간사태 평화해결 촉구 집회에서 참가자들이 미국의 아프간 점령과 한국군 파병을 규탄하는 구호를 외치고 있다.
ⓒ 오마이뉴스 남소연

"돈과 무기로 탈레반 무자헤딘을 만들어낸 게 누구인가"

"정부가 직접 탈레반세력과 담판을 짓고 해결하겠다고 나섰지만, 탈레반을 '미친 악마'쯤으로 취급하면 일이 잘 풀리지 않을 것입니다. 탈레반도 휴머니즘을 가진 사람이며 무슬림이라는 것을 잘 전달해야 합니다. 피랍사태를 푸는 가장 중요한 열쇠 중 하나가 바로 인간주의 접근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철군 등과 같은 명분과 실질적 도움을 줄 수 있는 실리, 두 축을 기본으로 해야 합니다. 아마 지금쯤 탈레반도 몹시 괴로울지 모릅니다. 인질들을 그냥 풀어주자니 세계적 망신거리가 될 테고, 계속 붙잡아두자니 자신들이 몰살당할까봐 걱정되고. 진퇴양난일 거예요.

그래서 제 생각에는 탈레반의 체면을 올려주면서 보이지 않게 실리까지 건네면 곧장 풀려날 가능성이 높다고 봅니다. 특히 파슈툰부족의 명예와 전통에 따라 여성들을 풀어주라고 하면 곧 풀릴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는 인질석방을 위한 양면전술이 필요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탈레반을 악마로 보고 협상하면 인질들은 한 걸음씩 더 죽음과 가깝게 서게 될지 모른다는 경고도 잊지 않았다.

"탈레반은 가난하고 못 배운 사람들입니다. 늘 억눌려 살던 순진한 사람이 한번 화가 나면 더 무섭다는 말이 있듯이 탈레반이 딱 그런 사람들이에요. 아프가니스탄의 역사적 맥락에서 탈레반을 보십시오. 그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잘 보입니다. 탈레반을 악마화 하는 것은 이 문제를 푸는 데 별로 도움이 안 돼요.

또, 탈레반은 미국의 아들입니다. 순진한 사람들에게 미국이 돈과 무기를 주고 무자헤딘으로 키웠어요. 그런 뒤 아무런 뒤처리 없이 아프가니스탄에서 떠났죠. 배운 게 없고, 가난한 그들이 전쟁 말고는 아는 게 없는데, 뭘 하겠습니까. 무기 갖고 분노하는 액션밖에 할 게 없어요. 만일 미국과 서방세계가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 테러와의 전쟁 대신, 무기에 쓰는 돈을 교육과 의료 같은 원조에 썼다면 아마 지금쯤 미국의 가장 좋은 친구가 됐을 것입니다. 석유에 지나친 욕심을 가진 미국이 자꾸 그들을 이렇게 몰고 가고 있는 거지요."

현경 교수는 평화운동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는 '적이 우리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라고 했다. 우리도 탈레반과 같은 환경이라면 누구나 탈레반이 됐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 역지사지의 관점이 생긴다는 것이다.

또한 현경 교수는 인질들에게도 이런 말을 하고 싶다고 전했다. "탈레반과 친하게 지내라, 그들을 인간적으로 대접하라, 그것이 살아남는 길이다." 군사작전을 우려한 탈레반이 소탕작전을 겁내 인질을 한명씩 따로 분리해 민가에 보호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는 가운데 이 같은 말은 더욱 설득력을 얻고 있다. 현경 교수의 말이다.

"쥐가 코너에 몰리면 고양이도 무는 법입니다. 탈레반을 너무 코너로 몰면 안 돼요. 파슈툰족은 명예를 너무 중요하게 생각해서 심지어 '명예살인' 같은 것도 생길 정도잖아요. 그런 그들의 체면과 양심, 명예를 건드리면 뭔가 변화가 생길 수 있지 않을까요?"

▲ 오늘날 한국교회만큼이나 단기간에 선교강국으로까지 떠올랐던 사례는 세계 기독교 역사상 매우 드문 것이다. 하지만 더 놀랍게도 한국교회는 대체로 '예수의 역사적 삶'을 따른다기보다 '예수에 관한 교리'를 믿고서 이를 전파하고 있을 뿐이라는 점이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이슬람국가에서 한국 선교사에 대한 원성이 자자해요"

현경 교수는 이번에 피랍된 사람들의 아킬레스건과 같은 '선교'의 문제도 함께 지적했다.

