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정진동을 아십니까. 농촌선교(1958~1971)에서 도시산업선교(1971~2004) 활동까지, 정진동은 충북 지역 민주화운동의 어른이었습니다. 정진동의 발자취를 따라가면서 그가 꿈꿨던 공동체 사회, 민주주의와 인권의 소중함, 민중해방의 사상을 살펴봅니다.[편집자말]
'댕댕댕' 교회 종소리에 정진동은 심장이 쿵쾅거렸다. 엎어지면 코 닿을 격에 있는 호죽교회에서 30분 뒤에 '3일 예배'를 본다는 신호에 정신이 어질했다. 당시 시골에서는 수요예배를 3일 예배로 불렀다.

마음은 콩밭(교회)에 가 있지만, 현실은 방에서 새끼를 꼬고 있는 아버지에게 가 있었다. 아버지가 당신의 아내와 자식들이 교회 가는 것을 끔찍이 싫어했기 때문이다. 교회 가다가 아버지한테 걸리기만 하면 그날은 집안에 먹구름이 끼는 날이었다.

그런데 정진동이 마당에서 장작을 나르는 그날따라 아버지는 일찌감치 단칸방에서 새끼를 꼬고 있었다. 그렇기에 자꾸 장작을 든 손에 힘이 빠졌다. '세상에서 교회가 가장 재미있고 좋은데, 아버지는 왜 교회를 못 가게 하는 걸까'라는 생각을 하며 정진동의 눈빛과 귀는 방을 향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방에서 아무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는 깨금발을 하고 방문 가까이 갔다. 혀에 손을 갖다 대었다. 침을 묻혀 문종이에 작은 구멍을 냈다. 아버지가 새끼를 꼬다가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초저녁이었지만 낮의 고된 노동에 눈꺼풀이 천근만근이 된 것이다.

부엌에서 밤 지새

생가 가난이 물씬 풍기는 정진동 생가
생가가난이 물씬 풍기는 정진동 생가 ⓒ 청주도시산업선교회

고된 노동에 지친 아버지가 안 됐다는 생각은 잠시. 정진동은 '이때다'라며 환호작약했다. 나르던 장작을 갈무리하고 교회로 횅하니 달려갔다. 예배당 문을 열자 제일 먼저 어머니와 여동생들이 눈에 들어왔다. 1시간의 예배는 순식간에 지나갔다.

예배 시간 내내 밝아졌던 얼굴이 교회 문을 나서자 흑빛이 됐다. 어머니가 앞장서고 정진동과 여동생들이 그 뒤를 이었다. 집에서 나올 때 남편이 졸고 있었다는 아들의 말에 작으나마 안심을 했던 임순예는 조심해서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하지만 문은 꿈쩍하지 않았다. 안에서 잠근 것이다.

"여보. 문 좀 열어 주세요" "..." 묵묵부답이었다. 두세 번 반복한 후 임순예는 이내 포기했다. 남편의 성격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녀는 아이들을 데리고 부엌으로 갔다. 아궁이 앞에서 두 딸을 껴안았다. 어머니와 여동생을 물끄러미 쳐다보는 정진동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렇다고 아버지에게 항의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아무리 아궁이 앞이라지만 초겨울 매서운 날씨에 밤을 지새는 일은 끔찍한 일이었다. 정진동이 어머니와 여동생과 함께 부엌 아궁이 앞에서 밤을 지샌 것은 1940년대 초반이었다.

1988년 청주 택시 파업 때 노동자들의 희망으로 떠올랐던 정진동 목사는 왜 어린 시절 교회를 마음 편히 못 갔을까? 아버지 정영모가 특별히 보수적이어서 그랬을까? 그렇지는 않다. 정영모는 당시 보통의 조선사람이었다. 그냥 조상들 잘 모시고 가족끼리 사랑하며 지내길 바랬던 평범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아내와 자식들이 교회를 나가자 자신의 뿌리가 흔들리는 듯했다.

머슴 생활을 하다가 나이 34세가 돼 결혼한 그가 아들 정진동의 우렁찬 울음소리를 들은 것은 1933년 12월 26일. 하늘을 날 것 같은 기쁨은 아기가 고추를 달았기 때문이다. 동래 정씨 31대손인 6대 독자(獨子)의 탄생이었다.

그제야 조상들에게 면목이 섰다. 자신의 제사를 지내 줄 자식이 생겼다는 기쁨도 함께였다. 그런데 그런 귀한 자식이 교회를 나가니, 제삿밥 얻어먹기는 애초에 글렀다고 생각하니 열불이 났다.

