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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완도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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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지역의 도서지역을 돌아다니면서 많은 나무를 보았는데 어떤 마을이던지 방풍림은 소나무아니면 후박나무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반면에 마을의 사장나무는 대부분이 팽나무나 느티나무다. 완도읍에는 용암(龍岩)마을이 있다. 비석산의 바위가 마치 용이 춤을 추듯 해안을 따라 길게 늘어져 용암마을이라 이름 한 이 마을은 바다와 근접한 마을로 1960년대까지 마을 바로 앞이 바다였으나 매립으로 지금은 바다와 떨어져있다.

1893(고종 30년)년 정월 227대 가리포첨사로 부임하는 첨사 명선욱(明瑄煜)은 눈발이 휘날리고 차가운 북풍이 몰아치는 용암마을에 들어서며 먼발치에서 가리포진(加里浦鎭)의 객사(客舍)를 바라보았다. ″음 어렵게 살아가는 섬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려 선정을 베풀고 가야겠구나.″ 홀로 속으로 마음을 다잡은 명선욱은 ″여기 바다가 바로 앞이어서 사람들이 살기가 좋아 보이는데 마을 이름이 뭔가?″ ″네 나으리 '비석거리'라 하옵니다, 예로부터 선정을 베푼 첨사들의 송덕비나 선정비가 저기에 저렇게 세워져 있습니다.″ 마중을 나온 관속이 아뢰자 명선욱은 더욱 더 선정을 베풀 것을 마음 굳게 다지며 가리포진의 객사로 발걸음을 옮겼다. 

완도공원에 남아있는 철비(鐵碑) 주인공 명선욱 첨사의 부임기(赴任記)를 재구성하여 보았다. 

용암마을의 또 다른 이름은 비석(碑石)거리 또는 비석지(碑石地)로 불린다. 두 가지 설이 있는데 하나는 완도읍이 가리포진이던 조선시대에는 부임하는 첨사들이 모두 이 길을 통해서 가리포진에 부임했기 때문에 첨사들의 공덕을 기리는 송덕비나 선정비를 이곳에 입비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러한 비는 지금 하나도 남아있지 않고 이름으로만 비석거리라 전하고 있다. 다른 하나는 용암마을의 뒷산은 비석산으로 오늘날의 용암마을 '팽나무'부터 인공폭포까지 커다란 암장(岩場)이 펼쳐지는데 여기에 새(鳥)들이 앉아 있다 나는 모습을 보고 비석(飛石)거리라 했다는 설이 있으나 전체적인 내용으로 볼 때 전자가 맞지 않은가 생각한다. 용암마을에는 '포구나무'라 부르는 수령을 알 수 없는 팽나무 한그루가 있다. '포구나무'라는 이유는 여기저기 섬으로 드나드는 배가 정박하는 포구 바로 옆에 심어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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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팽나무는 봄부터 가을까지 용암마을 주민들의 사랑방이다. 수고는 8m정도로 높지 않으나 근원에서 바로 여섯가지가 뻗어 올라 전체적인 수형을 이루고 있다. 그래서 팽나무의 흉고둘레를 말하기도 어렵다, 수령은 더더욱 알 수가 없다. 

이 팽나무는 굉장히 열악한 여건에서 자라고 있는데 이 이유는 나무가 자라고 있는 한쪽면이 완전히 절벽이다. 예전에는 바닷물이 넙실거렸던 곳이다, 그런 곳에서 근근이 자라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지금은 차량의 통행이 많이 없는 편이지만 1960년대에는 완도읍에서 원동으로 가는 마이크로버스가 이곳으로 다녔다고 한다, 그 버스가 다니던 흙길이 콘크리트로 포장되고 다시 아스콘으로 덧 씌어져 나무에게 필요한 물 공급이 굉장히 어렵게 됐다. 그래도 신록을 자랑하며 용암마을 주민들의 사랑방 구실을 하고 있으니 신기 할 따름이다.

원래 이 팽나무는 주도(珠島) 가 고향이라고 한다. 구전되어 오는 이야기는 이러하다. 원래 주도는 완도읍의 용신제를 지내는 당터였다. 정상에는 용신당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 신사를 세우면서 용신당이 파괴되고 지금은 터만이 남아있다. 그래서 매우 신성시 한 곳이었는데 아주 오래 전 어느날 비석거리 아이들이 주도에 들어가 팽나무 두 그루를 캐 왔다고 한다. 그런데 신성시하는 당에서 나무를 케오니 마을에서는 난리가 났는데 버리느니 주도가 잘 보이는 길가에 심자는 의견이 많아 팽나무 두 그루를 한 쌍으로 마을 앞에 심었다고 한다, 그리고 주민들의 보호로 오늘날까지 자라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포구나무의 북쪽에 심어진 팽나무는 누군가에 의해 훼손되서 죽었다고 한다.

