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9.27 15:22최종 업데이트 24.09.27 1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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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일 자 <중앙일보>에 실린 "국민 품에 안긴 ‘육영수 특활비 장부’의 뜻은" ⓒ 중앙일보


'육영수 특활비 장부'가 서울 마포구 상암동 박정희대통령기념관에 기증돼 교육 자료로 활용된다고 <중앙일보>가 26일 보도했다. 이 신문은 1971년부터 3년간 대통령비서실 제2부속실에서 영부인을 수행한 김두영 전 비서관이 장부를 기증했다고 전했다.

장부는 육영수 50주기를 앞둔 지난달 7일 <중앙일보>에 공개됐다. 이날 <중앙일보>는 "장부에 따르면 육 여사는 매달 대통령으로부터 20만 원을 수표로 받은 뒤 매일 40여 통씩 오는 민원 편지를 바탕으로 기아·질병에 시달리는 빈민과 나환자, 학비가 부족한 학생, 공익단체, 대학생 봉사활동에 수천 원부터 10여 만원까지 지급했다"고 보도했다.

1970년 3월 4일 자 <경향신문>은 "설렁탕·곰탕·중국우동·자장면 등 대중음식 값이 부쩍 오르거나 질이 형편없이 낮아져 시민들만 큰 골탕을 먹고 있다"고 한 뒤 "중국 음식점의 경우, 남대문에 있는 C에서는 '자장면을 달라'고 하면 95원짜리를 주고 있다"라며 "시청 앞 D의 경우 1층에서는 1백원짜리 특제 자장면만 팔면서 '50원짜리 우동이나 자장면을 먹을 사람은 3층으로 올라가라'는 게시까지 하고 있다"고 전했다.

짜장면이 50~100원인 이 구도는 이듬해에도 비슷하게 이어졌다. 1971년 5월 3일 자 <경향신문>은 "자장면·우동 값은 60원에서 90원"이라고 보도했다.

1970년과 1971년에 비싼 짜장면이 100원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육영수가 매월 받은 특활비는 짜장면이 7000~8000원인 지금 가치로 환산하면 대략 1400~1600만 원이다. 당시의 짜장면 값을 50원으로 계산할 경우에는 이 금액이 두 배가 된다. 매월 이 정도 금액이 육영수에게서 나와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데 사용됐다는 것이다.

위 26일 자 보도는 육영수에 대한 김두영 전 비서관의 평가를 전했다. 그는 "육 여사는 대통령에게 받은 활동비를 이 같은 공적인 용도로만 썼고, 본인과 가족의 사적인 비용은 일반 주부와 똑같이 대통령이 주는 월급에서 썼다"고 말했다.

8월 7일자 보도에 따르면, 김 전 비서관은 "삭아빠진 대학노트 한 권에 기록된 장부가 중앙일보에 공개되자 언론이 앞다퉈 보도하고, 수많은 감사 전화를 받아 깜짝 놀랐다"라며 "장부가 육 여사의 진실한 면모를 그대로 보여줬기 때문일 것"이라고 평했다. 그런 다음, "특히 육 여사를 모르는 젊은이들에게 좋은 교훈이 될 듯하다"는 전망을 덧붙였다.

육영수의 금일봉 정치, 전두환의 금일봉 정치

어려운 이들을 돕는 것은 훌륭한 일이지만, 이 경우에는 신중한 판단이 요구된다. 육영수는 대통령 부인이었고 이 지위에서 발생하는 금전과 권위를 토대로 위와 같은 활동을 했다. 그가 직접 경제활동을 해서 번 돈으로 선행을 베푼 게 아니다. 그러므로 그의 선행을 평가할 때는 그가 처한 상황에 맞는 기준을 적용할 필요가 있다.

대통령은 경제적 가치가 사회 전체에 공정하게 분배되도록 노력할 책임이 있다. 대통령이 이런 책임을 다하는 가운데서 영부인이 위와 같은 선행을 했다면 모르겠지만, 재벌과 소수 세력에만 특혜를 몰아주고 일반 국민들에게는 저임금을 강요한 박정희 정권의 영부인이 위와 같은 선행을 베푸는 것은 위선으로 해석될 여지도 있다.

박정희는 부의 불평등 분배를 토대로 재벌 및 소수 세력과 제휴하고 이를 기반으로 다수의 국민들을 억압했다. 남편과 더불어 근본적인 문제를 외면한 채 소수의 사람에게 금일봉을 돌리는 것을 바람직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공적 지위를 갖지 않은 일반 국민이 사재를 털어서 선행을 베푸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일이다.

