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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24일, 제주 서귀포시 중심가에 위치한 이중섭 미술관을 찾았다.

가장 한국적이면서 가장 현대적인 작가로 알려진 이중섭은 6.25 전쟁당시 서귀포로 내려와 피난생활을 하였으며 이때 '서귀포의 환상' '게와 어린이' '섶섬이 보이는 풍경' 등의 주옥같은 작품을 많이 남겼다.

이곳에서는 전국에서 최초로 화가이름을 거리 명으로 명명한 이중섭거리와 그가 살던 초가가 복원되어 관광객을 반겼다.

▲ 이중섭거리의 모습
ⓒ 송춘희

▲ 이중섭거리에 있는 카페의 모습
ⓒ 송춘희
이중섭거리를 따라 언덕을 올라가면 그가 세 들어 살던 초가도 있고 그의 방에는 소박한 그의 사진이 액자 속에 들어 있었다. 이중섭의 집은 이중섭이 장남인 태성과 차남 태현과 함께 1951년1월부터 12월까지 살면서 활동하던 곳인데 방의 크기는 1.4평, 부엌 크기는 1.9평으로 그의 어려웠던 환경을 여실히 대변해주고 있었다.

▲ 이중섭이 세들어 살던 집
ⓒ 송춘희

▲ 이중섭 생가에 있는 그의 사진
ⓒ 송춘희

▲ 이중섭이 세들어 살던 집의 부엌
ⓒ 송춘희
그의 초가집을 나와 계단을 오르면 이중섭미술관이 있다. 미술관에는 총11점의 이중섭 작품이 진열되어 있었다. '파도와 물고기' '게와 가족' '아이들' '매화' '파란 게와 어린이'등 그의 작품뿐 아니라 그의 아내 야마모토 마사꼬(이남덕)와 주고받았던 편지를 액자에 넣어 두었다.

▲ 이중섭이 아내에게 보낸 4장의 편지들
ⓒ 송춘희
아내가 친구인 '구상'에게 남편의 소식을 궁금해 하며 쓴 편지도 있고 아내인 야마모토 마사꼬가 남편과 떨어져 살며 보낸 애틋한 사연의 편지도 있었다. 그가 1955년 한국에 머무르는 동안 일본인인 아내 마사꼬는 일본에 머물면서 두 아들을 돌보고 있었는데 그 시기에 남편에게 보낸 편지였다.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친구와 전람회를 여는 당신의 소식을 들었습니다. 당신에게 편지를 보내지만 답변이 빨리 오지 않으면 나는 언제나 불안합니다. 친구인 구상씨께 늘 신세를 져서 참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그동안 이것저것 생각 하느라 살이 좀 빠졌지만 그래도 활기차게 보내고 있으니 너무 걱정은 마세요. 사랑하는 이여! 아무리 세세한 것이라도 당신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싶은 것이 부인의 심정이랍니다. 가을까지는 이사를 가야 할 텐데 당신과 상담할 것이 많아요. 그러니 부디 당신의 모든 것에 대해 연락을 보내주었으면 좋겠어요. -긴 답을 기다리며 당신의 남덕 ...... 1955년 4월24일

그는 아내보다 잦은 연락을 취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가 남긴 네 장의 편지에 의하며 그가 아내를 극도로 존경하며 사랑한 흔적이 여실하다. 그는 아들아이와 아내가 볼을 맞대고 있는 사진을 보내달라고 하며 다시 만날 때까지 기운 내어 달라고 편지에 쓰고 있다.

이중섭이 일본인 여자와 결혼하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힘든 결혼이었던 만큼 그는 무척 가족을 사랑하고 중하게 여겼던 것으로 보였다. 그의 편지와 아름다운 그림을 감상하고 이중섭 생가를 거쳐 다시 돌계단으로 내려왔다.

▲ 이중섭의 그림 '섶섬이 보이는 풍경'
ⓒ 송춘희

▲ 이중섭미술관밖에서 바라본 풍경, 멀리보이는 섬이 섶섬일까?
ⓒ 송춘희
이곳은 시내 중심가에 있었지만 관광명승지에 비해 사람들의 발길이 무척 드물었다. 돌계단 귀퉁이에는 떨어진 탐스런 감굴 한 개만이 외롭게 지키고 있었다. 40의 나이에 요절한 그의 생애처럼 쓸쓸하게.

▲ 이중섭 미술관에 있는 그림 '황소' (복사본)
ⓒ 송춘희

▲ 길모퉁이에 떨어진 감귤의 모습
ⓒ 송춘희

덧붙이는 글 | 유포터뉴스에도 송고합니다.


태그:#제주도, #이중섭, #섶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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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이야기입니다.세상에는 가슴훈훈한 일들이 참 많은 것 같아요. 힘들고 고통스러울때 등불같은, 때로는 소금같은 기사를 많이 쓰는 것이 제 바람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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