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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신문 보도는 개인 감정을 표현할 수 없는 것은 물론 어떠한 현상을 취급할 때 주관적 입장을 떠나 객관적 입장에서 이를 냉정히 고찰한 후 시비판단을 할 필요가 있으면 이에 사설로써 비판을 가할 것이고, 보도는 솔직히 그 사상의 골자를 일반에게 알린다는 것이다" - 1947.03.12 제주신보 사설
 
76년 전, 이승만 독재에 맞서 민간인 학살의 진실을 기록한 신문이 있다. 당시 제주신보 기자 김용수(20), 이기형(21), 문종옥(20), 고광태(20), 박광훈(20), 박태전(21) 등은 불과 20대 초반 나이였다. 그러나 언론인으로서 이들의 사명감은 우리 세대 언론인에게 여전히 큰 가르침을 준다.

# 제주신보의 탄생
<제주신보>는 <제주민보>로 시작했다. 이전까지 일본 사령부에서 임시 발행했던 신문 제호가 '제주신보'였기 때문에 차별화가 필요했고, '국민이 주권을 갖고 발행하는 민주 매체'라는 뜻을 공고히 하기 위함이었다. <제주민보>는 미군이 제주로 내려와 일본의 항복 조인을 받은 지 3일 후(1945년 10월 1일)에 창간했고, 사장 김진수와 편집국장 백상현 아래 6명의 젊은 기자가 있었다.

초기에는 인쇄소 경영주가 20대 청년들의 신문 발행 취지에 공감해 인쇄비를 받지 않았다. 그럼에도 신문 용지를 구할 수 없어 양면 인쇄가 불가했고, 배달 체계를 갖추지 못해 기자들이 직접 행인에게 신문을 나눠줄 정도로 사정이 열악했다. 창간호를 보면 타블로이드판 5호 단면만 인쇄됐고, 약 2~3백 부만 발간됐다.

1946년 1월 26일 김진수는 미군정 당국에 신문사를 등록함으로써 본격적인 회사 조직을 갖췄다. 이때 제호를 '제주신보'로 바꿨으나, 여전히 경영난에 시달렸다. 이에 황순하, 윤성종, 백찬석, 홍종언, 김석호, 박영훈, 신두방 등 도내 유지 7인이 나서 제주신보사를 법인으로 조직화해 사장에 김석호, 전무에 백찬석을 선임했다. 제주신보는 1947년 1월 1일 법인조직으로 재출범하는 사실을 신년호를 통해 세상에 알렸다.
 
제주신보 창간호다. 기사는 “민족의 역량을 한데 뭉쳐 우선 독립을 하겠다는 데 목표를 둬야할 것이며 극단의 정치이념이 조선의 현 단계에 부합하지 못하다는 점을 벽두 소감으로써 강조한다"고 밝혔다.
 제주신보 창간호다. 기사는 “민족의 역량을 한데 뭉쳐 우선 독립을 하겠다는 데 목표를 둬야할 것이며 극단의 정치이념이 조선의 현 단계에 부합하지 못하다는 점을 벽두 소감으로써 강조한다"고 밝혔다.
ⓒ 김명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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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신보 기사로 본 제주 사회상
<제주신보>는 당시 도민의 삶을 적나라하게 그려냈다. 대흉년과 공출제로 인해 제주 전체가 굶주렸고, 빈민이 늘면서 도둑과 모리배가 들끓었다. 고향 사람들은 먼 길을 돌아온 귀환민을 마냥 반길 수 없었고, 전역에 도진 전염병과 함께 사회도 병들었다. 그러나 도민들은 전란 속에서도 문화 계몽 운동을 통해 배움을 이어갔고, 각종 운동 행사를 개최해 공동체 의미를 되새겼다.

① 인구 유입 증가
광복 이후 제주도는 도민 6만여 명이 외지에서 일시에 귀화하는 특수한 인구 유입 현상이 있었다. 기사에는 인구 급증으로 인해 일어난 과도기적 성격이 잘 나타나 있다. 늘어난 아동 인구를 감당할 수 있는 교육 시설 부재와 취업난 등 생계 악화로 인해 지역 경제가 흔들렸다.
 
