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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내가 결혼한 것은 1990년의 11월이었다. 총각 시절부터 차가 없었지만 결혼한 다음에도 굳이 차를 가져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미래에 대비해서 부지런히 저축을 해야 했고 한참 젊은 30대 초반에 남는 것이 힘 밖에 더 있겠는가, 어지간한 거리는 운동 삼아 걸어 다녔고 어린 딸아이를 안고 다녀도 별로 힘든 줄 몰랐다. 회사가 그리 멀지도 않았으며 부모님 댁은 시내버스로 20분 거리였다.

처가댁도 경기도 양수리여서 그리 멀다고 할 수 없었다. 처가 부모님께서는 3남 3녀를 두셨는데, 아들과 사위를 통틀어서 내가 가장 막내였다. 다른 곳에 갈 때는 별로 몰랐지만 처가댁에 가는 날은 상당히 쑥스러웠다. 손위의 처남과 동서들이 많이 배운데다 고급 승용차를 소유하고 있는 것에 비해 나는 그렇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언니와 오빠들이 고급 승용차를 타고 와서 부모님께 좋은 선물과 용돈을 듬뿍 드릴 때마다 아내는 그저 쓰게 웃을 뿐이었다.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5대 독자에게 시집왔지만 남편은 배우지도 못 했고 돈 버는 재주도 없었다. 차가 없다는 것은 가난하다고 광고하고 다니는 것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그래도 어쨌든 사위는 사위여서 우리가 올 때면 장모님께서는 이것저것 싸주셨다. 대부분은 버스 타는 데까지 들고 가기 어려울 정도의 부피와 무게여서 장인 어르신께서 지게를 지셔야 했다. 가난한 딸과 사위가 얻어가는 것들을 묵묵히 버스 타는 곳까지 져주셨던 장인어르신의 심중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저린다.

마침내 차를 구입하게 되는 결정적 계기가 발생하고야 말았다. 무척 더웠던 1994년 8월의 어느 날로 기억 한다. 직장에서 가족동반으로 야유회를 가게 되었는데 차가 없던 우리는 다른 직원에게 신세를 져야 했다. 우리가 탄 차는 하필이면 모든 면에서 나와 라이벌 관계에 있는 동료의 소유였다. 그의 아내는 못마땅하다는 기색을 굳이 숨기지 않았다. 나는 조수석에 타고 아내와 네 살 먹은 딸아이는 그쪽 아내와 함께 뒷좌석에 타게 되었다. 그런데 그 동료의 아이도 네 살짜리 사내아이였다. 차가 출발한지 그리 오래지 않아 아이들끼리 투닥거리기 시작했다. 말로 해서 여자를 당할 남자가 몇이나 되겠느냐만, 딸을 길러본 사람이라면 네 살짜리 계집애들이 얼마나 영악한지 잘 아시리라 믿는다.

딸아이의 입담에 감히 반격할 엄두를 내지 못하던 사내아이가 갑자기 “너는 왜 우리 아빠 차에 타고 있느냐”며 걸고 늘어지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딸아이의 말문이 막혔다. 곧 “우리 아빠 차에서 당장 내려서 걸어가라"는 선언으로 이어지자 딸아이는 그만 울어버렸다. 어린 마음에도 얼마나 분했을까 싶었다. 경위야 어쨌든 어린 자식의 울음은 결코 흔쾌하지 못했다. 그런데 사내아이는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거지같다느니 더럽다느니 등등의 악담을 퍼붓다가 급기야는 손찌검까지 하는 것이었다. 그러면 얼른 말려야 할 것인데 그 아이의 엄마는 통쾌하다는 표정으로 슬며시 외면하는 게 아닌가? 그때의 심정은 어떻게 말로 표현하기 어려웠다. 아내는 웃는 얼굴이었지만 그렇게 시작된 야유회가 흥이 날 리가 만무했다.

그럭저럭 시간이 지나서 돌아갈 때가 되었다. 모든 직원들이 모여서 뒷정리를 하고 있는데 그 사내아이가 우리 딸아이에게 달려오더니 “절대로 우리 차에 태워주지 않을 테니까 너희 엄마 아빠와 함께 걸어가라”며 악을 써댔다. 너무 화가 난 딸아이가 따귀를 한 대 올려붙이자 본격적인 싸움으로 발전했다. 하지만 힘으로 어떻게 사내아이를 당하겠는가? 아내가 급히 뜯어말렸지만 이미 딸아이는 코피가 터진 다음이었다. 물론 이번에도 그 아이의 엄마는 말리거나 꾸짖지 않았다. 오히려 통쾌하다는 듯 씩 웃더니 미안하다는 말도 없이 자신의 아이를 데리고 차에 올라타 버리는 것이었다. 그때는 정말이지 그 여편네의 따귀라도 한 대 때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마터면 아이 싸움이 어른 싸움이 될 뻔했지만 겨우 참고 다른 직원의 차를 타고 귀가했다. 차 안에서 딸아이는 우리도 차를 사자고 울며 보챘고 아내는 집에 닿을 때까지 아무 말도 없었다.

