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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많은 분들의 지적대로 신정아씨는 '간판 중시 사회'에서 나타났습니다. 하지만 '간판 중시 사회'를 개탄하는 이야기만 하면 좀 심심하죠. 자, 저는 '신정아'를 통해 한국인이 한국 사회에서 사는 법, 그리고 한국 사회에서 출세하는 법과 이치를 이야기해보고 싶습니다.

학벌 사회의 '진짜 단점'은 뭘까?

한국만 '학벌 사회'는 아닙니다. 오히려 외국에서 더 심하죠. 일본만 해도 동경대 카르텔이 정·재계를 완벽하게 장악하고 있고, 우리보다 더한 입시 지옥으로 유명한 나라입니다.

미국은 아이비리그 출신들이 장악하고 있습니다. 누리꾼 'soonessi'님이 좋은 예를 들었습니다. 올리버 스톤 감독의 영화 <닉슨>을 보면, 비명문대 출신이었던 닉슨 대통령을 놓고, 하버드대 출신의 케네디와 비교하면서 조롱하는 보좌진들이 그려집니다.

어딜 가나 세상 이치는 크게 다르지 않다는 거죠. 명문대에 입학하고 졸업한 학생들이, 일단은 우수한 가능성을 가졌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학생들은 모두가 똑같이 지루해하고 하기 싫어하는 학교 공부를, 견뎌냈다는 점에서 끈기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사회적으로 명문대 출신들을 선호하는 현상은 그렇기 때문에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하지만, 그게 세상 돌아가는 이치라고 무조건 옳은 건 아니겠죠. 본질적으로 똑같이 학벌사회인 미국과 일본과는 다른, 우리나라만의 문제가 존재합니다.

그 어떤 나라도 그렇겠지만, 어느 분야에서든 현실적인 출세의 자리는 한정돼 있습니다. 출세를 쟁취하지 못한 사람, 아예 그럴 엄두도 못 낼 사람은 그렇기에 빨리 다른 길을 찾아봐야 합니다. 하지만 대한민국은 결정적으로 '먹고 살 방도'가 한정돼 있는 나라입니다.

물론, 입에 풀칠하는 게 사는 목표라면 뭐든 할 수 있겠지만, 세상의 어느 누가 그걸 인생목표로 삼겠습니까? 세상의 어느 부모가 자식이 그런 목표에 만족하길 원하겠고요. 결정적으로 그겁니다.

대한민국 특유의 '학벌 구도'의 문제는, 그렇듯 누구나 출세를 원하지만 그 구도에서 '낙오된' 사람들이 또 다른 꿈을 키울 방법이 사실상 없다는 게 문제입니다. 막말로, 그 길로 인생 막장되는 걸 받아들여야 하는 겁니다.

그뿐인가요? 명문대 나왔어도, 그 '귀족판'에 진입하려다 낙오된 사람들이 그대로 고학력 룸펜으로 전락하는 일도 이제 드문 일이 아닙니다. 말 그대로 '학벌의 전쟁'인 셈이죠.

그걸 알기 때문에, 어머니들은 미친 듯이 '강남엄마를 따라잡으려 노력하는' 것이고, 한 달에 수백의 돈다발을 아낌없이 학원가에 갖다바치는 겁니다.

신정아는 이런 '학벌 사회 한국버전'에 대해 '학력 위조'라는 얄팍한 수단을 생존의 수단으로 삼은 겁니다. 신정아의 '원래 학력'대로라면, 안 그래도 '럭셔리 학벌'이 만연하고 우대받는 미술판에서 결코 살아남을 수 없었겠죠.

하지만, 명백한 '사기'입니다. 인간적으로 본다면야, 살아남으려는 처절함에 왠지 모를 연민이 느껴지긴 합니다만, 그래도 그런 수단을 쓰면 안 되겠죠? 게임은 공정해야 하거든요. 반칙하면 안 되죠.

어쨌든 '신정아'를 통해 느껴지는 한국사회, '학벌'이 아니면 그 길로 막장으로 내몰리는 구조입니다.

신정아, 그녀는 '여자 장준혁'?

드라마 <하얀 거탑>의 '장준혁'은 '정교수(과장)'라는 권력의 정상을 얻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질 않습니다. 교수사회의 정치 대결, 외교 대결에 적극적으로 뛰어드는가 하면, 자신의 철저한 물주 노릇을 해주는 장인의 돈을 이용해 뇌물을 바치는 짓도 서슴치 않습니다. 그리고 그는 결국 권력을 쟁취합니다.