"본도로 말하면 귀환동포가 나날이 수가 격증해 총인구 40만을 낳게 된 오늘인 만큼 문화전선의 최선단을 가는 언론기관의 절대적 필요성을 눗기는 동시에 특히 건국 도청에 있어서 정치적 경제적으로 혼란에..." - 1947.1.1. 제주신보

"도승격전 본도의 국민학교는 50교이며 취학아동수가 2만명 정도에 불과하였으나 현재에 국만학교수가 95교이며 취학아동수가 3만 8천여 명에 달하고 있다" - 1947.1.26. 제주신보
 
② 식량난
당시 전국적으로 식량 수급 상황이 좋지 못했다. 흉년이 오래 지속된 탓에 겹쳐, 패망 직전 일본이 자국의 군량 확보를 위해 조선에 식량 공출을 강행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일본군은 자국으로 돌아가기 전에 제주의 재고 식량을 불태우고 갔다.
 
영화 <지슬>의 한 장면. 제주는 당시 먹을거리가 부족해 감자로 연명했다.
 영화 <지슬>의 한 장면. 제주는 당시 먹을거리가 부족해 감자로 연명했다.
ⓒ 영화사 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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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정도 예상하지 못했던 문제가 바로 식량 문제였다. 조선은 대외에 쌀 수출국으로 알려졌는데, 막상 한반도에는 곡식이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더해 갑작스러운 인구 증가로 식량 배급이 원활하지 못했다.
 
"읍내 각 관계관청에서는 공평적절한 배급을 기약하기 위해 부정수배자, 유령가족 부농사 식량 확보자 모리상을 조사하고 식량표를 축소하였음에도..." - 1947.2.8. 제주신보

"생지옥의 도탄에 신음하는 일반 소비대중에 심각한 타격을 주어 기아를 앞에서 인민의 비참한 아우성소리도 높아가고 있음을..." - 1947.2.16. 제주신보 「배급계속 절대 필요! 미곡가격은 천정부지」

"춘궁기에 대한 식량 문제의 완화책으로써 일반노동자 급 경노동자에게 특별배근으로 1인당 1일에 3합 내지 5합 정도로써..." - 1947.2.16. 제주신보
 
③ 전염병 유행
제주 내 호열자(콜레라)와 장질부사(장티푸스) 등 전염병이 유행했다. 당시 4·3 피해자 증언에 따르면 "전염병에 의해 마을 경비가 심했고, 열악한 의료기술 탓에 모두가 전염병을 극히 경계했다"고 한다. 1946년 여름 제주에 닥친 콜레라는 두 달 동안 최소 369명 사상자를 냈다.
 
"작년 호열자의 쓰라린 시련을 받은 본도에 또 다시 무서운 전염병 장질부사가 구좌면 우도에 발생하였다. 현재 위독상태에 있는 사람이 6명이고 용의자가 5,6명이라 하며 방역상 우도와 본도 간에는 교통차단을 하고 있다" - 1947.4.12. 제주신보

"호열자가 발생할 기세가 농후한 요즘 본도 후생각에서 초래하는 호열자 예방에 만전을 기하고자 해 방역대 검역소 등을 설치하고 여행자 급 출입 선박에 대해 검역을 시행하리라 한다" - 1947.5.12. 제주신보
 
④ 공무원의 횡포
일제 경찰들이 미군정 경찰로 전직한 것은 교과서에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가혹 행위에 있어서도 일제 때와 달라진 게 없었다. 4·3진상보고서에는 "부패 경찰들이 밀수품 단속을 빙자해 모리배들과 결탁해 돈벌이를 했다"고 나와 있다. 경찰들의 탄압과 가혹 행위의 수위는 4·3이 극적으로 전개될수록 악독해졌다.
 
"모여청에 베푼 연회석상에서 읍장 김문희씨. 부읍장 문재도씨가 연령이 자기보다 안되는 모고관에게 경어를 쓰지 안했던 것이 그 고관을 크게 노하게 해 일대소란을 야기하였고 당할수 없는 치욕을 당하였다 하니 이 고관의 오만한 태도는 도대체 나온 것이며 그의 반시대적인 머리에는 의심을 아니들 수 없게 하지 않은가?" - 1947.1.6. 제주신보

"애월면 신엄리에서 파견소 경관이 부락민에 폭행을 가하고 애월면장에게 모욕을 준 사건이 있다... '나의 허가없이 부락민은 집합할 수 없다'고 호상발악하여 면민들은 분격을 금치 못하고..." -1947.1.28. 제주신보
 
⑤ 문화 활동
제주신보를 통해 스포츠대회, 포스터 작품전이나 문맹 퇴치 등 문화 계몽 운동이 전개됐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40년대 제주에서도 문화 활동이 활발히 운영됐음을 알려주는 대목이며, 제주사회가 문화 의식 수준을 높이기 위해 노력했다는 사실을 파악할 수 있다.
 