다음 날 나는 월차 휴가를 신청했다. 물론 차를 구입하기 위함이었다. 딸아이는 신나는 노래를 부르며 자동차 대리점의 사무실의 여기저기를 뛰어다녔다. 큰마음 먹고 구입한 것은 그 이름도 유명한 국민차 "티코”였다. 그래도 티코 가운데 가장 비싸다는 “티코슈퍼”를 계약했다. 마침내 티코가 우리 집에 온 날은 완전히 축제분위기였다. 딸아이는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차가 잘 있는 것을 확인한 다음에야 안심하고 다시 누웠으며 다음 날 일찍부터 동네 아이들을 일일이 찾아가 우리도 차를 샀다며 자랑하고 다녔다. 비록 티코지만 차를 소유한 다음부터는 모든 것이 전혀 다르게 변했다. 가장 큰 혜택을 본 사람은 역시 딸아이였다. 아비가 퇴근하면 동네라도 한 바퀴 돌아야 했고 휴일에 집에 있으려면 난리가 났다. 딸아이는 에어컨 바람을 시원하게 쏘이면서 백화점에 가거나 맛있는 것을 사먹으러 가고 싶어 했고 나는 해달라는 대로 다 해주었다.

일단 차를 구입한 다음에는 처가에 진 신세도 갚아야 했다. 장모님께서는 텃밭에 부추를 재배하셨는데 그것을 팔러 서울의 시장으로 나가시는 것이 큰일이었다. 자식들이 만류했지만 당신께서는 전혀 개의치 않으셨다. 시골에서 6남매의 대부분을 대학을 보내려면 보통 고생을 하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산을 뒤져 캐낸 나물과 밭에서 기른 푸성귀 보따리를 거의 매일같이 새벽 첫 기차에 실어내시던 고생을 20년이나 반복하신 것이었다. 그 습관이 배어서 부추나마 가져가시려 했지만 이미 당신의 몸은 그런 일을 하기에 적합하지 않으셨다. 시장상인들이 트럭을 보내어 한꺼번에 수매했지만 그러면 제값을 받기 어렵다며 발을 동동 구르셨는데, 막내사위가 “티코”를 구입한 다음부터는 그 일을 도맡아 버린 것이었다.

언제 부추와 나물을 묶어낸다고 전화를 하시면 득달같이 달려가서 차에 그득 실어 시장까지 날랐다. 사위 덕에 편하게 부추와 나물을 파실 수 있었지만 아비 곁에 꼭 붙어 앉아 야무지게 운전감독(?)을 하는 외손녀를 보시는 것도 큰 기쁨이셨을 것이다. 장모님은 도매상인들에게 물건을 넘기신 다음 그들이 제공한 숙소에서 주무시고 돈을 받아 내려가셨다. 당신께서는 막내사위에게 먹일 것은 언제나 따로 준비하셨다. 무공해 부추와 제철 나물은 물론이고 싱그러운 머위 쌈과 돌미나리 김치, 소담스런 들깨송이 튀긴 것 등등 서울에서는 돈 주고도 사 먹기 어려운 것들이 언제나 떨어지지 않았다.

가을이 되어 추수할 때가 되면 주말마다 시간을 내어 도와 드렸다. 손에 익지 않은 들일을 하다가 장모님과 아내가 내온 곁두리를 먹는 맛은 어떻게 표현해야 할 지 모르겠다. 추수가 끝난 다음 봇도랑에서 미꾸라지를 잡아 추어탕을 끓여 온 가족이 푸짐하게 먹는 맛도 천하의 별미였다. 추수가 완전히 끝나도 도와드릴 일은 많았다. 처가댁의 앞에 있는 100년 이상 묵은 큰 은행나무에서는 보통 2가마니 이상을 따내었다. 은행 껍질을 벗겨서 말린 다음 경동시장의 약재시장으로 가져가면 적지 않은 돈을 받을 수 있었는데, 그 일도 당연히 나의 몫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가 가장 행복했던 시절인 것 같다.

