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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달
ⓒ 제정길
바다를 벗어나자 거짓말같이 불면의 밤은 다시 찾아왔다. 그것은 아우라지 가는 길의 꼬부랑 고갯길처럼 가도 가도 끝이 나타나지 않았다. 눈을 뜨면 아직 밤이 다 가지 않았고 다시 눈을 떠도 여전히 밤이었다. 낯선 도시의 낯선 침대에서 가지 않는 밤을 보내는 것은, 이미 떠나버린 여자를 그녀의 집앞에서 기다리는 것만큼이나 안쓰러운 일이었다.

밤은 어디에다 그의 긴 꼬리를 감추었다가 알래스카가 끝나자 슬며시 다시 풀어놓는 것일까?

오전 7시쯤에 아침식사를 위해 1층 홀 중앙의 식당으로 찾아갔으나 한국인 단체관광객이 식사하는 곳은 그곳이 아니란다. 꼬불꼬불 뒤로 돌아서 후미진 강당 같은 곳에 우리의 식사는 마련되어 있었다.

저가 패키지 관광의 비용을 맞추기 위해서 그런 것인지, 한국인의 음식기호를 맞추기 위해서 그런 것인지는 알 수가 없었으나 기분이 좀 떨떠름했다. 빵 한 개, 주스 한 잔, 과일 몇 쪽으로 아침을 에웠다. 음식은 스산했다.

오전 8시경 짐을 챙겨 호텔 로비로 나왔다. 일정표에는 오전 8시 30분 로비 집합으로 되어 있는데, 로비에는 이미 사람들로 만원이었다. 들리는 말로는 오늘 'K' 여행사에서만 4대의 버스가 록키를 향하여 출발한다고 한다.

조금 있자 키가 껑충하게 큰, 옛날 만화에 나오는 '마이클'같이 생긴 30대로 보이는 남자가 우리 담당 가이드라 하며 나타났다. 그는 사람 수를 대충 파악하더니 우리를 차로 안내하였다. 차는 스캐그웨이에서 보았던 것과 같은 대형 관광 전용버스, 코치(Coach)였다.

가이드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사람들은 알게 모르게 차를 향하여 걸음을 잽싸게 옮겼다.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였다. 인간의 마음이란 간사한 것이라서 누구나 창가의 전망 좋은 곳에 앉고 싶은 것이 당연지사라 누구를 허물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크루즈나 호텔처럼 전망을 돈으로 환산하여 차등가격을 매기기 전에는 말이다.

▲ 우리를 싣고 달리는 대형 관광버스
ⓒ 제정길
다행인지 차내에는 앞좌석 20여 석이 경로석이라는 쪽지가 붙어 예비되어 있었다. 하지만 내가 탔을 때는 그것도 뒤에 두 자리만 남아 있었다. 어째 좀 낯이 간지럽지만 그 자리에 앉았다.

평소에 지하철을 타도 경로석에는 잘 앉지 않는 편인데 오늘은 염치 불구하고 앉기로 했다. 두 가지 이유에서였다. 하나는 내 나이도 60대 중순으로 넘어가는데 여기 50여 명의 승차객들 중 나이순으로 보아서 최소한 20명 안에는 들리란 생각과 또 하나는 여행 내내 사진을 찍어야 하는데 앞 자리의 창가라야 그것이 수월하기 때문이었다. (이 치사한 자기 변명!)

어찌된 셈인지 어제 만났던 86세의 할머니는 가장 늦게 승차하셨다. 경로석에 앉은 어느 누구도 선뜻 일어나 자리를 양보하는 사람은 없었다. 팔팔해 보이는 젊은 것들도 모른 채 고개를 꼬고 외면들 하였고, 나 또한 내 자리를 양보할 만큼 선량한 인간이 못 되었는지 엉덩이를 두어 번 덜석거리다가 그대로 앉았다. 할머니는 할 수 없이 뒤로 가서 앉으셨다.

차는 오전 9시에 호텔을 출발하였다. 로키까지의 거리는 왕복 2500km, 차 안에서 이동하는 데에만 오늘 하루를 꼬박 보내야 하는 머나먼 길이었다. 차가 대로에 들어서자 '마이클'은 여행지의 소개에 이어 탑승객들의 자기소개를 권하였다. 팀당 한 명씩 앞에 나와서 어디서 왔으며, 무엇을 하고 있고, 누구와 왔는지 등을 얘기를 하란다.

그는 먼저 자신이 시범을 보였다. 그는 한국에서 연구소에 근무하다가, 자녀들의 교육 한번 잘 시켜보려고 그리고 영어 한번 화끈하게 잘 해보려고 7년 전에 이민 와서 이 일을 하고 있다고 했다.

▲ 정차 중에 쉬고 있는 같은 버스를 탄 관광 동료들
ⓒ 제정길
예상외로 관광객은 한국에서 오신 분이 많았다. 군을 대령으로 예편하고 아내와 함께 해외 나들이를 하신다는 분이나, 교장직을 정년퇴직하고 자식이 있는 미국에 여행 온 김에 이곳을 찾았다는 분이나, 사업체를 운영하면서 짬을 내어 딸네 가족까지를 몽땅 이끌고 여행길에 오른 분이나, 미국에 이민을 와 살면서 자식이 이번에 명문대 합격을 하여 자축을 겸해서 아내와 록키 관광을 택했다는 분이나, 특이하게 한국에 사는데 미국 영주권을 유지하기 위하여 비행기 삯도 되지 않는 비용으로 이곳 패키지 관광을 한다는 분이나 그 내용들은 다양하였다.

