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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봄이 오는 가 했더니 어느덧 맨살 드러내는 초여름입니다.
ⓒ 임윤수
오는가 했더니 이미 저만치 가버렸습니다. 새침한 모습으로 찾아와 요염한 자태를 드러낼 거라 기대했건만 오는 둥 마는 둥 느닷없이 찾아와 가는 둥 마는 둥 분별없이 가고 맙니다.

아롱아롱 아지랑이 솟고, 뾰족뾰족 새싹 틔우는 봄인가 했더니 느끼기도 전에 맨살을 드러내야 할 만큼 성큼 다가온 초여름입니다. 떡잎 하나 겨우 지탱할 만큼 가냘프기만 했던 새싹도 이젠 어엿한 나뭇잎이 되었고, 화사하기만 했던 봄꽃들도 이러쿵저러쿵 뒷말을 남기며 자취를 감춰갑니다. 아직은 봄날이 분명한데 땅 위를 뒹구는 낙화처럼 가는 세월에 미련이 가득한 오후입니다.

만화방창에 화전놀이를 꿈꿨었지만 세세연년이 허탕입니다. 흐드러진 꽃 속에 흥청망청 마음 한 번 흐트려 볼 거라 생각했건만 꽃놀이는커녕 꽃구경도 제대로 못하고 꽁무니 없는 봄 끝에 서서 가는 세월을 한탄합니다. 작년에도 그랬고 재작년에도 내년 봄에는 뒷모습만을 보며 아쉬워하지 않으리라 다짐했건만 그 모든 게 공염불이 되었고 헛다짐이 되었습니다.

▲ 봄날은 희망을 준비하는 계절입니다.
ⓒ 임윤수

▲ 농부는 씨를 뿌리고, 벌들은 채밀을 합니다.
ⓒ 임윤수

▲ 미물인 벌일지라도 희망을 위해서라면 혼신을 다합니다.
ⓒ 임윤수
지나간 봄은 여느 봄날보다 아팠습니다. 계절을 벗어나는 탈피의 고통쯤이야 일찌감치 각오했지만 들뜬 황금빛으로 찾아온 돼지해의 봄은 유달리 아프고도 쓰라립니다. 대추리의 봄만 아팠던 게 아니라 땅 일구고 씨 뿌리는 농부의 마음이 살아 숨 쉬는 삼천리 방방곡곡이 구석구석 아팠습니다.

칠흑 같이 캄캄했던 겨울, 농부들은 쇠스랑과 호미 끝으로 봄을 일구려 했고, 바닷가 어부들은 터진 그물코를 꿰매며 봄을 낚으려 했습니다. 성직자들은 기도로 봄을 맞으려 했고, 행동하는 양심들은 뜨거움으로 봄맞이를 준비했었습니다.

찾아오는 봄날은 그들의 희망이며 생존이기에 봄을 기다리는 그들의 몸짓은 처절했습니다. 그러나 농부가 일구던 봄에는 새싹이 돋지 않았고, 어부가 꿰맨 그물엔 꽃이 피질 않았습니다. 덜그럭거리는 자갈과 피멍울 가득한 상처만 남았습니다.

캐낸 돌멩이는 돌팔매질이 되어 농부의 가슴을 때렸고, 꿰맨 그물코는 어부를 가두는 오랏줄이 되었습니다. 기다리는 봄은 오지 않고 염려하였던 봄, 장맛비처럼 상처만 남기는 그런 봄날이 물론 사람들 가슴은 물론 들녘도 휩쓸고 지나갑니다.

▲ 모든 사람들이 바라는 희망과 꿈은 같은 방향일지도 모릅니다.
ⓒ 임윤수

▲ 봐! 봐! 저기에 뭔가가 있어 하며 가리키게 하는 그 자체가 봄날입니다.
ⓒ 임윤수

▲ 이렇게 코끝으로 다가오던 봄날이 저만치 가버렸습니다.
ⓒ 임윤수
가는 봄날의 뒷모습, 길이가 줄어든 바지자락과 소매 자락 끝으로 살짝살짝 비추는 뽀얀 살결이 가는 봄날의 뒷모습일 수도 있고, 꽃 떨어진 자리에 새살처럼 돋아난 동그란 열매가 가는 봄날의 뒷모습일 수도 있습니다.

잠꼬대처럼 부르던 봄노래 한 소절이나, 몽정으로 드러내야 했던 봄날의 연애감정 역시 가는 봄날의 뒷모습일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잔상으로 남아 눈앞을 아롱거리는 봄날의 뒷모습은 일그러지고 찌그러진 일련의 자화상, FTA에 침묵하던 많은 사람들의 자화상입니다.

꽃잎 떨어져 우수수 꽃비 내리는 날이 봄과 여름의 경계일 수도 있고, 먼 산 나뭇가지가 더 이상 보이지 않는 날이 그날이 될 수도 있습니다. 봄과 여름의 경계에 서서 때 잃은 계절의 이방인이 되었음에도 이방인이 되었음을 망각합니다.

가는 세월이 무상하다고 하는데 정작 가는 세월을 보았단 사람은 보지는 못했습니다. 다람쥐가 쳇바퀴를 맴돌며 무한궤도의 질주를 이어가듯 인간들 역시 세월이라는 둘레를 만들어 놓고 다람쥐처럼 무한궤도의 세월을 엮으려 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 가는 봄날은 낙화처럼 초췌할 수도 있지만 그래도 기다려야 하는 희망입니다.
ⓒ 임윤수
한때는 가는 모습이 아름답다고 생각했던 적도 있지만 올 봄은 그렇지 않습니다. 가는 모습은 가는 모습으로 쓸쓸할 뿐입니다. 기대를 걸었던 터라 그런지 유독 가는 봄날에 미련이 남습니다. 땅바닥을 뒹구는 낙화의 초췌함에 가슴이 시려옵니다.

그래도 가는 봄날을 노래하렵니다. 봄날이 가야 여름이 오고, 여름이 와야 결실의 가을을 맞을 수 있고, 가을이 지남으로 올해 역시 어영부영 지나쳐 버린 희망의 봄, 만화방창에 화전놀이를 기약할 수 있는 새 봄을 맞을 수 있을 테니 말입니다.

태그:#만화방창, #화전놀이, #몽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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