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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장애인의 자립을 돕는다는 라이프존(www.bec.or.kr)의 운영자 조승현씨를 만났다. 흰지팡이 하나 짚고 서울로 인천으로 자신이 도울 사람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찾아간다는 그에게 세상은 결코 어둡지 않아 보였다.

그가 라이프존을 운영하기 시작한 것은 2000년. 그저 남을 돕는 활동을 하다 보니 명칭이 필요해 만들게 된 것일 뿐 특별히 이유가 있어서 만든 것은 아니란다.

어떤 사람에게 '이것'이 필요하다고 가정해보자. '이것'만 있으면 살아가는 것이 훨씬 더 수월해진다. 그럴 때 '이것'을 제공해줄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는 것이 바로 라이프존이 하는 일이다. 라이프존에 고정 멤버나 직원은 없다. 컴퓨터, 안마, 돈 등 어떤 종류의 도움이 필요하느냐에 따라 때마다 팀이 꾸려져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인맥이 형성돼 있을 뿐이다.

"남의 주머니 털어" 도움이 필요한 곳에 전해

어느 날 조씨는 소아당뇨를 앓고 있던 34살의 청년 종광희씨를 알게 되었다. 일주일에 3회씩 투석을 해야 하기 때문에 일상생활이 거의 불가능한 상태였다. 병원에서는 장기이식을 하면 훨씬 나아질 것이라 했으나, 3천만원이라는 비용 걱정에 차마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는 처지였다.

그러나 조씨는 우선 적합한 장기를 찾는 것이 중요하지 않겠느냐며 우선 신청부터 해놓자고 광희씨를 설득했다. 그리고 얼마가 지나 적합한 장기가 나타났다는 연락이 왔다.

이제 3천만원의 수술비가 필요해졌다. 조씨가 이런 거액의 도움을 어떻게 줄 수 있다는 것일까? 그의 말을 빌리자면 "남의 주머니를 털어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돕는 것"이다.

우선 그는 의사를 찾아가 사정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장애인 신문인 <에이블뉴스>와 인터넷을 통해 종광희씨의 사연을 알렸다. 이런 노력을 통해 병원 복지과에서 500만원, 장애인 재활협회에서 500만원을 지원받고, 봉사단체인 사랑의 러브하우스와 마음으로 보는 사람들, 가톨릭선교회 등에서 조금씩 모아 종광희씨의 수술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이뿐 아니다. 눈과 귀를 모두 사용할 수 없는 시청각장애인에게는 300만원짜리 보청기를 제공했고, 다발성 신경경화증을 앓고 있는 이에게는 성당의 지원을 받아 고관절수술을 할 수 있게 도와주었다. 주변 노인들에게 선풍기와 찜질기 등을 사드리고 노인보호시설에 전기패널을 깔아주는 등 소소한 도움을 준 것은 셀 수 없을 정도다.

징검다리의 삶

그는 자신은 징검다리 역할을 할 뿐이라 말한다.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을 찾아서 도움이 필요한 사람과 직접 연결해주는 것이다. 도움을 줄 수 있는 곳을 찾아다니고 사람들을 만나러 돌아다니는 경비는 온전히 그의 몫이다. 그는 현재 자동차보험을 모집하는 일을 통해 수수료를 받고, 인삼을 원가에 구입해 판매도 하고 있다. 커다란 비용이 소요되는 경우, 지원해줄 만한 곳을 찾아다니지만 소소한 일에는 이렇게 자신이 번 돈을 사용한다.

조승현씨가 이처럼 자신보다 더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돕게 된 계기는 무엇일까? 사실 그는 젊었을 적에는 시각장애인이 아니었다. 그가 시력을 잃은 것은 55세이던 지난 2000년이다. 그 2∼3년 전부터 아폴로 눈병을 자주 앓았는데, 이후 녹내장과 포도막염이 오면서 실명에 이르게 된 것이다.

중도실명자들 대부분이 삶의 희망을 잃고 집 밖 출입을 꺼리게 되는 것과 달리 그는 '이제 눈이 전혀 안 보이는구나! 이 상태에서 최선이 무엇일까'를 생각했다. 낚싯대를 꺾어 지팡이 삼아 다니노라니 누군가가 복지관에 가면 흰지팡이를 준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렇게 찾아간 복지관에서 컴퓨터와 점자도 배웠다. 이 산 저 산에 다니며 양봉을 했던 40대의 그는 이제 사라졌지만, 시각장애인으로 살아가는 방법을 하나둘 배워가기 시작했다.

