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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년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조사위원회는 이명구가 후손에게 상속한 청주시 상당구 탑동에 소재한 토지 한필지를 국가에 귀속했다. 하지만 친일재산조사위는 이보다 넓은 토지를 파악하고도 환수하지 않았다. 
2008년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조사위원회는 이명구가 후손에게 상속한 청주시 상당구 탑동에 소재한 토지 한필지를 국가에 귀속했다. 하지만 친일재산조사위는 이보다 넓은 토지를 파악하고도 환수하지 않았다.  ⓒ 충북인뉴스

1949년 5월 10일. 58세의 남성이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아래 반민특위) 신정호(申政浩) 조사관 앞에서 조사를 받습니다. 신정호 조사관이 남성에게 신분과 직업을 묻습니다. 이 남성은 신분은 "양반"이고 직업은 "의사"라고 답합니다.

다시 재산과 생활상황에 대해 질문합니다. 남성은 "부동산으로 답(논) 1만2000평 가량, 전 1만5000평가량, 가옥 2동(시가 150만 원가량), 동산으로 1만 원가량이고 중류이상의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라고 답합니다. 논과 밭의 면적을 합하면 8만9000㎡로 축구장 13개 정도의 면적입니다.

이 남성은 자신의 '친일행위', 즉 범죄사실에 대해서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조사관이 남성에게 '대동아전쟁'(일본이 미국을 상대로 벌인 침략전쟁)을 완수한다는 단체에 관여한 사실에 대해 말하라고 묻습니다. 남성은 '임전보국단' 충북지부장, 국민총력충북연맹 이사 등의 직에 있었다고 답합니다.

조사관이 남성에게 일본의 침략전쟁을 옹호하는 순회강연을 한 사실에 대해 묻습니다. 그러자 남성은 "석교동, 탑동, 남주동 등에서 매월 8일 남녀노소를 상대로 '소위 전쟁에 협력하라는 부끄러운 말을 했습니다"라고 답하지만 "자세한 내용은 기억치 못한다"고 말합니다.

해방 후 충북도지사로 변신한 친일파

 친일반민족행위자 이명구에 대한 반민특위 조사기록. 1949년 반민특위는 이명구를 체포해 친일반민족행위 범죄에 대해 조사했다. 
친일반민족행위자 이명구에 대한 반민특위 조사기록. 1949년 반민특위는 이명구를 체포해 친일반민족행위 범죄에 대해 조사했다.  ⓒ 충북인뉴스

위에 언급한 조사를 받은 남성의 이름은 '마키하라 히로사다'(牧原廣定), 한국 이름은 이명구(李明求, 1892~1975)입니다. 해방후 대한민국의 세 번째 충북도지사를 지낸 인물입니다. 그는 반민특위에서 조사를 받을 정도로 비중 있는 친일반민족행위자였습니다.

1928년 11월 일본정부로부터 쇼와대례기념장을 받았고, 1930년 조선총독부 충청북도 관선 도평의회원으로 선출됐습니다. 1933년부터 1936년까지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지냈습니다.

일제가 제국주의 침략전쟁을 옹호하기 위해 설립한 단체인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이사, 흥아보국단준비위원,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을 지냈습니다. 또 1940년에는 조선신궁에서 열린 '일본기원 2600년 기원절'에서 충북 대표로 파견됐습니다.

대한민국 정부 출연기관인 한국학중앙연구원은 이명구를 어떻게 설명할까요? 이 기관에서 펴낸 '디지털청주문화대전'에는 이명구를 "특히 낙후된 교육환경 개선에 남다른 관심을 쏟아, 의원, 중추원참의, 은성장학회(殷成獎學會) 이사장, 제3대 충북지사, 충북 향교재단 이사장 등을 역임하는 등 충북지방 발전에 공로가 컸다"라고 기술합니다. 그가 반민족행위자였다는 내용은 없습니다.

8만9000㎡나 됐던 토지, 얼마나 환수됐을까

앞서 언급했듯이 친일반민족행위자 이명구는 반민특위에서 자신의 토지가 모두 2만7000평(8만9100㎡)이나 된다고 진술했습니다. 이중 환수된 토지는 얼마나 될까요?

놀라지 마세요. 6.6㎡에 불과합니다.

대한민국 정부는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의 국가귀속에 관한 특별법'(친일재산귀속법)에 따라 2007년 이명구가 후손에게 상속한 청주시 탑동 122-2번지(면적 6.6㎡ 토지에 법원으로부터 '매매금지가처분'을 신청합니다. 그리고 2008년 12월 17일 해당 토지를 국가에 귀속시켰습니다.

딱 여기까지입니다. 6.6㎡의 토지, 올해 기준 공시지가 242만 원의 토지라도 환수시켰으니 잘했다고 평가해야 할까요? 자세히 살펴보니 '알짜배기 땅'은 놔두고 자투리 땅만 환수한 것으로 파악됐습니다.

'친일청산재산환수 마적단'의 김남균 <충북인뉴스> 기자는 이명구가 후손에게 증여한 토지와 건물 3필지(합산면적 336㎡)를 찾아냈습니다. 올해 공시지가 기준 2억4000여만 원 정도 됩니다.

청주시 상당구 남문로1가에 소재된 건물의 등기부등본을 살펴보니 뭔가 이상한 정황을 발견했습니다. 탑동 소재 자투리 땅 6.6㎡와 마찬가지로 2007년 대한민국정부는 이 세 필지 토지에도 '매매금지 가처분'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2008년 이 토지의 '매매금지가처분신청'을 해제했습니다.

대한민국 정부가 국고 귀속을 포기한 걸까요? 다른 이유가 있었을까요? 토지에 대한 이력이 뭔가 다른 것이 있을까요? 즉, 환수된 토지는 일제강점기 시절에 매입을 했는데, 이 토지는 그 시기가 아닌 다른 시간에 구입했거나 하는 그런 것 말입니다.

'또 다른 노회찬'이 필요한 이유

친일재산귀속법에는 친일파가 친일의 대가로 1905년부터 1945년 해방전까지 취득한 토지만 환수대상으로 봅니다.

하지만 미환수된 토지 세 필지에 대해 이명구는 1933년에 취득한 걸로 돼 있습니다. 그때는 이미 이명구가 친일의 대가로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라는 고위직을 맡고 있었을 때입니다.

75년 전 반민특위는 이명구를 잡아 조사를 하고도 처벌도 못하더니, 60년 시간이 흐른 2008년도 친일재산환수 조사위원회는 가처분을 해놓고도 환수를 하지 않았습니다.

역사가 왜 이리 다람쥐 챗바퀴 돌 듯 반복될까요? 이제라도 다시 제대로 조사해야 합니다. 이명박 정부가 활동을 중단시킨 친일재산 귀속을 위한 조사위원회를 재가동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친일재산귀속법 법률 개정이 필요합니다. 2005년 제정된 이 법률을 대표발의자 중 한 분이 고 노회찬 정의당 의원입니다. 지금 다시 그가 그리워집니다. 2024년 또 다른 노회찬 의원이 나오면 좋겠습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충북인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충북인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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