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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승희는 왜 32명에게 총구를 겨눴나. 미국은 '버지니아텍 총기난사 사건' 이후 총기사용 문제와 이주민 정착 문제와 관련해 사회적으로 반성하는 분위기다. 조승희가 무차별적으로 총을 쏠 때까지 방치한 사회적 책임에 대한 질타다. 한국 사회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한국 청소년 문제는 조승희 사건과 무관할까. 한국에 살고 있는 '소수자'인 이주노동자와 그 자녀들을 위한 '안정된 정착 대안'이 있나. 정신과 전문의 조중근 박사가 두 번째 기고문을 보내왔다. <편집자주>
▲ 버지니아텍 총기난사사건이 벌어진 지난 16일(현지 시각) 경찰들이 부상자들을 나르고 있다.
ⓒ AP·연합뉴스
살인의 이유는 알 수 없고 영원히 알 수 없을 것이다.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데, 그것도 수십 명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몰살한 일에서 타당한 이유를 찾겠다는 시도, 그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범인은 사건과 사건 사이에 사진과 동영상을 NBC에 우편으로 보냈다. 그는 자신이 저지른 행위에 윤리성을 부여하려 했다. 동영상에서 조승희는 사회 도덕성을 뛰어넘는 주체 윤리의 완성을 험악하고 근엄한 표정으로 선언했다. 물론, 그의 기대와 달리 사태는 주체 윤리의 완전한 파멸로 끝났다.

우리는 다만, 감당할 수 없는 선망과 질투가 몰고 온 끔찍한 파국을 목격했을 뿐이다. 살인에는 까닭이 없다. 다만, 알리바이만 있을 뿐이다. "무엇에 씌어 일을 저질렀을까"라는 질문의 '무엇'을 캐내는 일이 우리들이 알아낼 수 있는 한계점이다.

"동물은 비록 필연적으로 서로 죽이기는 하지만 죽음을 자신 속에 품고 있지는 않다, 동물은 보편적인 사도-마조히즘을 아직 창조하지 않았다"는 들뢰즈의 말처럼, 죽음을 의도하고 계획할 수 있는 존재는 인간뿐이다. 다른 동물과 달리 인간은 그 대상이 자기 자신이든 타자이든 죽음을 항상 마음속에 품고 사는 존재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인생들은 마음에 품는 것을 넘어서지 않는다. 그러므로 인간 살해에 대한 물음은 그 초점을 살의 유무에 두기보다는 '무엇이 그 살의를 실현가능하게 만들었는가' 혹은 '어떤 힘이 그를 살인으로 몰아갔는가'에 두어야 할 것이다.

무엇이 그를 살인으로 몰아갔는가

최후에 조승희를 압도했던 것은 두 가지로 압축된다. 망상으로 대표되는 정신병적(psychotic) 증상들과 좌절감에서 비롯된 끝이 없는 분노다. 자신을 해하려는 세력들이 주변을 에워싸고 있다는 피해망상과 이를 환상 속에서 극복하려는 가운데 발생하는 과대망상, 그리고 단 한 번도 위로받지 못한 좌절감. 아니! 위로 불가능한 좌절감. 두 악마적 요소는 서로 증폭시켰고 상승작용이 더 이상 진행될 수 없을 정도로 극대화된 지점에 이르러 폭발하고 말았다.

요약하면 정신병이 생길 수 있는 생물학적 취약성을 지닌 한 인간이 반복되는 좌절 가운데 정신병의 덫에 걸려 살인마로 변해버린 것이다. 마지막 순간에 그는 마귀이고 괴물이었다. 하지만 그가 처음부터 마귀이거나 괴물이었던 건 아니다. 한국을 떠나기 전 그는 '지극히 내성적인 모범생이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이었다.

아버지는 법이 없어도 살 사람이었다. 그는 가족을 위해 열심히 노력했지만, 한국 사회에서는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판단했다. 조국은 성실한 그에게 상처와 패배감만 안겨줬고 조승희의 가족은 전쟁터를 피한다는 막연한 심정으로 미국으로 건너간다. 더 이상 물러설 곳도, 돌아갈 곳도 없는 상황.

