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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일찍 길을 나선다. 아침 메뉴는 햇반과 라면처럼 포장한 바지락 칼국수에 김치와 밑반찬이다. 라면보다 칼국수가 좋은 이유는 두가지다. 하나는 느끼하지 않고 담백해서 아침에 먹어도 부담이 없다는 거고, 또 하나는 기름기가 없어서 세제를 사용하지 않아도 설겆이가 가능하다는 것.

아침도 먹었겠다 마음은 가볍다. 목적지는 완도. 짐작으로 길을 선택해 가다가 차를 세우고 행인에게 묻는다. 사람들은 하나 같이 친절, 우리가 가는 길이 맞는단다. 더 신이 난 운전수 어깨에 힘이 들어간다.

▲ 숲속 석문휴게소 풍경과 계단길...
ⓒ 이현숙

▲ 석문숲속 휴게소 주변 풍경
ⓒ 이현숙
강진읍을 지나고 들판을 지나니 산길이 나온다. 비탈진 산길이 아닌 도로는 평지지만 양쪽으로 산인 길이다. 기암절벽이 있고 앞에 작은 다리가 보인다. 아무래도 경치가 범상치 않아 보인다. 다리를 건너자 커다란 바위 위에 석문휴게소라는 글씨가 써 있다. 그리고 그 뒤로 울창한 숲이 보인다. 차는 자동으로 그 좁은 길로 좌회전해 들어간다.

이른 아침이라 인적도 없고 고요해 마치 정령들이라도 살고 있을 것 같은 신비로운 숲이다. 숲에 들어서니 눈앞에 작은 다리가 있고 다리 건너 석문 숲속 휴게소라고 쓴 하얀 건물이 있다. 정자에 기대어 물건너를 바라본다. 아름답다는 말 외엔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다.

▲ 석문숲속휴게소 위 산 중턱에 있는 정자...
ⓒ 이현숙

▲ 정자에서 바라본 18번 국도와 들판
ⓒ 이현숙
한참을 바라보다 다리 건너 산으로 눈이 간다. 그 중턱에 그린듯이 정자가 서 있다. 가파른 돌 계단길도 보인다. 느리게 다리를 건너 돌계단 길을 오른다. 생긴 모양 그대로의 돌을 모으고 다져서 만든 특이한 계단이다.

정자에서 아래를 바라보니 구불구불 뱀처럼 휘어진 길과 들판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른 아침이라 시야가 뿌옇지만 흐려진 시야가 오히려 신비로움을 더해준다. 이렇게 좋은 곳이 있었다니 감탄하면서, 이번에도 어김없이 뜻하지 않은 좋은 풍경을 만났구나 감격한다.

길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산이 있다. 쭉 늘어서 있는 특이한 산봉우리들이 줄곧 우리를 호위해 준다. 해남땅으로 들어선 것이다. 두륜산 이정표가 보이고 드디어 땅끝 가는 길과 완도 가는 길이 갈라진다. 완도 가는 길로 접어들어 20분쯤 가니, 어수선한 분위기가 감지된다. 무슨 일이지? 길가로 노란색 반FTA 깃발이 운동회날 만국기처럼 펄럭이고 왼쪽은 바다인데, 길건너 쪽은 잔치라도 벌어진 동네처럼 술렁거린다.

▲ 장 마당 옆의 길, 13번 국도...
ⓒ 이현숙

▲ 남창 장 풍경... 다음 날 나올 때 보니 이 넓은 곳이 휑하니 비어 있었다
ⓒ 이현숙
아! 장날이구나. 이 볼거리를 보고 그냥 지나칠 수 없지. 차를 길가에 세우고 장터로 들어간다. 인심좋은 남도 장터를 구경하러. 어디에도 무슨 장이라는 설명이 없으니 난전을 벌이고 앉았는 할머니께 묻는다.

"남창 장이라우."

