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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해 내 집 울안의 수세미
ⓒ 박도
올해도 울안에다 수세미를 심었다

올해도 울안에다 수세미를 심었다. 수세미는 넝쿨식물로 이놈이 한창 뻗는 한여름이면 무성한 줄기와 잎 그리고 방망이 같은 수세미 열매로 초라한 내 집을 덮어준다. 이 장면이 한 신문에 보도되자(한겨레신문 2006. 8. 10.) 이를 본 이들이 집이 멋있다는 인사를 했는데 아마도 수세미 넝쿨의 장식으로 누추한 두메 오두막집이 가려진 때문일 것이다.

무서리가 내릴 즈음에는 잘 익은 열매를 따다가 씨는 빼고 끓는 물에 삶으면 껍질이 잘 벗겨져 부엌에서 쓸 수 있는 천연의 수세미가 된다. 아내가 이놈을 다시 천연염색으로 물들이면 아주 고운 천연장식품이 되기도 한다.

해마다 수세미를 심는데 올해는 앞마당이 아닌, 텃밭 가는 뒤꼍 볕이 조금 가린 컨테이너 옆 한쪽에다 세 포기를 심었더니 아무래도 성장 속도가 느렸다. 그러다가 장마철이 시작되자 그동안 자라지 못한 걸 보상이라도 하는 듯 날로날로 몰라보게 성큼성큼 자랐다.

▲ 올해의 수세미 넝쿨로, 비닐로 묶은 부분의 순이 꺾어지자 그 아래 세 마디에서 새 순이 돋아나 하늘로 향해 잘 자라고 있다.
ⓒ 박도
며칠 전, 수세미를 살피다가 크게 놀랐다. 잘 자라던 수세미 줄기의 앞부분 순이 꺾어져 있었다. 나는 우리 집 카사(고양이) 소행으로 단정하자, 아내는 보지도 않고 그놈 탓을 한다고 나무랐다.

청설모 소행인지, 다람쥐 소행인지, 아니면 뒷산 멧새 소행인지 아무튼 줄기의 맨 앞부분 성장 순이 뭉텅 꺾어져 수세미가 더 자라지 못하고 그대로 자지러지지 않을까 몹시 안쓰러웠다.

어제(6일) 오후 텃밭에 풀을 뽑고자 수세미 곁은 지나는데 경이로운 일이 벌어졌다. 그새 꺾어진 순은 아물었고 그 밑으로 세 마디에서 새 순들이 돋아 기세 좋게 하늘로 쭉쭉 뻗고 있지 않은가.

순간 나는 그 광경을 보고는 하늘의 섭리에 감탄하면서 곁에 있는 아내에게 "나 이제 아무 걱정하지 말고 죽어도 되겠다"고 말했다. 아내는 그걸 이제야 알았느냐고 하면서 그래도 내가 죽는다는 말은 듣기 싫었든지, 아이들에게는 그런 말을 하지 말라고 당부한다.

유능한 사람도 하나의 분자일 뿐

1976년도 나는 서울 오산중학교 교사에서 이대부속중학교 교사로 학교를 옮겼다. 그때 이대부속중고등학교 교감은 전아무개 선생님으로, 여러 후보자 가운데 특별히 나를 뽑아 주셨다. 이듬해 학기에는 중학교에서 고등학교로 올려주시고 중요 보직도 맡기셨다.

그런데 그해 여름, 그 교감 선생님은 40대 한창 나이로 세상을 뜨셨다. 그때 그분에게는 유족으로 젊은 사모님과 중학교, 초등학교에 다니는 두 아드님이 있었는데, 그 뒤로 일체 연락도 끊어진 채 잠적하다시피 사시다가 20여 년이 지난 뒤 소식을 전해 와 댁으로 찾아뵌 적이 있었다.

그 사모님은 두 아드님을 매우 훌륭하게 키우셨는데 장남은 사업가로, 둘째 아드님은 법관으로, 그리고 당신도 부족함 없이 사시고 있었다. 그날 나는 집으로 돌아오면서 아버지의 죽음이 그들 유가족에게는 큰 충격으로, 가족 모두 아버지 생존 때보다 세상을 더욱 열심히 산 결과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교감 선생님이 살았을 때는 이따금 자녀들이 공부에 소홀하다고 걱정을 많이 하셨다. 그런 중, 아버지가 갑자기 떠나자 그들 형제는 마른 날의 벼락과 같은 절망감에 자신들의 본업에 더욱 충실하였나 보다. 언저리의 값싼 동정도 싫어 연락도 단절시킨 채 독한 마음으로 마침내 아버지가 이루지 못한 소망-아버지는 법과대학에 진학하려 했고 법관이 되고자 했음-을 이루었으리라.

우리나라 전직 대통령 가운데 매우 어리석은 두 대통령이 있었다. 한 분은 나 아니면 이 나라가 공산화가 된다고 무리하게 3선 개헌을 하여 부정선거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하지만학생들의 부정선거 규탄 시위가 들불처럼 번져 4·19 혁명이 일어났다. 그 혁명으로 대통령 자리에서 쫓겨나 이국의 병상에서 세상을 뜨셨다.

또 다른 한 분도, 전직 대통령이 무리수를 두다가 비참하게 최후를 마친 것도 보고서도 나만은 예외라고, 내가 아니면 이 나라의 경제가 파탄이 나서 백성들은 기아선상(굶주림)에 놓일 거라고 무리하게 3선 개헌을 하고, 그것도 부족하여 초강수로 헌정을 유린, 기상천외의 유신헌법으로 종신대통령을 꿈꾸다가 아주 볼썽사납게 세상을 뜨셨다.

▲ 지난해 무서리가 내릴 무렵 수확한 수세미로 오른쪽 하나는 종자감이었다.
ⓒ 박도
두 분이 세상을 떠나도 우리나라는 공산화가 되지 않았고, 나라의 경제는 해마다 거듭 발전하였다. 미리 후계자를 기른 뒤 적당한 때 물러났다면 개인의 비극도, 나라의 수치도, 민주화도 경제도 지금보다 훨씬 더 일찍 제자리를 잡았을 것이다.

'나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에 사로잡힌 사람처럼 어리석은 사람이 없다. 아무리 유능한 사람도 우주만물로 볼 때 하나의 분자일 뿐이다. 하나의 분자가 생명을 다한다고 전체 우주 질서가 바꿔질 수가 없다.

오늘 아침 수세미 새 순을 카메라에 담으며 다시 한 번 하늘의 오묘한 뜻을 헤아리고는 겸손치 못한 사람들의 오만을 내 이웃들에게 전한다. "나 아니라도 이 세상은 잘 굴러간다"고.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은 '나 아니면 안 된다'는 오만에 사로잡힌 사람들이다.

태그:#수세미, #넝쿨, #오두막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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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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