"민주주의의 참뜻을 선양하고 한눈으로 민주주의란 무엇인가를 이해할 수 있는 '포스터'를 중앙군정청 문교부에서 각도의 초급, 고급 중등학교생도 작품으로...." - 1947.06.22. 제주신보 「중등교생 포스터-작품전」

"제주권투회 소년부의 '오-븐깸'으로 시작되어 본 시합은 일률로 3회전으로 5조 잇엇는대 일회일후의 열전을 만장의 관중들로 하여금 손에 땀을 쥐게 하여..." -1946.6.16. 제주신보 「한미교환 권투전」

"가르켜야 한다. 배워야 하겠다. 이것은 8·15해방 직후 전 3천 만 민족의 같은 외침이었으며 조국을 찾는 우리 겨레의..." 1947.1.12 제주신보 「문맹자가 7할이란 자랑 못할 일!」

# 제주4·3 전개 과정을 기록하다
제주신보는 계엄 당국에 점령당하기 전까지 3·1절 기념식 발포사건부터 총파업, 무장대 습격 사건 등 제주4·3의 전개 과정을 상세히 기록했다. 이는 제주 지역의 유일한 언론으로써 제주 사회 흐름을 파악할 수 있는 주요 자료로 지금까지 활용되는 이유다.

① 3·1절 기념식 발포 사건
1947년 3월 1일, 제주민전 주최로 28주년 3·1절 기념식이 열렸다. 이는 3·1정신 계승과 자주독립을 기치로 제주도 내 10개 면에서 열린 대규모 행사다. 그러나 비극은 북국민학교에서 시작된다. 기념식을 마치고 3만여 군중이 가두시위에 들어갔는데, 이때 기마 경관이 탄 말에 어린이가 치이는 일이 발생했다.
 
1947년 3월 8일자 <제주신보> 영인본. 기사는 감찰청의 불허로 진상조사단을 구성하지 못한 데 유감을 밝하고 있다.
 1947년 3월 8일자 <제주신보> 영인본. 기사는 감찰청의 불허로 진상조사단을 구성하지 못한 데 유감을 밝하고 있다.
ⓒ 김명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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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실을 무시하고 지나간 경관에 분노한 군중이 경찰에 돌을 던졌다. 경찰은 이를 폭동으로 판단해 시위대에 총을 겨눴다. 이 과정에서 젖먹이를 안은 여자와 초등학생을 포함해 6명이 사망했다. 주민들은 진상 규명과 발표 경찰 책임규명 등 처벌을 요구했으나, 오히려 경찰은 기관총을 꺼내 들어 위협했다.

미군정은 해당 사건을 '시위대에 의한 경찰 습격사건'으로 정당방위를 인정했으며, 시위 주최자들을 연행해 갔다. 양측 대립이 고조되자 제주신보 기자들이 중재자 역할에 나섰다. 제주신보는 3·1발포 사건의 '진상조사단 조직'을 기사를 통해 알렸다.
 
"3·1기념일의 불의와 참사에 대해 6인의 희생 동포와 그 유가족의 정중한 조의를 표하오며 6인의 중상자 및 5인의 경상자에 대하여 위문의 말씀을 드린다. 우리는 이 사건의 진상을 조사하여 천하에 발표하고자 각계를 망라하여 진상조사단을 조직하려 하였으나 감찰청의 불허로 실현치 못함은 유감천만이다. 그러나 지난 3일 관계자의 주최로 조사단이 구성되어 지금 임무를 수행중인 바 불원 그 결과가 발표될 줄 믿는 바이며, 우리도 조사단의 임무완수에 적극 협력하여 하루바삐 진상이 명백하여지도록 모든 자료를 공급해야 할 것이다. 이 사건은 전국적으로 희유한 참사이므로 우리는 금후 그 책임의 소재를 확실히 해야 할 것으로 믿는다."- 1947.3.8. 제주신보
 