"23명의 뜻은 고귀하지만 기독교 선교에 대해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슬람이 원하지 않고, 또 법적으로 금지된 나라에 개종이라는 미션을 갖고 갔다는 것 자체가 무례한 거죠. 우리 정부에 미리 얘기하지 않은 점도 예의에 벗어난 행동입니다. 기독교 신학자의 입장에서 보자면, 기독교 선교신학에 대해 반성하고 생각해볼 기회입니다."

한국식 기독교 선교의 문제냐고 묻자 현경 교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한국식 기독교 선교라는 말은 없다는 것이다. 미국식 근본주의적 기독교의 문제라고 지적했다.

"미국 기독교는 그동안 많이 바뀌었는데, 한국 기독교는 마치 지난 100년간 냉동고에 들어갔다 나온 것처럼 그대로 과거 미국식 근본주의 기독교를 답습하고 있어요. 자본주의에 근거한 근본주의 기독교 신학. 100년 전 사고가 그대로니까 어떻겠습니까. 한국 교회가 미국에서 받아들인 근본주의 신학과 선교에 대한 반성이 필요한 때입니다."

현경 교수는 이번 피랍에 앞서 무려 15개 이슬람국가를 순례했다. 지난해 9월 시작한 '이슬람 평화 순례'는 터키와 스페인, 모로코와 이집트, 시리와 레바논, 이란, 파키스탄까지 이어졌다. 약 1년여간의 순례는 올 8월초에 마무리됐다. 순례기간 내내 그가 들었다는 얘기다.

"이슬람국가에서 한국 선교사에 대한 원성이 자자했어요. 그래서 저는 '역선교사'라고 말하고 다닐 정도였어요. 여태까지는 기독교가 우월하고, 가르치려들고, 개종하려고 했다면, 나는 공부하러 왔다고 말입니다. 내가 보고 들은 이슬람 얘기를 그대로 기독교공동체에 전달하겠다고 말이에요. 이슬람의 한과 고통에 대해 잘 듣고 잘 전달하려고 합니다."

현경 교수는 "이번 피랍사건을 통해 기독교 선교의 방법과 자세, 목적과 태도를 다시 검토하는 계기가 돼야 할 것"이라며 "선교는 기독교를 믿어야만 구원된다고 전파하는 게 아니라 하느님사랑, 이웃사랑을 몸소 실천하고 체험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에 온 개신교 종자가 배타적이었다"
현경 미 유니온신대 교수는 누구?

▲ 현경 미 유니온신대 교수
현경 교수는 올해 쉰하나의 여성 신학자다. 국내에서는 페미니스트 신학자로도 이름이 높다. <한겨레>에 '앗살람 알라이쿰'을 연재하고 있다. 그동안 <결국은 아름다움이 우리를 구원할 거야 1, 1> <미래에서 온 편지> 등을 썼다.

1979년 이화여대 기독교학과를 졸업한 뒤 클레어몬트 신학교에서 석사를, 유니온대에서 석사와 박사를 했다. 89년부터 96년까지 7년간 이화여대 기독교학과 교수로 재직했으며, 97년부터 유니온신학대에서 종신교수로 일하고 있다. 달라이 라마 등과 같은 세계적인 종교지도자들의 평화회의인 종교간 세계평화위원회에는 자문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그는 한 언론매체와의 인터뷰에서 "한국에 들어온 개신교 종자가 배타적"이라며 "미국 자본 선교사들이 교회를 세웠기 때문에 한국 기독교는 성장주의, 미군정과 함께 새마을운동을 한 셈"이라고 비판했다.

현경 교수는 목사과정을 전부 마쳤지만 목사가 되지 않았다. 이유는? 너무 많은 권력을 가졌다는 생각 때문이다. 박사에다, 석사학위가 셋이나 되고, 거기다 종신교수인데 목사까지 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권력이 자칫 여성과 자신의 사이를 멀게 만들 것 같다는 생각 때문에 가부장적 사제는 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거룩한 마초, 군주같은 신 대신 몇 백만 송이의 꽃처럼 다 다른 색깔, 다른 모습으로 피어나는 것이 새로운 문명이라고 믿고 살고 있다.

태그:#아프가니스탄 피랍, #탈레반, #무자헤딘, #현경 미국 유니온신학대 교수, #파슈툰족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