티코를 구입한 다음 해에 아들을 낳아서 독자로서의 마음고생도 덜었다. 아파트를 구입한 것은 1996년의 일이었고 상가를 구입한 것은 다음 해의 일이었다. 본래는 차도 바꾸려고 했지만 아파트와 상가를 구입하는데 거의 2억이나 쓴 다음이라 도저히 여유가 없었다. 머지않아 고급 승용차로 바꾸게 될 것을 확신했기 때문에 티코를 타고 다녀도 그리 부끄럽지 않았다. 외식과 쇼핑은 계속 되었고 보랏빛 미래를 의심치 않았다. 그러다가 IMF를 당하게 되었다. 급격하게 고생길로 접어들자 차를 바꾸는 것은 감히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런데 바로 앞에 사는 부부는 무슨 일을 하는지 갈수록 형편이 나아지는 것 같았다.

그 집의 아기 엄마는 자랑하는 것을 유난히 좋아했다. 앞집의 자가용은 무쏘 가운데 가장 비싼 모델이어서 이미 몇 년이나 몰고 다녔던 나의 티코와는 확연히 대비되었다. 아파트 주차장에서 볼 수 있는 티코는 딱 1대 뿐이었다. 이제 초등학생이 된 딸아이도 창피했던지 새로 차를 뽑자며 조르다가 뜨끔하게 혼이 나기도 했다. 그 시절의 티코는 우리의 궁핍을 가장 잘 상징하는 것이었다.

상황은 갈수록 나빠졌고 급기야 티코는 생존에 반드시 필요한 도구가 되었다. 가정을 유지하고 아이들을 굶기지 않으려면 맞벌이를 해야 했다. 퇴근한 다음 아파트에서 거의 2시간을 달려가 부업을 해야만 했다. 매일 같이 아내를 태우고 2시간을 운전해서 일터에 도착하여 함께 4시간 이상을 일한 다음 다시 왔던 길을 되짚어 돌아가야 했다. 당연히 대단히 힘들었지만 아이들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그래도 가정이 해체되지 않을 수 있는 것을 다행으로 알았다. 그때의 티코는 충직하고 든든한 일꾼이었다.

1999년의 어느 여름 날, 강력한 태풍이 북상한다는 경보가 떨어졌다. 처음에는 설마하고 그리 신경 쓰지 않았다. 마침내 태풍이 닥치던 날은 하늘에서 해일이 일어나기라도 한 것처럼 엄청난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어찌나 큰 비였는지 감히 부업을 하러갈 엄두가 나지 않을 정도였다. 처음에는 그나마 쉴 수 있어 다행스럽게 생각했지만 거의 손가락 굵기의 억센 빗줄기는 도무지 그칠 줄 몰랐다.

거기에 천둥과 번개가 사납게 울부짖었다. 아파트 20층에서 목격되는 천둥과 번개의 위력은 상상을 한참이나 초월했다. 시퍼런 빛줄기가 하늘을 찢어대고 고통에 못이기는 것 같은 어마어마한 비명이 터질 때마다 아이들이 겁에 질려 덜덜 떨었다. 아파트 옆의 개울을 걱정스럽게 바라보던 아내가 도저히 안 되겠다며 나섰다. 나와 아내는 서둘러 지하주차장으로 달려가 티코를 밖으로 가지고 나왔다. 아파트 광장에서 가장 높은 곳에 주차시켰지만 아내는 그래도 안심이 되지 않는 눈치였다. 아내는 단호하게 차를 더 높여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더니 화단의 경계로 사용하고 남은 벽돌들을 가리켰다. 나는 그럴 필요까지 있겠느냐고 했지만 아내는 절대 양보하지 않았다.

내가 티코의 트렁크에서 타이어를 교환할 때 사용하는 잭을 꺼내어 차체를 들어 올리면 아내는 타이어에 벽돌 두 장씩을 고여 넣었다. 양동이로 들이 붓는 것 같은 폭우에 앞에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온몸이 흠뻑 젖어 겨우 작업을 마치자마자 사람들의 비명이 터졌다. 그야말로 앗! 하는 순간에 사나운 물결이 덮쳐들었다. 결국 개울이 범람한 것이었다. 막고 어쩌고 할 사이도 없었다. 슬리퍼 아래에 철벅거리던 물결이 순식간에 종아리를 넘었다. 빠르고 강한 물살은 수평으로 떨어지는 폭포 같았다. 방금 전에 차를 몰고 올라왔던 지하주차장의 출입구는 그야말로 폭포를 방불케 했다. 지하를 향해 엄청난 기세로 쏟아지는 흙탕물에 휩쓸렸다가는 시체도 찾지 못할 판이었다. 그대로 멍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러기를 얼마 만에 지하주차장의 입구까지 물이 차올랐다. 주차되었던 차들이 둥둥 떠다니며 서로 부딪치다가 잠수함처럼 가라 앉아버렸다. 참으로 어이없는 광경이었다. 그 가운데 고급승용차 하나가 유난히 눈에 띄었다. 그 차는 앞집 아기 엄마가 “남편이 선물로 뽑아주었다”며 자랑하고 다니던 차였다. 그 집은 이틀 전에 휴가를 떠났고 새로 뽑은 차는 아낀다며 본래 타고 다니던 무쏘를 가져갔던 것이었다.