지도를 보니 해남끝 동네다. 바닷가 마을답게 해산물이 지천이다. 병어, 갈치, 오징어, 키조개, 꼬막, 바지락도 보인다. 채소도 시골장 인심 덕인지 단이 무척 크고 실하다. 봄이라 파릇파릇한 모종도 한몫 끼어 있다.

봄이고 푸성귀철이라 그런지 꽤 풍성한 장이다. 요즘은 시골장이라 해도 이렇게 풍성한 장을 만나기가 어렵다. 거의 엿장사나 옷장사가 낀 도시의 시장 같은 분위기가 대부분이다. 그런데 우린 정말 5일장다운 장을 만난 것이다.

▲ 채소 파는 아주머니의 인상이 아주 순수하고 후덕해 보인다
ⓒ 이현숙

▲ 나물을 손질해 파는 할머니...'하루 이 만원은 벌재' 하시고는 고개를 숙이셨다
ⓒ 이현숙

▲ 장에 나온 생선과 조개들...
ⓒ 이현숙
조그맣게 난전을 벌이고 앉았는 할머니 앞에서 카메라를 꺼낸다.

"날 찍어 뭣에 쓸라고?"
"왜 싫으세요?"

그러나 손사레 대신 웃으시며 하는 말씀.

"그냥 심심해서 장날이믄 나오는 거여. 사램구갱이나 헐라고."
"그래서 이거 다 팔면 얼마나 벌으세요?"
"응, 한 이만원 벌재. 손주덜 과자도 사 주고 헐라고. 가만 앉아 있으믄 뭣해."

변명처럼 건네는 할머니의 말씀이 귓가에서 떠나질 않는다. 그렇지 할머니와 우리와는 돈 단위가 다르지. 돈을 쌓아놓고 사는 사람들과 우리와 돈 단위가 다르듯이…. 술렁거리는 장거리를 기웃거리는 사람들은 대부분 노인들. 벌써 얼굴이 불콰한 노인도 있고, 근심낀 얼굴로 난전을 기웃거리는 노인도 있다. 또 연둣빛 모종을 놓고 흥정을 벌이는 노인도 있다.

▲ 난전에 펼쳐진 물건들과 흥정하는 사람들...
ⓒ 이현숙
우리는 방금 신선한 숲을 보고온 터라 신이 나 있었고, 여행자로서 새로운 볼거리를 보고 흥분돼 있지만, 이분들에게는 여기가 삶터다. 장날을 바라보면서 채소를 키우고 나물을 뜯고. 그래서 장날이 되면 새벽 같이 물건을 싣고 장으로 온다. 떼로 몰려와 서울 시내 한복판에서 시위를 하고 목소리를 내도 결코 멈출 수 없는 농사. 그 고단한 일의 시작을 위해 모종을 사러 나온 것이다.

나는 카메라를 메고 활보하는 우리 때문에 행여 저분들 마음 다치지 않을까 은근히 신경이 쓰였다. 시간 많고 할 일 없어 여행이나 다니는 철부지 도시 것들로 보일 것 같아서.

그러나 우리에게도 소득은 있었다. 만원에 여 덟개 짜리 참외를 반만 달라고 해서 샀는데. 이 참외 어찌나 맛이 있던지 먹을 때마다 여태까지 먹어 본 것 중에 최고라는 찬사를 하면서 먹었다. 마지막 남은 한 개를 깎을 때는 이럴 줄 알았으면 아예 만원어치를 살 걸 하면서 후회했다.

덧붙이는 글 | * 강진 석문 숲속휴게소 : 전라남도 강진군 도암면 석문리에 있으며 18번국도 강진에서 해남으로 넘어가는 18번 국도 옆에 있습니다.
석문산 숲속휴게소가 있는 산이 석문산이며 앞에는 석문천이 흐르고 있습니다. 

* 남창 오일장은 전라남도 해남군 북평면 남창리에서 5일에 한번씩 열리는 장이며 완도 가는 해남끝 동네입니다.


태그:#석문휴게소, #남창장, #해남 땅끝, #5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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