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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이 예수그리스도는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든지 빼앗기든지 하면 무엇이 유익하리요"라며 생명의 존엄한 가치를 사람이 가져야 할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꼽았고, 불가에서 승려들이 지팡이를 두드리며 길을 걷는 것도 자칫하면 자신의 발에 밟혀 목숨을 잃을 땅위의 작은 생명들을 보호하기 위한 행동이란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이러한 종교적 가르침이 아니더라도 살인은 인간이 저지른 범죄 중 가장 악랄한 범죄이고 더구나 그 대상이 자신과 은원 관계가 없는 불특정 다수이며, 살인의 목적이 살해 대상과 관련이 없는 또 다른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되는 테러리즘을 옹호하고픈 마음은 추호도도 없다는 사실을 미리 밝혀 둔다.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근원 - 천년 이상을 이어온 이복형제의 대립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간략하게나마 유대교와 기독교 그리고 이슬람교의 역사적 신앙적 배경을 살펴보자면, 기독교와 이슬람교 그리고 유대교의 뿌리는 같다. 그들은 모두 성서 창세기에 등장하는 아담과 이브(하와)의 자손이며, 아브라함과 모세 등의 선지자 그리고 구약성서의 같은 경전으로 공유하고 있다.

하지만 예수의 등장과 "나와 내 아버지(하나님)를 믿는 자는 누구든지 천국에 갈 수 있다."는 가르침이 유대인들이 수천 년을 간절히 기다려온 메시아(구세주), 즉 유대민족만을 위한 구세주를 부정한다는 이유로 등을 돌리게 되며 같은 이유로 유대교 랍비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매달아 처형한 것이다.

예수의 고향에서 배척당한 초기 기독교는 갖은 박해에도 불구하고 성장에 성장을 거듭했다.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으며 애통해 하는 자는 위로 받을 것"이며 "하나님을 믿으면 누구나(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신분의 귀천에 관계없이)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예수의 가르침은 억압과 수탈에 시달리는 수많은 민초들에게 무한한 희망을 주었던 것이다.

이처럼 은밀하게 교세를 확장해온 기독교도들은 로마의 선교에 집중하였고, 결국 AD 310년에 이르러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이르러 로마의 국교로 공인받게 되고, 정치권력과 결탁한 교회는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여 향후 천년간 유럽인의 의식을 지배하는 절대가치로 자리 잡게 된다.

반면 이슬람교는 A.D 610년경 무함마드가 '히라' 동굴에서 명상에 잠겨 있을 당시 '대천사 가브리엘'(구약성서에 자주 언급되는 천사)로부터 전해 들었다는 신의 계시를 출발점으로 한다. "알라 만이 유일한 신"이라는 무함마드의 계시는, 당시 유대교와 기독교에서 구원에 대한 해답을 찾지 못한 아랍인들의 의식에 큰 반향을 주었지만, 일체의 우상숭배를 거부하는 무함마드의 가르침은 당시 세계의 기득권층이라 할 수 있는 상인들의 미움을 사 박해를 당하게 된다. 결국 무함마드의 계시는 AD 650년 제3대 칼리프 오스만에 의해 정리되어 경전으로 공인 되었고 이것이 바로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코란'의 기원이다.

이처럼 한 뿌리에서 출발한 이복형제들은 하나는 고향에 남고(유대교), 한 형제는 로마로(기독교), 그리고 또 다른 한 형제는 아랍세계에 정착하면서 향후 천년 이상을 인류역사에 말로 형용하기 어려운 끔찍한 비극을 남긴 유혈투쟁으로 이어지게 한 것이다.

인류 최악의 야만적 전쟁 - 십자군 원정

위의 세 종교가 같은 뿌리에서 출발했다는 이유로 예루살렘은 기독교와 유대교 그리고 이슬람교 모두에게 있어서 공히 성도(聖都)로서 추앙 받았다. 신자에게 있어서 성지순례는 평생을 염원하는 간절한 소망이었지만 유럽의 기독교도에 있어서 예루살렘 순례는 쉽게 이루어 질수 있는 꿈이 아니었다. 성도 예루살렘이 '셀주크 트루크'의 수중에 있었기 때문이다.

정치권력이 정점에 달했던 11세기 말 교황 '우루반 2세'는 교회 권력과 대립하는 제후들의 힘을 소모시키고 권력을 교황에게 집중시키기 위한 전략의 일환으로 '클레르몽'에서 십자군원정을 제창하게 된다. 물론 전쟁의 명분은 '성지회복'이었다.

'성도 예루살렘 수복'을 전쟁의 기치로 내 걸고 십자가 깃발을 나부끼며 출발한 십자군 원정은 그들이 표방해온 성스러움과 전혀 상반되는 살인과 약탈. 방화. 강간. 인종청소 등 입에 올리기도 거북한 야만적 만행을 자행함으로서 모슬렘들에게 깊은 상처와 증오심을 남겨주었다. 결국 11회에 걸친 십자군 원정은 처음 전쟁 목적이었던 교황권의 강화와는 정 반대인 교회의 몰락을 자초하였고 이 전쟁은 인류 역사상 가장 추악한 전쟁으로 남게 되었다.

미국의 이슬람 지배 - 석유는 축복 아닌 재앙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알라'가 모슬렘에게 선물한 석유는 그들에게 있어서 축복이자 재앙이었다. 20세기 초반 유럽의 제국주의 국가들은 석유를 노려 이슬람 국가를 침공하기 시작했고 그들이 확보한 산유국에 대한 이권은 2차대전의 최대 승전국인 미국에게 고스란히 귀속 되었다.

