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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마는 한두 마리가 아니었다. 잘 훈련된 상등 마 2필과 중등 마 3필이었다. 흙먼지 일으키며 마필이 함거 앞에 멈추어 섰다. 고갯길을 숨 가쁘게 달려온 말들이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다. 말에서 내린 일행이 함거에 다가섰다.

"어명이오, 죄인은 어명을 받으시오."

순금사대호군(巡禁司大護軍) 목진공이 위엄을 갖춘 목소리로 말했다. 이무가 함거에서 끌려 내려와 흙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죄인을 참하라는 어명이오."

형조정랑(刑曹正郞) 양윤관의 목소리는 싸늘했다. 이무는 하늘을 쳐다봤다. 푸르다. 구름 한 점 없는 가을 하늘이다. 그 푸른 하늘에 송현에서 목이 잘리던 정도전의 얼굴이 그려졌다. 웃고 있었다. 그 웃음에 또 하나의 그림이 겹쳐졌다. 혁명에는 무(武)가 필수지만 수성에는 경계의 대상이라는 것을 이제야 알았느냐고 정도전이 비웃고 있는 것 같았다. '이거이 이저가 그랬고 신극례가 그랬잖은가?'라고 묻고 있는 것 같았다.

임금이 군사를 거느린 무골을 경원하는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 나 역시 군사를 이끌고 대마도를 정벌하여 무공을 세웠지만 그것은 임금의 총애가 아니라 눈총이었다는 것을 이제야 알았다. 그렇다면 민무질의 생명도 보장할 수 없다는 말인가? 죽어가는 사람이 다른 사람 목숨을 걱정하고 있었다.

아픔을 느끼지 못하는 몸, 흙으로 돌아가자

고개를 떨구어 흙을 바라보았다. 흙에서 태어나 흙으로 돌아가는 몸 무엇에 미련을 둘 것인가? 어려서 글을 깨우쳐 글을 읽던 중 아직도 깨닫지 못한 한 구절이 떠올랐다. 노자의 도덕경에 나오는 말이다.

오소이유대환자 위오유신 급오무신 오유하환(吾所以有大患者 爲吾有身 及吾無身 吾有何患). '내 몸뚱아리가 아픈 것은 내 몸이 있기 때문이오 내 몸이 없게 되면 어찌 아픔이 있겠나' 라는 구절이었다. 이제야 그 뜻을 알 것 같기도 했다.

"죄인은 목을 내어 놓으시오."

집행관의 말은 서릿발 같았다. 이무는 죽음을 담담히 받아들이기로 했다.

"너의 죄악은 처자까지 죽여야 마땅하나 특별히 네 자식은 면죄하여 각기 머리를 보전하게 한다."

이무가 머리를 조아리는 순간, 은빛 칼날이 하늘을 가르고 선혈이 푸른 창공으로 튀었다. 그리고 아픔을 알지 못하는 몸뚱이가 앞으로 꼬꾸라졌다. 떨어진 이무의 목은 저잣거리에 걸렸다. 혁명을 같이 한 이무는 이렇게 사라져갔다.

저승사자로 등장한 목진공은 죄인에게 어명을 구두로 전달하고 집행했다. 조선 초기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조선 중엽과 후기에는 문서로 어명을 전달하고 집행했다. 그 문서 마져 반대세력이 위조할 수 있는 개연성이 충분히 있었기 때문에 조광조는 살피고 또 살폈다.

▲ 주청하는 신하들. 사진은 특정사실과 관계없는 재현 장면입니다
ⓒ 이정근
의정부의 주청을 가납하여 유배 길에서 이무를 처형한 태종은 민무구, 민무질을 제주로 이배하라 명했다. 순금사사직(巡禁司司直) 심귀린을 옹진에 보내고 부사직(副司直) 우도를 삼척에 보내어 민무구 민무질을 압령(押領)해 제주에 안치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대간의 상소는 끈질겼다.

"전하께서 차마 베지 못하시고 그 머리를 보전하게 하여 당여들이 간계를 꾸몄으니 이것은 한 사람의 대악을 덮어주어 화(禍)가 만연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어찌 나라의 체통에 해가 되지 않겠습니까?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대의로 결단하여 후환을 끊으시고 또 윤목, 조희민, 강사덕, 유기, 이빈 등의 부자도 모두 율(律)에 따라 시행하시면 매우 다행하겠습니다."- <태종실록>

의정부의 상언(上言)에 이어 영의정부사 하륜, 좌정승 성석린이 대궐에 나와 상서(上書)하였다. 마무리 작업이다. 사건의 마침표가 필요했다.

