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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임 후 시골살이를 선택한 것은 지금까지 삶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싶었기 때문이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결과에서 오는 기쁨과 행복 그리고 의미를 찾는 삶에서 멀어지고 싶었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순간순간 몸으로 느끼는 기쁨과 행복에 스며들어 가는 삶을 살고 싶었다.

'마지막에 웃는 자가 최후의 승자이다'라는 말이 있다. 중간중간 작은 성공과 실패에 일희일비 하지 말고, 마지막에 웃을 수 있도록 끝까지 최선을 다하라는 뜻일 것이다.

이때 웃음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누구와의 경쟁에서 최종 승리했다는 것이다. 또는 참고 견디며 피와 땀의 대가로 최종 목표에 도달했다는 것이다. 그때 호쾌한 웃음으로 자신의 대견함을, 위대함을 마음껏 누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웃음의 시간은 어느 정도일까? 또다시 누군가가 나타나지 않을까? 또 다른 목표에 피와 땀을 흘러야 하지 않을까?

나 또한 지난 시간을 돌이켜보면 웃었을 수 있을 때도 많았다. 임용 시험에 합격했을 때, 교사로 받을 수 있는 영광의 상(제1회 참교육 실천 사례 및 교육 자료 공모전에서 수업 부분에서 최우수상)을 받았을 때, 아내로부터 결혼 승낙을 얻었을 때, 우리 아이가 태어났을 때 등등. 그 순간에 나는 마치 이제 내 세상을 가진 듯 호쾌하게 웃었다. 더 이상 세상에 바랄 것이 없었다. 하지만 그 웃음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이제 인생 3막에 들어섰다(1막은 부모 아래 있는 시기. 2막은 경제적으로 자립한 시기. 3막은 퇴임한 시기). 다른 사람과 견주려 해도 또 다른 목표에 이르려 하여도 이제 지혜와 힘도 많이 쇠잔하였다.

이제 호쾌한 웃음이 아닌 저절로 입가에 감도는 웃음으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싶다. 누구와 견주는 데서 오는 웃음이 아닌, 어떤 결과의 성취에서 나오는 웃음이 아닌 그저 혼자 살며시 웃을 수 있는, 그래, 그래, 하며 스스로 받아들이는 삶을 살고 싶었다. 이런 생각에 이르게 한 것이 김수영의 '풀'이다.
  
생각 날 때마다 찾아 읽는 시를 책장 한 곳에 모아 놓았다.
▲ 김수영 전집 생각 날 때마다 찾아 읽는 시를 책장 한 곳에 모아 놓았다.
ⓒ 정호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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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의 시를 석사학위 논문으로 썼다. 부끄러운 고백인데 김수영의 시를 제대로 읽어내는 능력이 많이 모자랐다. 나의 지적 한계가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었다. 특히 마음 걸린 작품이 김수영의 '풀'이다. '풀'의 마지막 구절인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를 읽어내지 못했다. 이 구절이 마치 없는 듯 '풀'을 해석했다.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 김수영, '풀'


이 시는 '풀'과 '바람'이 서로 맞서고 있다. 하지만 서로 대등하게 맞서고 있지는 않다. '바람'은 '풀'을 일방적으로 제압하는 힘 센 존재이다. 풀은 바람에 자기 존재를 지금까지 부정당해 왔다. 스스로 눕는 것이 아니라 바람에 의해 누워야만 했다. 그래서 서럽다. 서러워 울었다.

풀이 자기의 존재를 회복하려면 일어나야 한다. 어떻게 일어날 수 있을까? 풀은 바람보다 더 빨리 눕고 운다. 지금까지 풀은 수동적 존재였는데 이제 능동적인 존재로 변했다.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할 때 일어설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아직 멀었다. 일어났지만 아직은 바람의 힘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풀은 일어났지만 울고 있다. 언제쯤 웃을 수 있을까?