온 가족은 자식 교육에 목숨 걸었으며 성공에 대한 압박감은 극에 달했다. 누나와 조승희는 가족에게 말 그대로 빛과 그림자였다. 자식 교육에서 절반의 실패는 곧 완전한 실패임을 부모 된 사람들은 안다. 그의 부모는 병든 자식을 보며 고민은 했지만, 실패를 애써 부인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까지 알려진 자료들에서 치료에 적극적이었다는 증거는 없다. 체면의식 때문이었을까? 여하튼 실패를 적극적으로 인정하는 일만은 하고 싶지 않았던 것은 사실인 것 같다.

미국 사회는 경쟁 과정이 한국사회에 비해 공정한 만큼, 승패에 대한 대가는 오히려 더 혹독하다. 패자는 그냥 패자일 뿐이다. 과정의 공정성이 차라리 승자독식을 위해 만들어진 논리라는 해석이 맞지 않을까? 무기 소지 자유화의 공식적 목적은 개인과 사유재산 보호지만, 그 논리는 또한 승자의 몫을 탐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이 대목에서 좀 더 찬찬히 생각해보자.

오늘 우리 사회에 만연한 인간관은 구조적으로 미국과 같다. 유사성을 넘어 극단으로 밀어붙인 느낌이다. 한술 더 떠 모두 성공해야만 하는 사회, 모두 승자가 돼야만 하는 이상한 나라가 돼있다. 그래서 언제부터인가 대학시험에 자신이 없는 이 땅의 아들·딸들은 미국으로, 캐나다로 날아가 버린다. 그들은 모두 어떻게 살고 있을까?

자발적으로 이민한 해외 동포를 취재한 방송에서, 실패 사례를 조명한 프로그램은 별로 본 적이 없는 듯하다. 그래서 모두 역경을 딛고 행복하게 잘 사는 줄로만 알았다. 우리에게 해외동포는 성공 신화 그 자체였다.

우리는 그늘을 보지 못했다. 미국 주류 사회에서 인정받는 자식들만 있을 수 없다. 쉬쉬 숨기고 싶은 2세들 또한 그만큼, 아니 그 이상 미국 사회에서 어떤 방식으로든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이제 그들을 비춰야하고 동시에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어둠에 적극적으로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그것이 이번 사건의 가장 큰 교훈이다.

'좌절은 삶의 동반자'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는 성숙한 사회를 꿈꾸는 계기로 만들어야 한다.

인간의 현재는 과거에 의해 결정되기는 하되 우리의 기억 속에 명쾌하게 살아있는 사건보다는 개인을 압도해 억압될 수밖에 없었던, 그래서 의식의 주체는 까맣게 그 의미를 모르고 있었던 사건들에 의해 '지금 그리고 여기'(here and now)가 결정될 운명이라는 것이 프로이드의 주장이다. 이 사건을 우리는 정신적 외상(psychic trauma)이라 부른다. 결국 그 정신적 외상의 실체는 은폐·왜곡돼 주체를 소외시키는 장소가 되고, 인간 실존은 무지(無知)를 중심으로 짜이게 된다.

▲ 2월 13일 오후 서울 세종로 정부중앙청사 앞에서 열린 여수 외국인보호소 화재참사 규탄 회견. 이 사건은 한국 사회에서 외국인 노동자들이 처한 열악한 상황을 상징적으로 보여줬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성공 강박증' 앓는 한국 사회... '제2의 조승희' 양산하는 것 아닌가

어느 순간부터 한국은 성공을 향한 가속도를 더 이상 줄일 수 없는 사회가 돼버렸다. 실패에 대한 담론은 가능한 은밀히 진행돼왔다. 압축 성장 발전을 하면서, 그리고 중단 없는 전진을 하면서 우리는 서로 형언할 수 없는 상처를 주고받아 왔다. 경제사회 적응에 실패하면 곧 인생이 실패한 것처럼 자신과 남에게 굴어왔다. 기회 있을 때마다 그렇게 살지 말자고 다짐하지만, 사회는 여전히 같은 모양새다.