② 제주총파업
경찰의 과잉진압이 알려지자 3월 9일부터 제주도청을 시작으로 민관 총파업이 이뤄졌다. 파업은 행정기관, 학교, 회사, 은행 등 160개 단체와 4만여 명이 참가한 대규모 시위였다. 총 166개 기관 중 95%가 참여했다. 그중 일부 경찰지서도 파업에 동참했다. 중문지서 경찰관은 파업과 관련해 이렇게 말했다. "우리 중문지서 직원 일동은 오늘까지 치안 확보라는 숭고한 정신을 봉직해 왔으나 금번 발포사건을 말미암아 그 희생적 정신은 수포가 됐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그 악독한 명령을 복종할 수 없으므로 직장을 떠난다."

사건의 심각성을 깨달은 조병옥 경무부장은 제주도 치안 상태를 시찰하고자 입도해 북국민학교에서 시국 강연을 하는 등 안전 대책을 마련하고자 했다. 그러나 3월 19일 담화에서는 경찰의 발포를 '치안유지에 입각한 정당방위'라고 인정했다. 이후 조병옥은 "당시 사상이 불온하고 건국에 저해되는 이들을 싹 쓸어버릴 수 있다"며 "제주 전 인구가 20만 밖에 안됐는데 20만 명 다 죽여도 좋단 말이야. 소통하란 말이야 무조건. 제주 놈들 다 죽여도 좋다"라고 말했다.
 
"제주도 전역은 3·1절 불상사 이래 치안에 있어서 악화 일로를 발 뻗침에 제주도 군정청을 위시한 각 관공서 교육, 교통, 각 기관이 총파업의 세를 갖추어 정상 활동의 마비 내지 사회적 무질서에 직면해 있음으로 본관은 중대 결심을 가지고 제주도에 왔던 것이다. 3월 15일까지도 파업의 강고는 물론 집회 행력 및 폭동준비의 실상으로써 치안경찰에 대한 우려는 불선했다.... 바라건데 사회는 경찰과 협력해 법과 질서를 유지하기를. 10월 폭동사건과 제주사건 같은 사회 무질서의 반발은 오로지 국내로는 건국력을 상실케하고 국제적으로는 국민적 위신을 추락케 할 뿐이다" - 1947.3.22. 제주신보 「경무부장 담화발표」
 
③ 양은하 고문 치사 사건
조병옥 경무부장이 제주를 다녀간 이후 경찰의 고문 행위는 극에 달했다. 그중 대표적인 사건이 1948년 3월 14일 모슬포에 사는 청년 '양은하'가 고문에 못 견뎌 사망한 사건이다. 기사는 "양은하가 수감 중에 돌연 급사해 의사가 현장에 출장 검사한 결과 '고환'이 상해서 급사한 것으로 판명했다"고 밝혔다.
 
"대정면 영락리에 거주하는 양은하(27세)란 청년은 포고령 위반 피의로써 모슬포 지서에 검속되어 있던 중 작 14일 아침 4시 돌연 급사하였다는데 이 급보에 의하여 제주 검찰청 청장 및 제주 경찰 감찰청 수사과장 의원 문 의사가 급거 현장에 출장하여 검시한 결과 '고환'이 상해서 급사한 것으로 판명되어 담당 취조 경관 및 2명을 경찰청장 명의로 즉성에 검속하고 방금 엄중 취조 중에 있다 한다." 1948.3.16. 제주신보 「모슬포 지서에 불상사」

"북군 관내에 있어서 일시 맹렬한 검거선풍이 일어나 동요하든 민심이 다소간 안정을 보이고 있는 요즈음 이번은 남군 관내에 또 관공사 직원 등 증거가 확연한 자들을 속속 검거해 역시 검거 선풍을 이루고 있다 하는데 귀추가 주목된다" - 1947.4.22. 제주신보 「검거선풍 남으로」
 
④ 4월 3일 무장대 습격 사건
김달삼을 주축으로 300명 남로당 무장대가 오름마다 피어오른 봉화를 신호로 도내 12개 지서를 공격하고, 우익단체 기관과 서북청년단 숙소를 기습했다. 이 과정에서 경찰 4명, 민간인 8명, 무장대 2명이 사망했다. 정부는 사건 진압을 위해 100명의 응원 경찰을 제주도에 급파하고 비상경비사령부를 설치했다. 당시 사령관으로 김정호 경무부 공안국장이 임명됐다. 김정호는 4월 8일 무장대 소탕전을 전개한다는 포고문을 발표했다.
 
