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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는 정신지체 고종사촌 오빠가 있었다. 오빠는 '노렴'(소래라고도 했으며, 현재는 논현동이며, 우리는 노렴이라고 불렀다)에서 협궤열차를 타고 가는 '사리'라는 곳에 살았다. 오빠의 엄마인 우리 고모는 아들만 둘을 둔 청상이었고, 오빠는 우리 집에 오는 걸 유난히 좋아했다.

오빠가 우리 집에 올 때는 소래염전으로 출근하는 염부꾼들을 따라왔다. 그러나 아침 협궤열차를 자주 이용하던 오빠는 이미 유명인사. 오빠가 내리는 소래역이 다가오면 거의 모든 사람들이 오빠를 주시하고 있다가 내려야 한다고 일러주었단다.

소래역에 내린 오빠는 묵묵히 염부꾼들 뒤를 따라 걷는다. 그 드넓은 소래 염전 벌판을 팔로 휘저으면서. 그러면 맞은 편에서 염전으로 출근하던 사람들이 먼저 알아보고 반가워서 소리친다. '야 영준이 오는구나' 그들은 걸음걸이만 보고도 오빠를 알아보았다. 그러나 오빠는 그 소리를 듣고도 쑥스러워 대답을 못한다. 그저 웃기만 한다. 이를 드러내고 활짝 웃는 게 오빠만의 인사법이었다.

▲ 허물어질 듯 낡았어도 여전히 내겐 신비의 성인 소금창고, 지난 겨울 포동에서 찍은 소금창고...
ⓒ 이현숙
갯고랑과 갯바닥, 염전과 소금창고. 난 늘 그 풍경을 '영준이 오는구나' 하는 한마디 외침과 함께 떠올린다. 오빠의 행장은 옷 몇 가지를 둘둘 뭉쳐 보자기에 싼 옷 보따리 하나. 오빠는 늘 그 보퉁이를 옆구리에 끼고 나타났다. 넓은 염전과 소금창고가 있는 풍경을 지나 북망산 밑을 통과해 아기자기한 들판 샛길을 걸으면 우리 동네가 나온다.

그리고 소금을 실어 나르는 가시랑차(?)라는 게 있었다. 가시랑차는 쇠바퀴 위에 두꺼운 널판때기를 놓았고, 그 널판때기를 굵은 쇠갈쿠리로 쭉 연결한 소금을 실어나르는 기차였다. 그것은 좁은 선로를 따라 움직였는데, 때로는 소금자루가 수북이 쌓인 채 선로를 기어갔고, 때로는 텅텅 빈 채로 선로 위를 내달렸다.

그다지 위압적이지 않은 소금차였는데 가끔 사고가 났다. 우리 이웃동네 한 아저씨는 그 차에 치여 팔을 하나 잃었고, 또 한 아저씨는 목숨을 잃었다. 사고가 나던 날 밤, 우리 윗집에 사는 그 아저씨의 친척이 우리 집으로 초롱불을 빌리러 왔다. 사고 소식을 들은 엄마는 초롱불을 건네 주면서 말했다. "아무개처럼 큰 사고는 아니어야 할 텐데(아무개처럼은 팔을 잃은 아저씨를 지칭한 말)."

그런데 이튿날 아침 아저씨가 목숨을 잃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어린 아이들이 다섯이나 되는 젊은 가장이었는데…. 장례식날 우리는 구경꾼처럼 서서 구경을 했고, 동네 어른들은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한 채 장례를 거들었다.

이웃동네에 젊은 화장품 장사 아주머니가 있었다. 그 아주머니의 남편은 염부꾼이었는데 그만 노총각과 바람이 났다. 딸 둘과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큰딸이 나보다 한 살 아래였다. 학교 가는 길 만난 큰딸은 자기 엄마는 화냥년이라며 거침없이 엄마를 향해 욕을 해댔다. 몇 년 후 그 애가 아버지와 동생들과 함께 소금창고에서 살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난 그 말을 전해준 동네 언니에게 자세히 물어보았다. 소금창고에서 어떻게 사느냐, 소금창고 안은 어떻게 생겼느냐. 그러나 호기심 가득한 내 물음의 답은 시원치 않았다. 아마도 내 환상이 워낙 컸기 때문이었으리라.

내게 소금창고는 성이나 보물창고처럼 환상의 공간이었다. 그것은 멀리서 봐도 거대해 보였고 그 안에는 갖가지 진기한 보물들이 숨겨져 있을 것처럼 신비해 보였다. 그러니 난 소금창고에서 사는 그 집 딸이 부러웠다.

내가 거기서 살 수는 없더라도 최소한 구경이라도 하고 싶었는데 허락이란 기대도 할 수 없어 말도 꺼내지 못했다. 결국 가까이 가 보지도 못하고 난 훌쩍 어른이 되었다.

지난해 전남 신안군 임자도로 여행을 갔다가 소금창고 안을 볼 수 있었다. 텅 비어 있는 곳도 있고, 소금이 가득 들어 있는 곳도 있었다. '아 이렇게 생겼구나' 눈으로 보고 확인은 했지만 난 돌아서자마자 잊었다. 다시 환상 속의 소금창고로 들어간 것이다.