사후작용. 정신적인 사건들의 특징 중 하나는 사후에 작용한다는 것이다. 조승희를 포함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은 인생 어느 시기에 우리도 모르게 성공과 관련된 상처를 많이 받았을 것이지만, 그 의미는 알 수 없었다. 삶에 대한 지평이 넓어지면서 외상의 실체를 어렴풋이 알게 되고, 그때부터 상처가 본격적으로 작동해 주류사회에 진입해야 한다는 불안을 의식하면서 청년의 인생은 괴로워지기 시작한다.

성공 강박증과 관련된 상처는 사회 도처에 널려있다. 연전연승만 했던 전쟁으로 알려졌던 베트남전 이면에는 정신과 육체가 피폐해진 셀 수 없는 병사들이 신음하고 있었다. 그 사람들은 한동안 그런 얘기들을 입 밖에 내지도 못했다. 베트남전은 조국 근대화의 초석이었기 때문에 함구해야 했다. 그리고 우리 때문에 발생했던 베트남 사람들의 불행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우리 사회의 많은 문제들은 실패를 인정할 수 없다는 밀약에서 연원한다. 어릴 적부터 약한 자를 괴롭히기에 물들어 있는 우리 어린이들과 청소년들. 조승희를 괴롭힌 미국 청소년들에게 분노할 사람도 있겠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한국 청소년들의 폭력성에 비할 바 아니다.

그뿐인가? 경제적으로 뒤처진 나라에서 온 노동자들이 받는 비인간적 대우는 어떠한가. 우리가 그들보다 우월해서 그들을 폭압적으로 대한다고 정당화하는 사람들, 그들이 게으르다고 폭력을 정당화하는 사람들. 그것은 모두 의식할 수 없는 상처 때문에 우리 자신이 망가졌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으면 좋겠다. 눈망울이 선한 외국인 노동자들이 '제 2의 조승희'가 돼가고 있는 중인지도 모른다.

치유되지 않은 외상은 부메랑처럼 돌아온다

수많은 말들이 빗발쳤다. 그리고 넘쳐나는 기사들. 무수한 말과 글이 나름대로 정당성을 주장하면서 우리의 눈과 귀를 경쟁적으로 휘어잡으려 했다. 그래도 우리는 답답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사람들은 점점 다른 쪽으로 관심을 돌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다시 사건 주변을 기웃거렸다. 순간 무엇인가 반짝 눈에 들어왔다. 벅차오르는 가슴에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희생자를 기리는 추모식에서 32개의 추모석만 준비될 것으로 기대했지만, 준비된 추모석은 33개였다. 조승희도 희생자로 받아들여진 것이다. 조승희의 추모석에는 "네가 그렇게 필사적으로 필요로 했던 도움을 받지 못했다는 걸 알고 가슴이 아팠단다, 머지않아 네 가족이 평온을 찾아 치유될 수 있기를 바란다, 하느님의 축복을, Barvara"라는 내용의 쪽지가 놓여있었다.

사건의 핵심을 이처럼 감동적인 언어로 간결하게 정리할 수 있을까? 어느 사회든 희생과 양보가 없다면, 폭력은 끝없이 악순환할 것이라는 사실을 직관적으로 파악한 것이다. 이는 미국 사회의 힘이자 기독교 문화의 정수를 보여준다. 못난 사람을 관용할 수 없는 사회는 늘 긴장의 연속이기 마련인데, 미국이 그러하고 우리는 관용 불가능이라는 면에서는 최악이다.

정신분석이 주는 교훈은 외상 또는 상처는 언젠가 다시 돌아온다는 것, 그러나 본인이 이해할 수도 감당할 수도 없는 증상들로 돌아온다는 것이다. 오늘 우리 사회의 병리 현상들 또한 우리가 걸어온 어느 지점에 존재했던 또는 지금도 존재하고 있는 상처들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 상처를 어루만질 수 있는 사회가 건강한 사회다.

나는 상상해본다. 지독히 어두운 내면을 언어화하도록 승희를 도와주는 사람이 있었다면, 그 또한 에드가 앨런 포우 같은 독특한 스타일을 지닌 소설가가 됐을지도 모르겠다고.

▲ 'VT' 뒷면까지 빼곡히 적혀 있는 메시지들. 버지니아텍 상징 색깔인 주황색과 마룬색 풍선이 무겁게 가라앉은 마음을 위로하는 듯하다.
ⓒ 김규영

태그:#심리학, #버지니아텍, #강박증, #조승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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