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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항 뜬다리부두(부잔교)
 군산항 뜬다리부두(부잔교)
ⓒ 이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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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중순은 녹색의 초여름 활력이 피어나는 계절이다. 며칠 전 서해안 금강 하구의 항구 도시인 군산의 근대 문화유산을 찾아 여행하였다.

군산항 내항은 뜬다리부두(부잔교)가 제일 먼저 눈에 띈다. 군산항은 조수 간만의 차가 커서 항구의 부두에 작은 기선도 접안이 어려웠다고 한다. 군산항의 부잔교는 서해안의 조수 간만의 큰 차이를 극복하는 역할을 한다. 부잔교는 바닷물 수위에 따라 다리가 올라갔다 내려갔다가 한다. 

군산은 일제가 조선을 수탈한 대표적인 항구 도시이다. 군산시의 장미동, 영화동, 금동, 명산동과 월명동 등의 지역은 군산항이 개항 전에는 바닷물이 출렁이며 드나드는 금강 하류의 간석지로 갈대가 무성하였다.

일제는 군산항을 강제 개항해 조계지로 지정하고 간석지 매립과 호안 공사를 벌여 대형 선박이 정박할 수 있는 항만을 구축하였다. 일제가 군산항을 현대식으로 건설한 첫째 목적은 호남평야의 쌀 수탈이었다. 군산항은 호남평야 쌀 수탈을 위한 일제의 전초기지로서 기획 도시였다. 

수탈의 아픈 역사 남아있는 공간들

일제는 군산항에 대규모 크레인으로 작동하는 부잔교를 설치하였다. 부잔교는 밀물이나 썰물에 구애받지 않고 언제나 부두에서 화물을 선적할 수 있는 시설물이었다.

군산항의 부잔교가 있는 죽성포구에 우리나라 최초의 신작로인 군산에서 전주에 이르는 46km의 전군도로가 1908년에 완성되어 도달하였다. 1912년에는 개통된 군산에서 익산 간 철도가 이곳을 지나 군산 내항에 이르렀다. 신작로(자동차 도로)와 철도가 호남평야의 쌀 수탈을 위하여 일찍이 군산항으로 집결했다.
 
군산항 뜬다리부두(부잔교)
 군산항 뜬다리부두(부잔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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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군산항 부두 가까이에 보존된 근대 문화유산을 둘러보았다. 군산 내항과 장미동 일원은 일제 강점기의 군산세관 본관, 18은행 군산지점, 조선은행 군산지점의 건물이 보존되어 일제강점기의 아픈 역사를 살펴볼 수 있는 공간이다.

군산은 1899년에 개항하였는데, 당시 군산은 호남과 충청 지역의 쌀 수탈을 위한 항구로서, 일본인들이 활개 치는 일본의 위성도시처럼 성장하였다. 일제는 호남평야의 농경지를 일제 토지회사와 자본가들을 동원하여 점유하였고, 동양척식주식회사는 조선인의 농경지를 계속 착취하였다.

당시 일제와 일본인 대농장의 지주들은 호남평야에 간선수로를 설치하고 대규모 간척 공사를 통하여 넓은 농지를 확보하여 수탈하는 쌀의 양을 늘렸다. 호남선과 군산선 등 철도 건설도 일본인 대농장 지주들의 영향력으로 선로가 일본인 대농장을 경유하기도 했다.

일제는 일본인 대농장의 지주들을 위해 소작 제도를 가혹하게 정비하였다. 일제가 시행한 식민지 지주제는 이 땅의 농민들을 소작농으로 전락시키고 쌀 수탈을 극대화하였다.

일제강점기 당시 조선 인구의 약 80%가 농민이었고, 또 그중 80%가 소작농이었다 한다. 소작료는 수확량의 70%에 이르렀다. 일본인 대농장이 자리 잡은 호남평야에서 소작농들은 단결하여 소작 쟁의로 저항하기도 하였다.
 