눈만 멀었기에 눈과 귀 모두 먼 시청각장애인 도울 수 있어

그가 요즘 가장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은 시각장애와 청각장애를 함께 가진 이들을 어떻게 도울 것인가 하는 점이다.

얼마 전에는 국가인권위원회에 가서 4시간에 걸친 시청각장애인 간담회를 갖기도 했다. 한소네와 노트북을 사용한 채팅 대화를 통해 간담회가 이뤄졌다. 시각장애와 청각장애를 함께 가진 이의 사정이 어떠한가를 알리고 이들에게 필요한 서비스를 요청하기 위한 것이었다.

시각장애 이후 청각장애가 생긴 사람은 점자를 알기 때문에 점자로 의사소통이 가능하다. 청각장애를 먼저 얻고 이후 보지 못하게 된 사람은 수화를 알기 때문에 손모양을 통해 수화를 파악하는 촉수화를 사용한다. 그러나 어릴 적부터 시각장애와 청각장애를 동시에 얻게 된 경우에는 울거나 자기를 때리는 것 외에는 의사표현이 불가능해 교육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암흑과 정적 속에서 헤매는 아이들에게는 시청각장애인 고유의 교육체계가 필요하다. 맹학교와 농학교가 있고 장애아들을 위한 특수학교도 있지만 어느 곳에도 시청각장애인을 위한 교육체계가 없는 게 현실이다. 그저 교사들이 그 아이에 맞는 촉각수업과 생활지도를 해주는 것이 현재로서는 최선이다.

그렇기 때문에 시청각장애인은 중복장애가 아닌 별도의 장애로 구분해 그에 맞는 서비스를 제공해주어야 한다는 것이 조승현씨의 주장이다. 이를 위해 조씨는 시청각장애인에 관한 소책자와 팸플릿 제작도 계획하고 있다.

또 시청각장애인의 활동을 보조하기 위해서는 점자를 기본으로 알아야 하기 때문에 시각장애인이 시청각장애인의 활동보조인으로 지정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의 민원을 보건복지부에 넣기도 했다.

"일본에서는 일 년에 한 번씩 시청각장애인대회가 열리고 있는데, 우리나라라고 이런 대회를 하지 못하란 법이 있겠는가."

조씨는 올여름에 시청각장애인 7명과 동반자, 통역자와 관련교사 등을 일본 시청각장애인대회에 보내 시청각장애에 관한 정보를 얻고 희망을 갖게 해주려 계획 중이다.

"물론 지금은 한 푼도 없다. 남의 주머니 털어야지∼. 수술시킬 때나 보청기 살 때나 다 남의 주머니 턴 거 아닌가.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에게 가서 당신이 할 수 있는 한 내놔라 얘기하는 것이다."

남의 짐을 대신 지고 가는 당나귀

그는 매번 그렇게 무작정 새로운 도움처를 찾아다닌다. 어느 복지관 강사가 붙여주었다는 '당나귀'라는 별명처럼 그는 남의 어려움을 대신 등에 지고 다니면서 도움을 얻어다가 필요한 곳에 전해주는 일을 하고 있다. 말로만 장애인을 이해한다 하는 것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렇기에 실질적인 도움을 주기 위해 뛰고 있다는 조승현씨. 자신보다 어려운 이를 돕는 것이 바로 그가 살아가는 힘이 되고 있다.

"내가 장애를 안고 보니 장애가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다. 그저 보고 아는 것과 직접 경험하는 것은 크게 다르니까…. 이런 일을 하라고 내게 장애를 주신 것이 아닌가 싶다."

아직 눈에 보이는 변화는 없지만 죽을 때까지 이렇게 다니다 보면 뭔가 되지 않겠나? 하면서 웃는 그의 모습에서 희망과 열정이 보인다.

덧붙이는 글 | 시각장애인용 잡지 <손끝으로 읽는 국정>(6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 한국점자도서관 기획홍보팀 기자로서 취재/작성한 기사입니다.


#시각장애#흰지팡이#라이프존#조승현#당나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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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장애인도서관 기획홍보팀에 근무하며 시각장애인에 대한 기사를 주로 작성해왔으며.이후 교육업체 및 기업 홍보를 담당하며 알게 된 지인들을 통해 도움이 될만한 교육 소식을 취재하여 종종 나누었습니다. 현재는 한국어교사로 일하고 있으며, 일상에서 겪은 에피소드를 다루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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