주이규(79. 용암리 노인회장, 사진)의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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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애릴때는 주도를 수시로 드나들었어요, 숲에서 땟밤도 줍고, 개포(썰물 때 드러나는 바다)에는 갯것을 하로 다녔어요, 그때는 완도항이 지금 같지 않아서 물이 많이 나먼 주도를 걸어서 가요, 그래서 어른들이 걸어댕기기 좋게 바닥에다 통나무를 깔아놨어요. 물이 많이 날 때 그 통나무 길을 따라서 땟밤도 줍고 갯것을 하로 댕겠죠, 또 물이 많이 들때는 옷을 벗어서 머리에 이고 헤엄쳐서 주도로 가서 옷을 입고 놀다가 또 다시 옷을 벗어서 머리에 이고 요 앞으로 헤엄쳐서 오고 이 나무가 우리들한테 일종의 좌표였어요.″ 

″여그 팽나무는 우리마을의 보물이어요, 60년전에도 꼭 이만했던 것 같은디 지금도 그때하고 똑 같은 것 같으요, 항상 시원한 바람이 불고 여름이먼 그늘이 그라고 좋아서 에어콘이 필요 없는 곳이 여그여요. 지금은 매립이 많이 되불었는디 옛날에는 요 앞까지 물이 출렁대요, 팽나무 아래 팬상에서 카만히 앙거있으먼 배가 왔다갔다하제 시원한 바람이 불제 사람들이 그래요 여그가 천국이라고, 완도읍 사람들이 여름이먼 다 여그로 오고 싶어 했어, 그때는 먹고 살기 어려웠제만 이웃간에 관심도 많고 정이 많에서 머시 쬐간만 있어도 여그서 나눠묵고 그랬는디 지금은 사람도 많이 떠나고 그래도 아직까지 우리마을은 도시화가 안되고 정이 많이 남어 있는 곳이요.″  

″옛날에는 여그가 완도읍의 중심이었어, 광주를 갈라먼 쬐간한 버스를 타고 요 앞으로 지나 댕겠어, 완도서 원동을 가 그라고 거그서 종선을 타고 또 달도로 갔다가 외지로 나갔어"

"그때는 여그가 일반인들이 묵고살기 좋은 곳이었어, 여그 선창에서 하역작업이 많앴거 등, 미역공장도 겁나게 많앴어, 그랑께 인부가 많이 필요해 수시로 사람이 필요한께 남자들은 일이 많고, 1960년대에 요 앞까지 바닷물이 출렁인디 애기들은 여그서 깨벗고 바다에서 놀고 그랬어, 그라다 1970년대 바다를 매립해서 집짓고 저그가 『갈매기상회』라고 유명한 잡화점이 있었어 완도사람들은 거그서 잡화를 다 구입해 그 앞까정 바다였당께, 그랑께 여 팽나무 아래서 시원하게 신선놀음을 하고 있으먼 완도가 돌아가는 것을 대충알어.″ 


용암마을은 지난 2019 ∼2020년 문화체육관광부가 주관한 도시재생 사업의 일환으로 '공공디자인으로 행복한 공간만들기'마을로 선정되어 사업을 추진하였다. 

3년째 용암마을 이장을 하고 있는 김유솔 이장은 전국에서 가장 어린 여성이장이다. 20대의 패기로 마을의 이모저모를 살피고 있다. 지금은 마을 주민의 평균 연령이 67세이지만 공공디자인이 마을을 바꾸고 있고 '포구나무'라 불리는 팽나무 일원에도 주민들과 오고가는 길손들이 쉬어갈 수 있도록 데크를 깔고 테이블을 설치하여 누구나 편히 쉬어갈 수 있게 만들어 놓았다.

수분 공급이 어려운 언덕바지에서 고군분투하는 '포구나무'는 몇 군데 외과수술을 받았다. 그러나 용암마을 주민들의 영원한 사랑방이 되기를 기원하며 펜을 놓는다.

덧붙이는 글 | 필자는 다도해해양문화연구원 원장입니다. 이 기사는 완도신문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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