일제 강점기의 천장 크레인
 일제 강점기의 천장 크레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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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근대역사박물관 마당에서 1944년에 군산항의 제지공장에서 사용하던 초대형 천장 크레인을 살펴보았다. 이 크레인은 용접 방식이 아닌 리벳을 사용하여 제작하여서, 일제 강점기에 군산 내항에 설치된 부잔교 제작 방식과 유사할 것으로 추정한다. 군산시 신흥동 일원에 일본식 건축물이 많이 남아 있는 바둑판식 거리를 둘러보았다. 

일제는 1909년에는 조선에서 생산된 쌀의 30%를 군산항을 통해 수탈해 나갔고, 1934년에는 전국 총생산량의 50%에 육박하는 200만 석의 쌀을 군산항 부두의 부잔교를 통해 일본으로 실어 갔다.

조선 백성들의 헐벗고 굶주린 몸부림과 아우성이 군산항 부잔교에 모여있었다. 군산항 부잔교를 통과한 조선의 쌀가마니에는 '군산'을 의미하는 일본어 가타카나 'ク' 자 마크가 선명하게 찍혔다고 한다.

침략 사과한 일본의 종교단체... 군산의 태극기 거리
 
일제 강점기의 군산 세관
 일제 강점기의 군산 세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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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명동 천주교 성당을 지나서, 일본식 사찰인 동국사를 찾아보았다. 군산의 동국사는 우리나라에 하나뿐인 일본식 사찰이다. 동국사 대웅전 지붕은 에도막부 시대 쇼군(장군)의 투구를 연상시킨다고 한다. 이곳 동국사에는 일본 종교단체가 일제의 침략과 수탈 정책을 참회하는 글을 새긴 비문이 있고, 그 비문 앞에 평화의 소녀상이 서 있다.  

조선의 쌀을 수탈하기 위하여 일본인 대농장 지주들은 수리조합을 결성하여 1920년대에 만경강 상류에 대아댐, 섬진강 상류에 운암댐을 건설하여 호남정맥 산맥에 통수로 터널을 뚫어 섬진강 강물을 동진강으로 유역변경 하여 호남평야의 농업용수를 확보하였다.

호남평야의 일본인 대농장, 만경강과 동진강 유역의 수리조합, 만경강의 대아댐과 섬진강의 운암댐, 호남평야의 간선 수로, 최초의 신작로인 전군도로와 장항선 군산선 호남선과 전라선의 철도가 모두 호남평야에서 쌀을 대량 생산하고 수탈하기 위한 일제의 식민지 침략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호남평야와 전북 동부 산간 지역까지 펼쳐졌던 이 모든 시설은 군산항의 부잔교(뜬다리부두)를 구심점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동국사에서 군산 내항의 부잔교가 있는 부두로 돌아오는 길에, 일본식 가옥과 거리의 가게마다 태극기가 바람에 힘차게 나부끼고 태극기 거리가 있었다. 힘차게 펄럭이는 수많은 태극기는 태극기의 문양, 크기와 색감들이 다양하다. 태극기에는 사용했던 단체와 연도가 씌어 있어서, 군산의 근대 문화유산이 우리에게 생생한 역사적 교훈을 주고 있다. 

군산 태극기 거리에서 김구(1876~1949) 선생이 1941년에 중국 중경에서 '일본을 타도하고 조국의 독립을 완성하자'는 글귀가 씌인 태극기를 숙연한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일제의 쌀 수탈에 맞서서 호남평야에서 소작쟁의 하던 조선 소작인들이 높이 세우고 흔들었을 깃발도, 이곳 태극기 거리에서 함께 펄럭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군산 근대 문화유산 거리의 살아 있는 민족혼 정신
 군산 근대 문화유산 거리의 살아 있는 민족혼 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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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군산항부잔교, #전군도로, #소작쟁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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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관광해설사입니다. 향토의 역사 문화 자연에서 사실을 확인하여 새롭게 인식하고 의미와 가치를 찾아서 여행의 풍경에 이야기를 그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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