▲ 쓸쓸하기만 한 폐염전, 마치 내 자신이 버림받은 느낌이었다
ⓒ 이현숙
갯고랑, 갯바닥, 염전은 우리에게 금기시된 장소였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 조개를 잡으러 갯고랑을 건너 저수지로 간 동네 처녀 넷이 그만 물때를 놓쳐 갯고랑에 빠져 죽는 사고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사고가 아니라도 우리는 함부로 아무 데나 갈 수 없는 처지였다. "기집애가 어딜 함부로 돌아다니냐"는 우리 집은 유난히 엄격해 도무지 가까이 갈 기회조차 오지 않았다.

어쩌다 할머니를 따라 나들이를 갈 때면 나도 오빠처럼 그 길을 갔고 협궤열차를 탔다. 그곳은 넓은 벌판이었다. 겨울에는 바람이 거셌고 여름에는 바람을 만들어낼 나무 한 그루 없어 머리 위로 따갑게 내리쬐는 땡볕을 받으며 걸었다.

갯바닥에는 뻘겋고 커다란 다리를 가진 농발이 게가 무수히 쏟아져 나와 있었다. 난 그 게를 잡고 싶어 한참을 노려보았지만 한 번도 잡지 못하고 할머니 뒤를 졸랑졸랑 따라 갔다. 미련은 게에게 남아있는 채로.

갯벌과 염전은 우리의 삶과 직결돼 있었다. 오월 단오 무렵이면 방게잡이에 나섰다. 방게(군청색이 나는 작은 게)가 가장 잘 잡히는 날은 이슬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날이다. 그런 날이라야 게가 그네를 타러 나온다고 어른들은 말했다.

준비물은 솜방망이와 석유를 담을 수 있는 깡통, 게를 잡아 담아 올 양동이. 솜방망이에 석유를 묻혀 불을 붙이면 불이 이글이글 타오른다. 불이 작아지면 솜방망이를 다시 석유통에 넣었다가 꺼낸다. 위험할 것 같은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게들은 나문재 나무에서 그네(?)를 타다가 놀란다. 도망가는 놈도 있고, 그대로 얼어붙어 있는 놈도 있다. 난 그걸 해보고 싶어 벼르고 벼르다가 어른이 되고 나서 해 보았다. 딱 한 번. 그런데 정말 재미있었다. 한밤중을 지나 새벽녘에 집에 돌아왔는데도 전혀 피곤하지가 않을 정도로 그 재미에 푹 빠져 있었다. 방게는 간장게장처럼 간장에 담갔다가도 먹고 기름에 달달 볶아서도 먹는다.

동네 아주머니들은 가끔 갯고랑을 건너가면 있는 짠물 저수지(소금을 만들기 위해 가두어 놓는 물이란다)에 가 싸죽도 잡고, 모시조개도 잡고, 맛조개도 잡았다. 갯바닥에 지천으로 깔린 건 행이재 나물(나문재나물인데 우린 행이재라고 했다). 삶아서 초고추장에 무쳐 먹으면 정말 맛있는 나물이었다.

우리 동네 높은 언덕에 올라가면 갯바닥도 갯고랑도 염전도 보였다. 그리고 중고등학교 때 시골집에 올 때면 양우재 높은 고개 위에서 내 앞에 펼쳐진 넓은 갯벌과 소래염전을 한 눈에 볼 수 있었다. '산너머 남촌에는 누가 살길래' 하는 노래 가사처럼 난 늘 그곳을 동경하면서 바라보았다.

소래염전은 가운데 있었다. 바다를 바라보고 우측은 남동염전, 좌측은 군자염전이라 소래염전이 거느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소래염전이 1930년대, 군자염전은 그보다 조금 이른 1920년대 초반에 생겼다고 한다. 군자, 소래염전은 한반도 최대의 염전이라는데, 우리나라의 천일염 역사는 1907년 일본인이 중국인 기술자를 고용, 주안에 1정보 규모의 시험용 염전을 만든 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 생태공원이라고 꾸민 곳에는 그나마 생기가 돈다
ⓒ 이현숙
▲ 바라보고만 있어도 친밀감이 느껴지는 염전...
ⓒ 이현숙
그런데 산산조각났다는 소금창고가 나를 무척이나 허탈하게 했다. 비단 나 한 사람 개인의 추억 때문이었을까? 더구나 목적이 골프장을 만들기 위해서라는데. 그 넓은 갯벌이 골프장이 된다는 건데. 난 소래염전이 늘 거기에 있었기에 단 한 번도 소래염전이 없는 내 고향을 생각해본 적이 없었는데…. 정말 가슴 아프다.

우리 주변엔 사라져 가는 게 너무나 많다. 넓은 벌판은 무조건 골프장을 만들려고 눈독을 들인다. 하긴 산도 깎아 만드는 판국인데 그깟 폐염전쯤 식은 죽 먹기 일 것이다.

정감 어린 들판이나 동산이 길도 되고 고층빌딩 숲도 들어서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모두가 이익을 만들기 위해 추억쯤, 미래쯤 가볍게 저버리고 무조건 깎아내리고 새로 짓는다. 그 앞에 역사가 소용이나 있을까?

복구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지만 자세한 복구계획은 나와 있지 않다. 이 경우 관련자 처벌이나 벌금은 의미가 없다. 반드시 복구를 종용해야만 한다. 그래야 개인의 이익 때문에 일어나는 불상사를 막을 수가 있다.

이번만은 그저 명령만 내릴 게 아니라 구체적으로 복구할 수 있는 자료까지 제시, 반드시 원상복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일부 부유층을 위한 골프장이 아닌 누구나가 보고 체험할 수 있는 역사적인 공간으로 만들어야 할 것이다.

태그:#소래염전, #소금창고, #사리, #복구명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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