<월간중앙> 8월호가 신정아에 대한 대대적인 심층기사를 내보냈습니다. 장난이 아니더군요. 그야말로 미술계의 '여자 장준혁'이었습니다. 이미 고단수의 정치판으로 비친 지 오래인 예술계지만, '여자 장준혁' 신정아는 단연 군계일학이었습니다.

일단 값비싼 외제차와 '시대를 앞서가는' 명품으로 자신을 화려하게 치장했다고 하는군요. 출세를 목표로 한 인간으로서는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옷이란 한편으로 그 사람의 거울이기도 하죠. 이 의식이 지나친 나머지 명품중독에 걸리는 것이기도 하지만, 어쨌든 '귀족'들을 만나고 '귀족'을 상대로 일해야 하는 사람이라면 자신에 대한 치장도 소홀히 해선 안 됩니다. '여자 장준혁'으로서의 첫걸음이었죠. 뭐, 한 끼에 240만원이 넘는 밥값도 마다지 않았다니 철저했던 셈입니다.

그리고 '치밀한 인간관리'도 못지않더군요. <하얀 거탑>을 보신 분이라면 기억하시겠지만, 장준혁은 일단 이른바 '웃분들 관리'에 철저합니다. 자신을 '브랜치'로까지 내몰려 했던 부원장 '우용길'마저도 자기편으로 포섭했고, 자신의 뒷배를 봐줄 의사협회장까지 구워삶아 놓습니다.

<월간중앙>에 따르면, 신정아의 '웃분 관리' 스케일 역시 장준혁과 비교할 만합니다.

"각계각층의 사람이 찾아와 신씨 채용을 요청해 굉장히 난처했다. 계속해서 미술평론계 실세 등을 보내 관장을 압박하는 바람에 결국 신씨는 성곡미술관에 들어오게 됐다."

<월간중앙> 기사에 나온 '사정을 아는 이'의 말이라고 합니다. 장준혁의 '과장 등극' 과정과 유사하죠? 장준혁의 '과장 등극 과정'에서도 부원장, 의사협회장 등 구워삶아 놓은 거물들이 큰 역할을 합니다.

자, '신정아'로 느껴지는 한국사회, 뭔지 짐작되시죠? 출세하려면 철저하게 '장준혁'이 돼야 합니다.

우리는 그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세상이 변한 것 같지만, 사실 알고 보면 세상은 전혀 변하지 않았습니다. 당연한 겁니다. 세상의 주된 이념이 달라지고, 지배체제가 달라졌어도 기본적인 매커니즘은 같습니다. 세상은 언제나 '힘'의 향방에 따라 좌우되는 겁니다. 그리고 우리 시대의 '힘'은 '학벌'에 있습니다. 세계 어디를 가든 같은 현상입니다.

새삼 분노할 것도 없는 이야기죠. 다만 어느 30대 여인의 대담한 사기행각이 '놀라울'뿐입니다. 본질을 따지자면야, 자신의 학벌을 위장해 결혼 사기를 친 일부 사기범들과 크게 다를 게 없다는 짓을 했습니다. 그런데 앞서 이야기했듯이 신정아는 스케일이 감히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어마어마했죠.

<월간중앙> 기사에 따르면, 신정아의 가족들은 "정아는 예일대를 나왔다"는 주장의 근거를 제공할 거라고 합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2라운드로 돌입될 태세인데, 진실이 명백하게 밝혀진다 해도 우리는 꽤 씁쓸하죠. 학벌의 위력을 새삼 확인했기 때문입니다.

학생 여러분, 고리타분한 이야기지만 공부 열심히 하시길 바랍니다. '학벌'의 위세는 앞으로 더더욱 거세질 것이며 고착될 것입니다. '힘'을 얻을 수 있는 첫째 근거임을 세상은 이미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열심히 공부해서, 당당하게 '힘'을 얻는 것 외에는 길이 없는 듯합니다. 살아보니 정말 그렇더라구요. 낙오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그리고 여러분들이 느낀 불합리를 직접 해결할 수 있는 '힘'을 얻기 위해서라도, 당장은 공부하는 게 중요하더라고요. 예, 세상은 그렇답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미디어다음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신정아, #월간중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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