주청을 받아들인 태종은 순금사호군(巡禁司護軍) 이승직을 해진에 보내어 유기를 베고 부사직(副司直) 윤은을 광양과 장흥에 보내어 이빈과 조희민을 참형에 처하라 명했다. 그리고 사직(司直) 김자양을 영해에 보내어 강사덕을 베고 부사직(副司直) 우도를 사주에 보내어 윤목을 처형했다. 단초를 제공한 윤목도 살아남지 못한 것이다.

남겨둘 것 없다, 싹쓸이 하라

사건은 급물살을 타고 종착지를 향하여 달리고 있었다. 제사를 지내기 위하여 경덕궁에 거둥한 태종을 성석린, 김한로, 설미수 등이 뒤쫓아 왔다. 거가를 수행한 신료들과 더불어 궁정 뜰에 서있는 태종에게 성석린이 상소를 내밀었었다.

"어째서 왔는가?"

"민무구 민무질의 죄는 천지에 용납할 수 없으니 비록 하루라도 이 세상에 살아 있을 수 없습니다. 너무 오래 끌었으니 어느 누가 마음이 썩고 이를 갈지 않는 자가 있겠습니까? 신 등의 청이 하루 이틀이 아닙니다. 옛적에 마대(馬帶)를 붙잡고 간(諫)한 자가 있었으니 전하께서 비록 천리 길을 거둥한다 하시더라도 마땅히 따라가며 간하겠습니다."

"이것은 작은 일이 아닌데 어떻게 갑자기 따르겠는가?"

"나라란 것은 한 사람의 사유물이 아닙니다. 신료의 말을 어찌 거절하고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습니까? 노신(老臣)이 만일 청(請)을 얻지 못하면 장차 무슨 낯으로 물러가겠습니까? 만일 신의 말을 옳지 않다 하시면 신도 또한 벼슬을 사퇴하고 물러가겠습니다."

"과인이 이들에게 무슨 사은(私恩)이 있겠는가? 내일 소(疏)를 보고 마땅히 처치하겠다."

"옛날부터 지금까지 국가를 유지하는 것은 충과 효 때문입니다. 만일 충과 효가 없다면 어찌 인군과 아비가 있겠습니까? 민무구 등의 죄는 의논할 것도 없는데 무얼 다시 생각하겠습니까?"

"대간의 청이 오래되었으니 반드시 판부(判付)를 기다린 뒤에 물러가겠습니다. 뜰에 있는 신하가 누가 감히 먼저 물러가겠습니까?"

성석린에 이어 김한로가 거들었다.

"이무의 아들을 아울러 베게 한다? 형벌이 지나치지 아니한가?"

의정부와 백관 그리고 대간에서 올라온 상소를 서있는 자세로 꼼꼼히 읽어본 태종은 판부를 초(草)하라 명했다.

"내가 전일에 이무의 일에 대하여 매우 겸연(慊然)스런 것이 있다. 옛날에 한문제(漢文帝)가 박소를 베는데 자진하게 하였으니 경 등도 마땅히 이 법에 의하여 시행하라. - <태종실록>

태종은 제주에서 귀양살이하고 있는 민무구 민무질에게 자결하라 명했다. 말이 자결이지 사사(賜死)나 다름없다. 순금사호군(巡禁司護軍) 이승직과 형조정랑(刑曹正郞) 김자서를 보내 제주에서 귀양살이 하고 있던 민무구, 민무질에게 자진(自盡)해 죽게 하였다.

잘 짜여진 한 편의 드라마

일세를 풍미하며 권력의 그늘에서 만개했던 민씨가(家)의 부귀영화가 종지부를 찍은 것이다. 권력에 너무 가까이 다가선 업보일까? 권력의 광포(狂暴)일까? 그것은 역사가 평가할 것이다.

윤목의 옥사는 그 당시에는 피를 말리는 순간순간이었지만 600년이 흐른 오늘 현 시점에서 뒤집어 보면 잘 짜여 진 한 편의 드라마였다. 태종으로 분한 이방원과 장군으로 분한 민무질이 주연한 이 드라마는 시나리오도 완벽했지만 윤색의 완성도가 탁월했다. 천하의 하륜도 조연으로 전락했고 단초를 제공한 윤목도 단역에 머물게 했다.

대간을 움직이는 조직력. 임금을 움직이는 능력. 힘들어하는 출연자들을 격려하는 순발력. 완성도 높은 이 극을 연출한 그도 이와 똑 같은 덫에 걸려 좌절했다. 그는 스스로 연출자라 자위했지만 그 역시 태종의 제작의도에 놀아난 광대였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태종 재임 18년 동안 죽을 때까지 태종 곁에 머무른 사람은 하륜 하나뿐이었다는 것이 이를 방증한다,

태그:#이방원, #민무구, #민무질, #이무, #역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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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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