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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억속의 철길을 따라 달리는 기차
ⓒ 임재만
오랜만에 아내와 둘이서 고향에서 열리는 수박축제의 나들이 길에 나섰다. 모내기가 끝난 고향의 푸른 들판을 멋지게 달려가는 환상적인 기차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그만 옛 추억에 잠겨 버렸다.

▲ 간이역 플랫폼에 있는 추억의 간판
ⓒ 임재만
예전 고등학교 시절에 기차를 타고 내판에서 대전으로 통학을 했었다. 집이 꽤 산골이어서 십리를 걸어 나와야 겨우 기차를 탈 수 있었다. 그땐 불행하게도 무릎에 커다란 종기가 생겼는데, 걸어 다니기가 여간 불편하지가 않았다.

멀리서 기차의 기적소리가 '뻑~' 하고 요란하게 울리면 통학 기차를 놓칠세라 아픈 것도 모두 잊은 채 정신없이 뛰어 가곤 하였다. 왜냐하면 다음 기차는 두 시간 뒤에나 있어 학교 등교시간에 도저히 맞출 수 없기 때문이다.

더욱이 안개가 자욱한 날에 늦잠으로 집을 늦게 나설 때면 오로지 기차의 기적소리에만 귀를 기울이며 숨 가쁘게 걸음을 재촉하곤 하였다. 고맙게도 기관사 아저씨가 기차역에 당도하기 전에 요란한 기적소리로 여러 의미의 신호를 보내주곤 하기 때문이다.

▲ 조치원에서 기적소리 울리며 내판역으로 달려오는 기차
ⓒ 임재만
기차소리가 "뿡~" 하고 가까이 울리면 깜짝 놀라 무거운 책가방을 허리에 끼고 정신없이 달려가서 간신히 출발하는 통학기차에 몸을 실었던 기억이 새롭다. 그때는 그 순간이 매우 힘들었지만 얼마나 짜릿하고 가슴이 벅찼는지 모른다.

가쁜 숨을 고르며 친구들이 마련해준 자리에 앉아 눈을 감으면 다리에서 묵직한 신호가 강하게 느껴온다. 나도 모르게 바지를 걷어 올려 종기가 난 무릎을 살펴보면 무척이나 화가 난 듯이 벌겋게 부어 오른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럼에도 통학기차를 삼년 내내 한 번도 놓치지 않고 열심히 통학을 했었다.

▲ 내판역 풀랫폼으로 열차가 들어오는 모습
ⓒ 임재만
지금 생각하면 자랑스럽기도 하지만 미련했다는 생각이 든다. 기차를 놓치지 않기 위해 아픈 다리를 혹사시켜가면서 제때 치료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때는 기차를 꼭 타야만 하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던 것 같다.

어머니가 새벽에 일어나 고생하시고, 친구들이 기다리고, 선생님의 잔소리도 편하지 않을 것 같고 왠지 학교에 가지 않으면 모든 것이 잘못될 것 같다는 불안한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공부할 시간이 없어 차 안에서 친구들과 사전을 펼쳐놓고 영어단어를 외우고 어려운 수학문제를 풀던 일, 친구들과 재미있는 게임을 하다 이마에 혹이 생긴 일, '자야라면 땅'이라는 명품과자를 한 봉지씩 들고 마냥 즐거워하던 일이며, 예쁜 여학생이 주변에 앉아 있으면 잘 보이려고 무던히도 애를 썼던 기억이 너무 새로워 잊을 수가 없다. 지금 생각하면 통학 기차 안처럼 생동감이 있고 정겨운 곳도 드물다.

서로 다른 마을의 친구들이 이른 아침에 기차에서 만나 간밤의 이야기로 인사를 하고, 각자 다른 학교로 향하여 하루를 열심히 보낸 후, 저녁 통학 기차에서 다시 만나면 새로운 이야기로 차안이 시끄러워진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일찍 온 친구가 늦게 온 친구의 자리를 맡아 주면 고맙다는 인사는커녕, 심심풀이 게임으로 이마에 혹이 생기는 경우가 다반사다. 그런데도 기차 안에서 친구들과 만나 집으로 향하는 시간이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 통학하는 모든 친구들이 아마 나처럼 이 시간을 무척이나 기다렸을 것이다.