"一. 폭동의 주모자와 직접 행동으로 범죄를 강행한 자는 자수하라.
二.무기와 흉기를 가진 자는 신속히 경찰관서에 납부하라.
三. 폭도에게 식량을 보급한 자 또는 금전 물품 등을 제공하고 부화뇌동한 자도 자수하라" - 1948.4.18 제주비상경비사령관 김정호의 경고문 발표
 
"내가 제주에 와보니 서울에서 들은 봐와 꼭 같은 상태에 있다. 내가 내도한 목적은 민중을 탄압하는 것보다는 민중의 참다운 여론을 듣고 서로 협동해서 선무를 통해 민심을 안정시키고 동족상잔을 막자는 점에 있다. 그럼으로 나는 항상 민중과 접촉해 민중의 소리를 듣는 기회를 얻으려고 노력하며 무력이며 탄압으로 치안을 확보하려는 것은 벌써 낡은 치안 유지 방법이며 폭력과 동족상잔을 절대 회피해 도덕적으로 모든 일을 처리해 나가야 할 것이다." - 1948.4.20. 제주신보 기사 「사건 진압을 위해서 - 김 공보실장 담화발표」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제주의 및 극렬의 공산주의에 감염되어 망국 사상에 중독된 일부 매국도배들은 사려와 판단력이 연약한 청소년과 천진무지한 노동자와 농민 동포들을 선동과 모략으로 또는 금전으로 매수해 파괴와 살상을 일삼으니 어찌 통탄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와 같은 폭행은 세계에 대하여 우리 문화성을 의심하게 할 염려가 불문하니 이와 같은 것을 제거함이 국립 경찰의 아니 우리 민족에 부여된 지상 명령입니다." - 1948.4.20 제주신보 「金 공보실장 도민에 멧세-지」

# 강경 토벌과 함께 사라진 제주신보

제주도는 1947년 5·10 총선거를 앞두고 무장대의 선거 방해로 선거구 3곳 중 2곳이 불에 탔다. 1개 선거구만이 간신히 치렀는데, 전국에서 가장 낮은 투표율을 기록해 조병옥의 분노를 샀다. 이는 제주가 '붉은 섬'으로 낙인찍히게 된 결정적 이유가 됐다. 정권을 잡은 이승만은 경찰 인력을 제주에 대거 투입했으며 미군정은 해안선을 봉쇄했다. 같은 해 10월부터는 군대까지 투입해 초토화 작전을 시행했다.

섬 전체가 피로 물들고 <제주신보>도 온전하지 못했다. 김호진 편집국장은 동료들과 함께 무장대 지휘관 이덕구 명의의 '삐라'를 인쇄해 준 혐의로 계엄당국에 체포돼 처형됐다. 그해 12월, <제주신보>는 서북청년단에 접수돼 결국 기관지로 전락하고 만다.

제주대학교 고영철 교수는 "김 편집국장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한국 언론사상 첫 번째로 희생당한 언론인"이라며, "그는 이승만 정부의 권력 기반을 다지는 과정에서 4·3 제물로 사라진 것"이라 강조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정부 수립 국민축하식 기념사’에서 “온 인류의 안전과 평화를 위해 힘써야 될 것”이라 말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정부 수립 국민축하식 기념사’에서 “온 인류의 안전과 평화를 위해 힘써야 될 것”이라 말했다.
ⓒ 국사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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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규모 학살 후에도 제주신보는 한 차례 더 위기를 맞게 된다. 1960년 4·19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몰락했고 4·3에 관한 공개적 논의로 이어졌다. 제주 출신 국회의원들이 '제주 4·3사건 진상조사' 발의했고, 그 피해 접수를 제주신보가 도왔다. 3일 동안 1,259건 피해 건수와 1,457명의 인명피해가 접수됐다. 하지만 5·16 군사 쿠데타로 재차 중단되고, 제주신보 신두방 전무는 구속됐다. 이후 진상 규명 운동은 민주화 바람이 불 때까지 역사 속에 묻히게 된다.

태그:#제주43, #43사건, #제주, #제주도, #제주신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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