▲ 같은 버스로 여행하게된 학생들
ⓒ 제정길
다만 버스에 탄 56명의 승객 중 거의 반에 달하는 학생들은 몇 명의 현지 유학생을 빼고는 대부분 어학연수를 온 한국 대학생들인데, 이번 주에 학원이 휴강이라서 단체로 싼값에 여행에 참여했다고 한다. 그들은 쉴 새 없이 조잘거렸으나 불행하게도 아직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언어는 한국어였다. 차 안에서의 모든 대화는 한국어가 기준이었으며 단지 세 명의 한국어가 서툰 부류가 있어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쓰는 언어로 소통하였다.

지난 번 여행기에서 말한 할머니의 두 손녀와 뒷좌석에 앉은 어느 손님의 두 살배기 딸이었는데, 두 손녀는 원어민 영어로, 두 살배기 아기는 울음으로 그의 의사를 충분히 전달하였다.

▲ 가장 어린 승객
ⓒ 제정길
차는 빈자리 하나 없이 완전히 만원이었다. 작달막한 키의 백인 여성 운전기사는 생긴 모양대로 차내 질서에는 엄격하였으나 운전 솜씨 하나는 일품이었다. 그는 차내에 사람이 일어서서 얼쩡대는 것은 어떤 경우에도 허용하지 않았다. 가이드인 마이클이 좀 일어서서 설명을 하려고 해도 그는 가차없이 '노'를 연발하였다.

차는 코키할라 하이웨이를 따라 속도를 빨리했다. 어찌 보면 관광객을 가득 채운 대형버스는 작은 크루즈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항구와 항구로 이어지는 바다를 쉼 없이 항해하는 자폐아를 닮은 유람선 말이다. 그들은 정해진 항로를 순행하며 바깥의 경치를 안으로 유입하려 용을 쓰나, 경치는 시속 120km로 달아나며 그들을 비웃고 있을 뿐이었다.

▲ 시속 120km로 달리다.
ⓒ 제정길
캠룹스라는 작은 도시에 들러 점심을 먹었다. 점심은 육개장이었다. 음식을 선택하고말고 여유를 부릴 틈이 없었다. 자리에 앉자마자 자동으로 나오고, 10여 분만에 후딱 먹어치우고 자리를 비워줘야 했다. 맞은 편 좌석에서 음식에서 이물질이 나왔다고 불평을 하였으나 주인이나 종업원 누구 하나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종업원은 한국말을 못 알아들었고 주인은 한국말을 알아들은 것도 같았으나 대꾸도 없이 제 할 일만 하였다. 왜냐고? 그는 한국인들은 저러다가 제풀에 지쳐 그냥 가버린다는 것을 경험상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다시 올 손님이 아니었다.

▲ 꿈결처럼 나타난 호수 그리고 호텔. (누가 이름을 아시면 댓글로 좀 알려주세요)
ⓒ 제정길
차는 다시 출발하였다. 주변의 산세들은 점점 험해지고 경치는 사람의 눈을 끌기에 충분히 아름다워져 갔다. 아마 로키산맥이 가까워지는 모양이었다. 차는 바람처럼 달렸고 햇살은 비스듬히 내가 앉은 창쪽으로 비껴들었다. 내 앞좌석에 앉은 30대의 두 여성은 햇살이 비껴들 때마다 창 가리개를 내리느라 바빴다. 그것은 바로 뒤에 앉은 나에게 약간의 고민을 안겨다 주었다. 창 가리개를 내리면 시원해서 좋긴 한데 대신 바깥 구경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 산
ⓒ 제정길
창 가리개를 오르내릴 수 있는 위치적 우선권은 앞 자리에 있고, 앞에 앉은 두 숙녀분은 햇볕에 탈까 봐 손에 흰 장갑까지 끼고 앉았는데(농담처럼 들리겠지만 엄연한 사실이었다) 사진 좀 찍게 가리개를 올리자는 말은 차마 입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놈의 햇볕이 뭔지…. 외국의 관광지에 가서라도 만약 햇볕을 가리느라 양산을 쓴 사람을 본다면 그 사람은 틀림없이 한국사람이다. 내기를 걸어도 좋다.

▲ 과거의 기차 옆으로 현재의 기차가 달린다.
ⓒ 제정길
차는 한참을 달려 고물 기차가 놓여 있는 곳에서 잠시 정차하였다. 1885년 캐나다의 동서를 잇는 길이 4800km의 철로가 최종적으로 연결된 곳이라 한다. 110년이나 되는 오래된 기차 옆으로 오늘의 기차가 선로를 달리는 모습은 그런대로 인상적이었다. 사진 몇 장 찍고 생리를 해결하고 차는 또 달렸다.

길옆으로 아름다운 호수가 스쳐가기도 하고, 흰 눈으로 의관을 정제한 위엄을 부린 산들이 천천히 뒷걸음을 치며 시야에서 멀어지기도 하고, 수풀가에서 작은 곰 한 마리 어슬렁거리기도 하였다.

▲ 이제 떠날 채비를 하는 골든의 민들레
ⓒ 제정길
저녁 8시경에 차는 오늘의 목적지인 골든에 도착하였다. 골든은 작고 한적한 마을이었다. 몇 채의 허름한 숙박시설과 식당이 우리가 볼 수 있는 전부였다. 그러나 풍광은 수려하기 그지없었다. 멀리 눈 덮인 산들은 석양을 받아 은빛으로 빛나고 이제 피어 길을 떠나려는 민들레는 노을 속에서 수줍게 흔들리고 있었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한 평범한 '늘근백수'가 미국,캐나다 등지를 떠돌며 보고 느낀 것을 기술해가는 여행기입니다. 여행은 4월 25일 시작되었고, 7월 말 쯤 끝날 예정입니다.


태그:#로키산맥, #늙은백수, #캐나다, #미국,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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