머슴

6대 독자 정진동이 어린 시절 찬밥 신세였던 것은 단순히 교회를 나가서만이 아니었다. 집에 먹을 것이 없기 때문이었다. 오랜 기간 남의 집 머슴살이를 한 정영모 집에서는 아침 식사 후에는 점심 겸 저녁을 죽으로 연명해야 했다. 아사 직전의 가난 상태는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기, 1950년대까지 이어졌다.

그런 집안에서 장남으로 태어난 정진동의 삶은 허기진 생활의 연속이었다. 당시 정진동의 봄 아침 일과를 살펴보자. 해뜨기 전 이른 아침에 두엄(거름) 두 짐을 지고 논에 펴야만 했다. 두엄이 없으면 마을을 다니며 개똥 한 망태기를 주워 와야 했다. 이러지 않고서는 그날 아침을 먹을 수 없었다. 아침을 먹은 후에는 풀을 베어 퇴비장에 차곡차곡 쌓았다.

농사는 1년 내내 쉴 틈이 없었다. 모내기부터 논매기, 피사리, 쇠(소)풀 베기, 벼 베기 등이다. 허리가 펴질 날이 없는 것이다. 농한기라 불린 겨울이라고 한가하지는 않았다. 장농 깊이 넣어뒀던 무명 솜바지를 꺼내 입고 지게를 메고 산으로 향했다. 장작에 쓸 나무를 구하기 위해서였다.

찬바람이 휘날리는 날 나무를 하면 꽁꽁 얼은 손은 얼어 터져 피가 나기 일쑤였다. 나무와 가시에 긁히는 것도 다반사였다. 까마귀손에 피범벅 된 형국이었다. 장갑을 낀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시절이었다.

그렇게 한겨울 식전에 나무를 해다가 일부는 집에서 취사용과 난방용으로 썼지만 대다수는 오일장에 내다가 팔아야 했다. 저녁에는 아버지와 함께 가마니와 짚신 짜기를 했다. 그때가 겨우 정진동의 나이 12세였다. 이 고역은 18세까지 이어졌다. 이런 이유로 정진동은 17세에 일 년 동안 남의 집 머슴을 하기도 했다. 대(代)를 이어 머슴살이를 한 것이다.

그의 젊은 시절 소처럼 묵묵하면서도 열심히 일했던 모습을 증언한 이가 있다. 박응순(1935년생)은 정진동이 "동네에서 말 잘 듣고, 일 잘하고, 머리 좋기로 소문난 청년이었다"고 기억한다.

정진동의 어린 시절 한국 사람 대부분은 굶기를 밥 먹듯이 했다. 그렇지만 정진동과 그가 살았던 충북 청원군(현재의 청주시) 옥산면 호죽리 도람말은 특히나 그랬다. 너무 가난해 맨 간장에 꽁보리밥만 먹어도 "꿀맛이다"라는 소리가 저절로 나왔다. 어쩌다 쌀밥이라도 먹게 되면 뺏어 먹을 사람이 없어도 뒷광에 숨어서 먹었다고 한다. 당시 호죽리 꼬맹이들이 부른 노래가 당시의 가난했던 상황을 알 수 있게 해 준다.

"갱골에서 개를 잡아 / 도람말에서 돌돌 궈서 / 한천동에서 한 첨 두 첨."

위 노래에 나오는 갱골, 도람말, 한천동은 호죽리의 자연마을이다. 개를 잡아 구어서 실컷 먹고 싶다는 마음을 노래로 표현한 것이다.

성경 암기

호죽교회 정진동이 어린 시절 다녔던 호죽교회
호죽교회정진동이 어린 시절 다녔던 호죽교회 ⓒ 청주도시산업선교회

"하늘천 따지 검을현 누를황 집우 집주~" 10대 초반의 정진동은 나무를 하러 가다 말고 마을 서당에서 천자문을 외는 아이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훈장 앞에서 무릎 꿇고 앉아 있는 아이들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서당도 마음 편히 다닐 수 없는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니 마냥 우울하기만 했다. 그런 생각도 잠시, 그는 아이들이 소리 내어 외는 천자문을 입속으로 따라 했다. 그렇게 어깨너머로 천자문과 명심보감, 동몽선습을 뗐다.

학교 근처라고는 가좌국민학교 2학년에 들어가 4학년에 중도 하차한 것이 전부였다. 매달 내야 하는 수업료 월사금(月謝金)을 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친구들이 가방을 메고 학교 가는 모습을 멀뚱히 지켜보는 그의 속은 말이 아니었다.

배움에 대한 열정은 무한대로 샘솟았다. 이 뜨거운 열정을 식힐 수 있는 방법이 생각났다. 어릴 때부터 다녔던 교회에 그 해답이 있었다. 성경 암기였다. 사실 정진동이 한글을 익힌 것도 성경을 통해서였다. 신약성서의 여러 구절을 통째로 암기했다.