웃기 위해서 풀은 바람과 발목까지, 발밑까지 누우며 바람과 맞서고 있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 풀의 모습을 상상하여 보라. 풀이 바람에 어느 정도 치열하게 맞서고 있는지 알 수 있다. 그 결과 풀은 마침내 웃는다. 풀이 바람을 이겨낸 것이다.

이 시가 여기서 끝났음은 좋았다. 전문가들도 여기서 시 읽기를 마치고 있는 듯하다. 풀은 약한 존재이지만 결코 약한 존재가 아니다. 바람과 치열하게 맞서 결국 승리하여 웃을 수 있는 존재로 읽고 있다. 또는 바람의 힘을 끝까지 견뎌내는 끈질긴 생명력을 가진 존재로 읽고 있다. 시인이 풀을 통하여 말하고 하는 바는 이것을 넘어서고 있는 듯하다.

마지막 한 구절이 더 남아 있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이 구절을 어떻게 읽어야 하나.

'풀뿌리'가 눕는 것을 '바람'의 강도가 더욱 거칠어졌음을, 민중들의 고통이 계속 이어질 것임을, 다시 억압을 뚫고 저항하는 행위로 읽기도 한다. 이미 웃었는데 또 바람과 맞서야 하나. 그러면 풀의 삶이 너무 고달프지 않나?

이 구절을 온전히 읽기 위해서는 이 시의 짜임을 살펴보아야 한다. 이 시는 첫 구절을 '풀이 눕는다'로 시작하고 마지막 구절은 '풀이 눕는다', '풀이 일어난다', '풀이 웃는다'로 끝맺고 있다. 각 도막에서 풀은 앞선 도막과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 시의 흐름을 보면 풀은 눕고, 우는 존재에서 일어나고, 웃는 존재로 변화하는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이러한 변화는 우연히 얻어진 것은 아니다. 그 대가를 치르고서야 얻어진 결과임을 알아야 한다.

첫째 도막에서는 풀은 바람에 의해, 둘째 도막에서 풀은 바람보다 더 빨리 눕고, 울고, 셋째 도막에서는 풀은 발목 발밑까지 눕는다. 이렇게 보면 이 시는 네 개의 도막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넷째 도막의 첫 구절은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이다.

넷째 도막에서 풀은 뿌리까지 눕는다. 자신의 존재를 걸었다. 그러면 넷째 도막의 마무리는 어떻게 될까? 웃음을 넘어서는 것이 와야 한다. 웃음 이상은 무엇일까? 왜 이렇게까지 하여야 할까?

풀은 바람과 맞서 이미 웃었다. 그렇다고 풀은 자기 존재를 완전히 찾은 것은 아니다. 겨우 바람에서 벗어난 존재일 뿐이다. 이제 관계에 의한 자기의 존재가 아닌 스스로 존재를 찾기 위해 자기 존재를 걸은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쉽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예감할 수 있다. 주변의 상황도 만만하지 않다. '날이 흐리다'가 이를 암시하고 있다.
 
시작(詩作)는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고 '심장'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몸'으로 하는 것이다.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온몸으로 동시에 밀고 나가는 것이다. (김수영 전집2. 498쪽).

 
풀은 도의 최고 경지인 무위의 도에 나아가기 위해 자기 존재를 걸은 것은 아닐까? 하지만 그 결과는 장담할 수 없다. 시인은 그렇기에 넷째 도막의 첫 구절을 셋째 도막의 마지막에 붙여 놓은 것은 아닐까?

나의 시골살이도 이런 마음으로 시작하였다. 누구와의 관계에서 나의 존재를 찾고 웃음과 행복을 찾는 것에서 벗어나, 하고 싶은 것을 그냥 하는 삶을 살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은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나의 뿌리를 걸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 또한 온몸으로 시골살이하고 있다.

태그:#시골살이, #김수영, #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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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과 함께 배우고 가르치는 행복에서 물러나 시골 살이하면서 자연에서 느끼고 배우며 그리고 깨닫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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