그 고급승용차가 흙탕물 속으로 가라앉는 순간, 나는 쓰게 웃었다. 다음 날 긴급 뉴스에서는 당시의 폭우가 기록적이었다고 떠들었다. 우리 주변에는 온통 흙탕물의 바다여서 굳이 뉴스를 보고 들을 필요도 없었다. 어떤 형태로든 홍수 피해를 당하지 않은 차는 우리의 티코가 유일했다. 그 날 이후, 우리는 '티코에 벽돌을 고여 놓은 사람들'로 불리게 되었다.

그 이후로도 티코는 우리와 모든 고락을 함께 했다. 계속되는 부업으로 하루도 쉬지 못하고 먼 거리를 달렸어도 고장 한 번 나지 않는 티코가 너무나도 신통했다. 아이들이 지각할 위기에 처하면 늠름하게 학교까지 달려주었고 부모님이 편찮으시면 당장 달려가 병원으로 모셔드렸다. 모든 삶의 과정을 함께 하는 티코는 기계로 이루어진 엔진에 철판을 씌운 자동차가 아니라 소중한 가족이었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모든 만남에는 이별이 따르는 법, 마침내 티코와 헤어질 날이 닥치고야 말았다.

아내가 대형할인점에서 남성정장 코너를 운영하게 된 것은 2002년 2월의 끝 무렵이었다. 글을 쓰겠다며 미쳐 돌아다니던 남편 몫까지 떠맡아 힘겹게 일하던 아내가 근근이 모은 돈으로 양복코너를 얻은 것이었다. 이제는 자신의 실력을 마음껏 발휘하여 돈을 벌게 되었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좋은 물건을 많이 떼어와야 했다. 그냥 이동하는 것은 티코로도 충분했지만 물건까지 적재하려니 아무래도 더욱 큰 차가 필요하게 된 것이었다. 게다가 티코는 이미 거의 10년을 몰았기 때문에 안전성의 문제도 제기되었다. 마침 양복을 구입하러 온 손님 가운데 대우자동차 대리점을 운영하는 분이 계셔서 “레조”를 계약하기에 이르렀다. 아내가 대리점 사장님의 차를 팔아주는 대신 그 사장님은 자신의 손님들에게 아내가 운영하는 코너의 옷을 사은품으로 제공하겠다는 이른바 win - win 계약이 성립된 것이었다.

대리점에서 왔다는 낯선 청년이 우리 아파트를 방문한 것은 레조를 인수받기 며칠 전이었다. 비록 티코라지만 2대를 운영하기에는 무리라는 판단으로 대리점 사장님에게 처분을 맡기게 된 것이었다. 나는 티코가 주차된 곳으로 청년을 안내했다. 내가 키를 건네자 청년이 십만 원 권 수표 두 장을 내밀며 “사장님께서 특별히 많이 쳐주는 것”이라며 말했다. 키를 건네받은 청년이 시동을 거는가 싶더니 어어, 할 사이도 없이 그대로 출발해버렸다. 나는 멍하게 티코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았다. 아내도 티코가 간 곳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딸아이가 그토록 원했고 강산이 바뀔 세월을 우리 가족과 함께 했던 티코가 그야말로 바람과 함께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티코도 우리와 헤어지지 않으려고 눈물을 흘리면서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억지로 떼었을 것이 분명했다. 그날따라 신호등의 푸른 빛에 왜 그리 눈이 시렸는지 모르겠다.

그렇게 티코는 가버렸지만 함께 했던 기쁨과 애환은 문신처럼 깊이 새겨진 것 같았다. 요즘도 길을 가다가 가끔씩 티코가 눈에 띄면 조용히 웃는다. 처음으로 우리 가족의 소유가 되었던 작은 티코는 나의 마음속에 영원히 주차되어 있다.

태그:#티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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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권 출판을 목표로 하는 재야사학자 겸 작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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