그 같은 금일봉 정치는 5·18 광주 학살의 주범인 전두환도 많이 썼던 방식이다. 5·18 학살 1주기가 임박한 시점에 발행된 1981년 4월 17일 자 <동아일보>는 "전두환 대통령은 16일 밤과 17일 새벽 사이 약 1시간 동안 서울 시내 포장마차집과 파출소 등을 둘러보면서 민정을 살폈다"고 한 뒤 이렇게 전했다.

"전 대통령은 포장마차 주인 이(李) 부인에게 '하루 얼마나 팝니까'고 물었는데, 이 부인이 '1만 원 정도 팔립니다'고 대답, 대통령은 '할머니가 고생이 많으십니다'고 말하면서 금일봉을 내놓았다."

그날 밤 전두환은 파출소에도 금일봉을 돌리고, 도봉구청 앞 실비집 식당 주인에게도 치료 지원을 해주었다. 이 같은 금일봉 정치는 집권 기간 내내 보도됐다. 국민들의 임금인상 요구가 나오면 공권력을 투입해 진압하는 인물이 이처럼 금일봉을 자주 꺼내곤 했다. 육영수의 금일봉 정치가 전두환의 금일봉 정치보다 나았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프레이저 보고서>에 등장한 육영수의 금전

미국 하원 국제관계위원회 국제기구소위원회 가 펴내 박정희 시대에 대한 완벽한 평가서로 평가받는 <프레이저 보고서> ⓒ 이주연


김두영 전 비서관은 육영수가 특활비 20만원을 알뜰히 쓰면서 장부에 일일이 기입하는 모습을 높이 평가하지만, 전혀 다른 각도에서 육영수의 금전 문제를 바라보는 쪽도 있었다. 박정희 정권의 비자금을 파헤친 미국 의회가 내놓은 <프레이저 보고서>를 읽어보면, 미국 측은 김 전 비서관이 목격한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금전이 육영수에게 흘러 들어가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미 하원 국제관계위원회 국제기구소위원회가 작성한 이 보고서는 김두영 전 비서관이 청와대에 들어갈 무렵에 육영수가 어느 정도의 돈을 갖고 있었는지를 알려준다. 보고서는 "1970년경에는 이후락·김성곤·김형욱이 각각 축적한 개인 재산이 1억 달러에 달한다고 한 청와대 고위급 관리가 주장했다"고 기술한다.

1970년에 보도된 환율 고시에 따르면, 외국환은행이 고객에게 매도하는 금액을 기준으로 할 때 1월 7일의 원·달러 환율은 305원 60전이고, 11월 20일의 환율은 316원 10전이었다. 이런 시세를 감안하면, 위의 1억 달러는 원화 300억 원 정도였다. 1970년에 비싼 짜장면이 100원이었으므로, 여기에 70이나 80을 곱해야 이후락·김성곤·김형욱 각각의 비자금이 현재 가치로 환산된다.

그런데 이들이 자신만의 몫을 갖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프레이저 보고서>는 "본 소위 청문회에서 선서를 거친 증언에서 김형욱은 김성곤이 걷은 정치자금들 가운데 75만 달러를 개인적 용도로 보관했다고 진술했다"고 한 뒤 이렇게 기술한다.

"그가 더 증언하기를, 박 대통령과 박의 부인, 정일권, 이후락, 박종규 등의 개인적 이익을 위해 비슷하게 제공된 자금들도 김성곤이 보관했다고 증언했다."

"박의 부인"에게도 제공됐다는 "비슷하게 제공된 자금"의 의미가 명확하지 않다. 김성곤이 별도 보관한 75만 달러와 비슷한 액수였다는 건지, 박정희·정일권 등에게 제공된 것과 비슷한 액수였다는 건지 불명확하다.

전자의 의미라면 <프레이저 보고서> 상의 육영수 비자금은 1970년 환율 기준으로 2억 2500만 원이다. 물가 변동을 감안하면 여기에 70~80배를 곱해야 현재 가치가 나온다. 후자의 의미라면, 비자금 액수는 훨씬 커질 수 있다. 어느 경우든, 김두영 전 비서관이 봤다는 매달 20만 원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액수다.

그런 비자금은 <중앙일보>가 보도한 특활비 장부에 당연히 기록돼 있지 않다. 그러므로 "육 여사를 모르는 젊은이들에게 좋은 교훈"이 되도록 하기 위해 특활비 장부를 박정희대통령기념관에 전시하고자 한다면, <프레이저 보고서>의 위 대목도 함께 전시돼야 마땅하다. 그래야 "육 여사를 모르는 젊은이들"이 육영수의 참모습을 정확히 이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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