하지만 어깨너머로 배우는 한자와 성경 암기를 통해 배우는 한글 지식만으로는 그의 배움에 대한 욕구를 채울 수 없었다. 뒤늦게라도 정규학교를 다닌다는 것은 언감생심이었다. 어쨌든 체계적인 교육을 받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했다. 고민 끝에 정진동은 송아지를 사서 학자금을 마련해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송아지를 사기 위해서 가마니를 짜 장(오일장)에 내다 팔기로 했다. 어차피 가마니 짜기는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진순과 검예는 오빠와 함께 기나긴 겨울밤에 가마니를 짜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의욕적으로 시작했지만 두 여동생은 쉽게 지쳤다.

한겨울이라 하더라도 낮에 종일 일을 하고 밤에 가마니를 짜려니 당연한 일이었다. 꾸벅꾸벅 졸고 있는 여동생들을 보며 안쓰러운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혼자 해서는 진척이 없는 법이다. 정진동은 꾀를 냈다. "얘들아. 노래 부르자"며 자작곡한 노래를 선창했다.

"가마니 한 개가 나올 때마다 / 송아지 뒷다리 나왔다 / 송아지 앞다리 나왔다 / 송아지 한 마리 나왔다"

진순과 검예는 가사를 생각하며 깔깔댔다 가마니를 짤 때마다 송아지 뒷다리 하나가 나오고, 뒷다리가 나오고, 결국 송아지 한 마리가 나오는 것이다. 가마니를 짜 경제적 형편이 얼마나 펴졌는지는 모르지만 정진동의 학업에 대한 열정은 점점 더 커져만 갔다.

그러다 꿈이 현실이 되는 일이 벌어졌다. 청주에 있던 양관에 선교사들이 설립한 성경고등학교에 입학공고가 난 것. 아버지가 알면 분명 반대할 것 같아 몰래 지원했다. 시험 결과 합격이었다. 하늘을 날 것 같은 기분은 잠시, 입학금과 수업료가 걱정이었다. 주말과 여름방학과 겨울방학에는 죽어라 나무를 하고 짚신과 가마니를 짜 시장에 내다 팔았다. 그렇게 해서 만 3년간의 학업을 마치고 1953년 12월 15일 충북노회서 운영한 고등성경학교 제2회 졸업생이 됐다.

어머니의 자라목

정진동이 어린 시절 굶기를 밥 먹듯이 하고 짚신과 가마니를 짜 고등성경학교 월사금을 냈다면 그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더욱 고된 노동으로 하루하루를 보냈다.

어머니 임순예는 방물장사를 했다. 머리에 인 광주리에는 거울, 빗, 바느질 용품부터 화장품 등 생활필수품이 가득했다. 그런데 그녀는 거기에다 사기그릇까지 넣고 다녔다. 물건을 팔고 대금으로는 쌀과 보리, 잡곡으로 받았다. 그러다 보니 종일 머리에 무거운 물품을 이고 다녔다. 그 결과 자라목이 됐다.

아버지 정영모(1896년)의 삶도 녹록치 않았다. 정영모가 세상을 구경한 지 며칠 만에 손이 하나 없던 장애인 어머니(정진동의 할머니)가 세상을 떴다. 시각장애인으로 점쟁이 생활을 한 아버지 정인학(정진동의 할아버지)도 두 살 때 저세상 사람이 됐다.

그는 8세까지 수양어머니 집에서 컸고 16세까지는 남의 집 소를 돌보며 자랐다. 그 후 노동판을 전전하다가 고향인 옥산면 호죽리로 돌아와 머슴살이를 했다. 34세에 17살 임순예를 만나 장남 정진동을 낳은 것이다. 정영모는 남에게 싫은 소리, 험한 소리를 못하는 이였다. 남의 집 일을 해주고 품삯을 못 받아오는 날이면 아들 정진동에게 대신 받아오라고 시켰다. 그러면 아들 정진동은 혼자 가지 못하고 큰여동생 정진순을 데리고 갔다.

그 역시 아버지의 성격을 본받아서인지 "돈 주세요"라는 말을 못했다. 대신 여동생의 옆구리를 찔렀다. 정진동은 그만큼 내성적이고 순진한 청소년이었다.

청주 성경고등학교 졸업식 청주 성경고등학교 졸업식. 1953년
청주 성경고등학교 졸업식청주 성경고등학교 졸업식. 1953년 ⓒ 청주성서신학원 총동문회


#호죽교회#머슴#자라목#부엌#성경암기
댓글2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