패권국가 미국은 중동의 강대국인 이란의 팔레비 왕조를 백색혁명(회교율법에서 이란을 해방시킴) 지원함으로서 이란을 미국에 종속시키려 했지만 '야마툴라 호메이니'를 중심으로 한 회교 혁명지지자들은 팔레비 왕조는 종식시키고 반미 독자노선을 걷게 된다. 이란이 손아귀에서 빠져나가자 미국은 이라크에 눈을 돌리고 부도덕한 독재자 '사담 후세인'으로 하여금 '중동의 맹주가 될 것'을 부추겨 이란과의 전쟁을 충동질한다.

이러한 미국의 시도는 8년간의 전쟁을 통해 이란의 힘을 빼는 데는 성공했지만 미국의 지원에 힘입어 성장한 '사담 후세인'은 쿠웨이트를 기습 점령함으로서 미국과 적대관계로 돌아선다. 이것은 두 부도덕한 집단의 야합이 잉태한 필연적 결말이었다.

충격적인 9·11테러는 호전적인 부시 정권에게는 이슬람 침공을 위한 좋은 핑계거리가 되었다. 미국은 테러집단 '알 카에다'를 공격한다는 구실로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여 탈레반 정권을 붕괴시켰고, 이라크를 침공하여 후세인 정권을 붕괴시켰다.

하지만 무력에 있어서 압도적 우위를 점한 미국이 쉽게 두 나라를 지배할 수 있었을 것이란 예상이 대단한 착각이었다는 사실은 오늘날의 현실이 증명하고 있다. 미국에 패해 정권을 내어준 '탈레반'은 여전히 아프가니스탄을 내전 속으로 이끌고 있으며, 부시가 톰캣을 타고 항공모함에 착륙하여 갑판에서 "전쟁 승리"를 선언한 이라크에서 종전 이후 사망한 미군 희생자만 4천 명이 넘어섰고 테러로 희생당한 희생자 수치를 기리는 사망자 시계는 이미 4만 명에 육박하고 있다.

미국의 들러리 국가 사양해야

'압제에 시달리는 주민을 해방시키겠다.'던 부시의 호언장담이 새빨간 거짓말이었음은 종전 이후 더 극심한 생명의 위협을 느끼며 전선(戰線)이 사라진 전쟁터에 방치된 무고한 주민들의 실상으로 증명된 만큼, UN평화유지군이라는 아프가니스탄 주둔군의 주둔 명분도 희석되었고, 다국적군의 일환으로 파병했던 이라크 주둔군의 주둔 명분도 희미해졌다.

우리 정부가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 원치 않는 파병을 한 것은, 미국의 동맹국가로서 "6·25 전쟁에서 우리를 구해준 미국에 대한 의리"를 내세운 만만치 않은 세력을 형성한 사회 일각의 주장과, 복잡하게 꼬여만 가는 북핵 사태를 미국이 더 악화시키지 않도록 하기 위한 고육지책 등 여러 가지 복잡한 사정이 얽혀 있었다.

하지만 종전 후 드러난 양국의 상황이 미국의 침공 명분으로 제시한 어떤 이유도 충족시키지 못했고, 오히려 양 국민을 더 비극적 상황으로 빠뜨렸다는 측면에서 또 이슬람 국가들이 한국군의 주둔을 '미국의 침공 명분을 강화 시켜주는 둘러리 행위'로 보고 있다는 점에서 정부는 우리 군의 철군은 신속하게 결정해야 한다. 이미 미국 내부에서도 이라크에서 철군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점점 힘을 얻고 있는 현 시점에서 만약에 미국이 철군 방침을 먼저 결정하게 된다면, '한국은 미국의 꼭두각시'라는 오명에서 벗어날 길이 없을 판이다.

선교(mission)는 신앙인에 있어서 가장 큰 덕목이자 사명이다. 오늘날 한국 교회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사도행전)는 성경 구절을 들어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이라는 섬뜩한 문구로 불신자를 위협하는 한편 "땅 끝까지 이르러" 복음을 전파하기 위한 사명감을 교도들에게 강요하고 선교의 길로 내 몰고 있지만 수년전 '김선일씨 사망' 사건이나, 베드로가 십자가에 처형당한 것, 이차돈이 칼에 목이 잘린 것처럼, 이교도 지역에서의 선교는 자신의 목숨을 걸어야 할 만큼 위험천만한 행위이다.

따라서 이교도 지역, 특히 내전이 전개되는 위험지역에서의 선교는 "언제든지 신이 원한다면 기쁘게 내 목숨을 바칠 수 있다"는 각오를 한 사람 만이 가능하다. 오늘날 아프간에서 23명의 무고한 사람의 목숨이 위협을 당하는 상황은 선교 행위를 통해 받을 상급만을 지나치게 부각시킨 교회의 잘못이 현실로 드러난 결과이며, 기독교 세계에 대한 끝없는 원한과 증오를 안고 있는 이슬람 세계의 정서를 너무 안이하게 해석한 한국교회의 미필적 고의가 유발한 범죄행위이다.

조금 지나친 주장인지 몰라도 출발 전에 "당신은 이번 선교 여행과정에서 목숨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만약 당신이 선교 중 순교 한다면 천국에서 복을 받을 것 입니다"이런 내용의 경고성 각서에 사인이라도 받아야 할 판이다. 교회의 무책임한 가르침이 교인들을 죽음으로 내몰고 있다는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인터넷한겨레,다음,더팬,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탈레반, #분당샘물교회, #아프가니스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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