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1998년 3월, IMF 한파에 따른 실직자들을 위해 마련된 서울시립 정독도서관 취업도움방에서 구직자들이 취업관련자료를 찾아보고 있다.
▲ 시립도서관 취업 도움방 취업 정보 검색_정독도서관 1998년 3월, IMF 한파에 따른 실직자들을 위해 마련된 서울시립 정독도서관 취업도움방에서 구직자들이 취업관련자료를 찾아보고 있다.
ⓒ 연합뉴스

관련사진보기

 
1997년 겨울은 나라 안팎의 한국 사람들에게 매우 혹독했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날씨가 다른 해보다 더 추웠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돈 가뭄 탓에 생고생했던 기억은 선명합니다. 그때 저는 <한겨레> 기자 신분으로, 일본의 한 대학에서 연수를 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한국에는 이른바 '아이엠에프(IMF) 사태'로 불리는 금융위기가 터졌고, 그로 인한 쓰나미가 일본에 있는 한국 유학생들까지 덮쳤습니다. 하루가 다르게 치솟는 환율 탓에 한국에서 송금받는 돈으로는 학업은커녕 생활하기조차 힘든 상황에 몰렸습니다. 한 언론재단으로부터 엔화 기준으로 지원금을 받았던 저는 그나마 형편이 나았지만, 집에서 보내주는 돈으로 생활해야 했던 주위의 많은 유학생들은 학업을 포기하고 귀국길에 올랐습니다. 한국 학생들로 북적대던 어학교실은 금세 썰렁한 공간으로 변했습니다. 나라 경제가 망하면 그 나라 국민이 얼마나 비루해지는가를 온몸으로 경험했습니다.

일본의 야마이치증권 파산과 '도쿄대 병'

한국처럼 '국가 부도' 사태까지 가지는 아니었지만, 일본도 금융위기를 피해 갈 수 없었습니다. 대표적인 사건이 일본의 4대 증권회사 중 하나였던 야마이치증권의 파산입니다. 야마이치증권은 부동산 거품 붕괴의 여파로 생긴 부실채권 폭증을 견디지 못하고 창업한 지 100년 만인 1997년 스스로 문을 닫았습니다. 그해 11월 24일, 폐업을 알리는 기자회견에 나선 노자와 쇼헤이 사장은 90도 인사와 함께 "사원들은 죄가 없습니다. 제 책임입니다. 제발 그들이 길거리를 헤매지 않게 해주십시오"라고 울부짖었습니다. 저도 텔레비전을 통해 그 회견을 보면서 울컥했습니다. 노자와 사장의 눈물 회견은 지금도 1997년 일본을 강타했던 금융위기를 상징하는 극적인 장면으로 소환되곤 합니다.

하지만 노자와 사장의 눈물 호소에도 불구하고 7500명에 이르는 사원 전원이 실직했고, 이들은 각자도생을 위해 몸부림을 쳤습니다. 이때 제가 일본 잡지에서 읽었던 기사가 사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머릿속에 생생하게 남아 있습니다.

명문 증권사답게 이 회사에는 일본 최고 명문대인 도쿄대 출신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도쿄대 출신의 실직자들이 재취업을 하려고 당시 일본에 진출해 있던 외국계 증권사의 문을 두드렸습니다. 외국계 회사의 인사 담당자는 면접 때 그들에게 '당신은 무슨 일을 잘하느냐'라고 물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무엇을 잘한다는 얘기는 전혀 하지 않은 채 '나는 도쿄대 출신'이라는 점만 되풀이하며 강조했습니다. 출신보다 능력을 중시하는 외국계 회사는 당연히 그들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이런 내용의 기사를 읽으면서, 저는 도쿄대 병, 엘리트 병이 야마이치증권을 망하게 하고 더 나아가 일본 경제를 망친 주범이 아닌가 하는 강한 의문을 가졌었습니다.

법사위 공방에서 불거져 나온 한국의 '서울대 병'
 
국민의힘 유상범 의원과 송석준 의원이 25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법제사법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정청래 위원장에게 의사진행에 대해 항의하고 있다.
 국민의힘 유상범 의원과 송석준 의원이 25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법제사법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정청래 위원장에게 의사진행에 대해 항의하고 있다.
ⓒ 남소연

관련사진보기

 
최근 한국 국회에서 벌어진 일을 보면서 문득 야마이치증권 도쿄대 출신 직원들의 엘리트 병이 떠올랐습니다. 아니 도쿄대 병보다 더욱 심한 서울대 병을 목도했습니다. 바로 6월 25일 열린 국회 법사위 회의에서 정청래 위원장의 의사진행 방식에 항의하는 유상범 의원에게 정 위원장이 '국회법 공부 좀 하고 오세요'라고 한 데 대해 유 의원이 '공부는 내가 더 잘했다'라고 대응한 장면입니다. "국회법은..."이란 단서를 달았지만, 이를 지켜본 제 입장에선 서울대 출신의 잘난척으로 들렸습니다. 

대다수 미디어가 정 법사위원장과 유 국민의힘 법사위 간사가 조롱과 야유 섞인 설전을 벌였다며, 양비론 관점에서 보도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런 시각의 보도에 전혀 동의할 수 없습니다.

두 의원의 상호 언쟁 중에 나온 발언은 분명하지만, 도긴개긴의 공방 보도로 넘어가기엔 유 의원의 말이 너무 충격적이었습니다. 유 의원이 구체적인 학교 이름까지 거론하지는 않았지만, 그 말속에 서울법대 출신(유 의원)이 비서울대(건국대 공대) 출신(정 위원장)보다 만능이고 우월하다는 오만한 엘리트 의식이 깔려 있었기 때문입니다.