언젠가는 새로 맞춘 교복을 친구들과 정신없이 이야기를 하다 선반에 놓고 내린 적이 있는데, 그 교복을 찾으러 급행열차를 타고 서울까지 갔다 온 적이 있다. 결국 교복을 찾지 못하고 어머니 몰래 친척집에서 돈을 마련하여 시장에서 싸구려 교복을 사 입고 다녀야만 했다. 당시 집에는 딸기 농사를 지었는데, 어머니가 시장에 팔려고 하는 딸기를 자전거로 역까지 실어 나른 적이 있다.

역으로 가는 길이 비포장 길이었기 때문에 너무 빨리 달리면 딸기가 혹시라도 상하여 어머니가 시장에서 곤란을 겪을까봐 무척이나 조심스럽게 다루었었다. 한 번은 기차 시간이 너무 임박하여 긴장을 풀고 속력을 내다가 그만 딸기를 엎지르는 사고를 치고 말았다. 그때 아무 말 없이 딸기를 주워 담으시는 어머니를 보고 얼마나 마음이 아프고 죄송했는지 모른다.

그리고 매일 통학하는 학생들에게는 통학패스라는 것이 있었는데, 종종 이것을 분실하여 대전역 출구에서 곤란을 겪는 경우가 있었다. 지금의 운전면허증처럼 항시 소지하고 다녔는데 집에 놓고 오거나 분실하게 되면 새로 통학패스를 발급 받아야만 했다.

하지만 다들 넉넉지 못한 가정환경이라 무임승차를 할 수 있는 여러 궁리를 하여야만 했다. 그러다가 발각이라도 나면 혼도 나고 벌금도 물은 적은 있지만 다행히 큰 곤란은 겪은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지금은 통학열차가 없어져 추억의 기차로 박물관에 들어설 완행열차이지만, 그 당시 통학생과 서민들에게는 꿈과 희망을 실고 달리는 보물과 같은 존재였다. 많은 사람들이 매일 만나 각기 물고 온 저마다의 소식으로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 놓으면 기차 안은 어느새 신문사의 편집실처럼 생동감이 넘쳐난다.

더욱이 기차의 좁은 통로를 바쁘게 지나다니는 여러 차림의 패션쇼도 볼 수 있고, 입담 좋은 아저씨의 만담도 부담 없이 들을 수 있으며, 차창 밖으로 보이는 여러 마을의 풍경도 마음 놓고 볼 수 있어 이 통학 시간은 고등학교 시절이 나에게 준 최고의 선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초등학교 때에도 방학이 되면 서울에 있는 친척집에 놀러가곤 했는데, 오늘날과 같이 교통이 발달하지 않은 당시에는 꽤 먼 거리였다. 완행열차 비둘기호를 타고 서울을 가려면 4시간을 타고도 30분이 더 걸렸었다. 완행열차인지라 모든 역에 정차를 하는 것은 당연하고, 이따금씩 급행열차를 앞서 보내기 위해 연착이라는 걸 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시간이 너무 지루할 때면 정거하는 모든 기차역명을 외우기도 하고, 입담 좋은 아저씨가 풀어 놓는 6·25동란 때의 이야기를 귀 동냥 하면서 매우 긴 시간 여행을 한 적이 있다. 더구나 에어컨이 없는 기차 안은 많은 사람들로 북적되어 매우 더웠고, 시원찮은 선풍기를 볼 때면 짜증도 많이 났었다.

하지만 어머니가 보자기에 싸주신 삶은 계란을 까서 소금 찍어 입에 넣으면 그렇게도 지루한 서울길이 참으로 즐거웠던 기억이 난다. 지금도 그때의 맛을 잊을 수가 없어 가끔 가족들과 기차를 탈 때면 삶은 계란을 사 먹곤 하는데 예전 같은 맛을 찾을 수가 없다.

▲ 통학열차를 타기 위해 걸어다니던 통학길
ⓒ 임재만
꿈같은 시절에 있었던 동화 같은 옛날이야기지만, 지금도 고향 근처를 지날 때면 기적소리를 내며 지나가는 기차를 볼 수 있는데, 먼 옛날의 그 시절 속으로 나를 태우고 달려가는 착각이 든다. 예전의 친구들과 그때의 모습으로 다시 돌아가 정다운 이야기를 나누며 아름다운 그때의 추억에 머물고 싶다.

덧붙이는 글 | <철도와 함께 떠나는 여행> 응모글


태그:#기차, #통학열차, #고교시절, #친구,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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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행을 다니며 만나고 느껴지는 숨결을 독자들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 가족여행을 즐겨 하며 앞으로 독자들과 공감하는 기사를 작성하여 기고할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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