서울법대 나온 유 의원이 건국대 공대 나온 정 위원장보다 국회법도 잘 아는지는 국회법 자격시험이 없으니 확인할 길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가 서울법대라는 간판을 기준으로 사람을 판단하고 재단하는 '서울대 병 중환자'라는 건 확실히 드러났습니다. 서울법대 출신 아니면 다 자신보다 열등하다고 깔보는 사람이, 과연 비서울대 출신이 거의 100%를 차지하고 있는 일반 유권자를 위해 어떤 마음과 자세로 의정활동을 할지 심히 궁금합니다.

한동훈과 '엘리트의 시혜'로서의 정치
 
국민의힘 한동훈 비대위원장이 4월 4일 오후 경기도 수원시 영통구청 부근에서 22대 총선 수원시정 이수정 후보 등 수원지역 후보 지원유세를 하고 있다.
 국민의힘 한동훈 비대위원장이 4월 4일 오후 경기도 수원시 영통구청 부근에서 22대 총선 수원시정 이수정 후보 등 수원지역 후보 지원유세를 하고 있다.
ⓒ 권우성

관련사진보기

 
이왕 엘리트 병 얘기가 나왔으니, 또 하나 지나칠 수 없는 사례가 떠오릅니다. 지난 22대 총선 유세 때,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수원병에 출마한 이수정 경기대 교수의 지지를 호소하면서 불쑥 내뱉은 말입니다.

한 위원장은 "이수정은 여기서 이러지 않아도 얼마든지 잘 먹고 잘사는 사람이다. 이수정이 여러분을 위해서 나왔다"라고 말했습니다. 재산도 많고 좋은 직업도 가지고 있는데 굳이 안 해도 될 희생을 하며 가엾은 유권자들을 위해 출마했으니 그를 찍어주지 않으면 여러분이 손해라는 뜻입니다. 그 말을 들으며 이수정 대신 한동훈으로 이름을 바꿔도 전혀 이상하게 들리지 않을 선민의식의 발로라고 생각한 사람이 저 혼자만은 아니었을 겁니다. 저는 지금도 지난 총선에서 나온 수많은 망언 중 한 위원장의 이 발언이 최고의 망언이라고 생각합니다. 유권자의 심부름을 하겠다고 나선 정치인이 절대 가져서는 안 되는 정치관이기 때문입니다.

한 위원장은 총선 패배 이후 잠시 전면에서 물러섰다가 최근 국민의힘 대표 선거에 출마하겠다고 나섰습니다. 그가 집에서 쉬는 동안 이런 엘리트·특권 의식에 찌든 정치관에서 탈피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건, 그가 '정치는 엘리트의 시혜'라는 선민의식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당 대표는 거머쥘지 모르겠으나 좋은 정치, 다수의 지지를 받는 정치는 할 수 없으리라는 사실입니다.

내용보다 간판을 앞세우는 정치, 위에서 아래로 내리는 시혜의 정치, 소수 기득권의 이익에만 봉사하는 정치는 '반민주·반서민 정치'의 서로 다른 모습입니다. 시대의 흐름과 발전에 역행하는 나쁜 정치입니다.

좋은 정치, 좋은 삶은 스스로 찾고 만드는 것

마침 엘리트 관료의 대표 격인 최상목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지난달 27일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의 '편집인 포럼'에 참석해, 상속세 개편을 세제개편 중 가장 시급한 사안으로 꼽으면서 7월 말 세법 개정안에 반영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서민들은 물가고에 신음하고 중소 상인들은 코로나 때보다 손님이 더 없다고 아우성을 치고 있는 판인데, 그의 귀에는 그들의 신음과 아우성이 전혀 들리지 않는 모양입니다. 서민을 보살피려 하기는커녕 대통령부터 장관까지 '부자 감세'에만 매달리고 있으니, 엘리트도 부자도 아닌 보통 사람들은 그저 복장이 터질 지경입니다.

독립 조사회사 '광수네 복덕방'의 이광수 대표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나라 상속세 최고세율이 50%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의 평균 최고세율 26%보다 높은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1년에 최고세율 50%의 상속세를 내는 사람은 2900명에 불과합니다. 전체 인구의 0.005% 정도입니다. 그런데 윤 정권은 뭘 위해서 그들 극소수의 세금을 내려주려고 하는지 정책 목표는 말하지 않고 두루뭉술하게 감세를 하면 민생이 좋아진다고 눙치고만 있습니다. 이제는 무엇을 위해 왜 부자 감세가 필요한지 사회 구성원들이 나서 치열하게 따져 물어야 합니다."

저는 서울대 병, 엘리트 병에 사로잡힌 채 기득권 이익 지키기에만 골몰하는 이 나라의 집권 세력의 언행을 보면서, 1997년의 혹독한 겨울이 다시 찾아오지 않을까 매우 걱정입니다. 윤석열 정권 들어 더욱 노골적으로 기승을 부리는 서울대 병, 엘리트 병이 망국병으로 도져 큰 화를 불러오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굳게 믿습니다. 좋은 정치와 좋은 삶은 엘리트 병에 걸린 사람들이 내려주는 시혜가 아니라, 나쁜 정치와 나쁜 삶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스스로 찾고 만들어 가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시민언론 <민들레>에도 실립니다.


태그:#서울대병, #선민의식, #금융위기, #부자감세, #도쿄대병
댓글16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5,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한겨레 논설위원실장과 오사카총영사를 지낸 '기자 출신 외교관' '외교관 경험의 저널리스트'로 외교 및 국제 문제 평론가, 미디어 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 한일관계를 비롯한 국제 이슈와 미디어 분야 외에도 정치, 사회, 문화, 스포츠 등 다방면에 관심이 많다. 1인 독립 저널리스트를 자임하며 온라인 공간에 활발하게 글을 쓰고 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