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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송경동이 쓴 <내일 다시 쓰겠습니다>(2023년, 아시아)  표지이다.
▲ 시집 <내일 다시 쓰겠습니다> 표지 시인 송경동이 쓴 <내일 다시 쓰겠습니다>(2023년, 아시아) 표지이다.
ⓒ 아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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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일관되게 편향과 편파의 시인입니다."
(책, 126쪽, 문동만, '송경동에 대하여' 일부)

"여기, 이 세계의 야만과 폭력을 증언하고 불온한 세계를 꿈꾸다 잡혀가는 시인이 있다."
(책, 127쪽, 이설야, '송경동에 대하여' 일부)
 
두 시인의 이야기에 기대 말을 보태자면, 송경동은 '야만과 폭력의 세계'를 끈질기게 드러내는 사람이다. 그 세계는 너무도 노골적이어서 주변에서 흔히 만날 수 있다. 하지만, 그 많은 시인 가운데 '야만의 세상'을 온전하게 '증언'하는 이는 거의 없다.

송경동의 시는 온통 기울어진 운동장밖에 없는 세상에서 '삐딱한 듯 꼿꼿하게' 세상을 정면으로 노려본다. 마치 사람들 기억에서 사라지기 전에 시로 진실을 새겨놓은 듯하다. 그런 점에서 나는 그를 우리 시대의 역사가라 생각한다.
 
스물여덟 어느 날
한 자칭 맑스주의자가 새로운 조직 결성에 함께 하지 않겠냐고 찾아왔다
얘기 말엽에 그가 물었다
그런데 송 동지는 어느 대학 출신이요? 웃으며
나는 고졸이며, 소년원 출신에
노동자 출신이라고 이야기해 주었다
(송경동, 2009, <사소한 물음들에 답함> 일부)
 
그를 처음 <사소한 물음들에 답함>(2009, 창비)에서 만났다. 이 시집에 들어 있는 같은 제목의 시 때문에 송경동을 기억하게 됐다. 이 시는 흔히 볼 수 있는 일을 쉬운 말로 적은 그의 시가 남다른 '힘'을 보여주는 수많은 장면 가운데 하나다. 이 시는 다른 사람을 만나는 자세와 생각을 돌아보게 했다.

시인은 많은 이가 사소하게 넘어가는 '중요한 문제'를 건드린다. <내일 다시 쓰겠습니다>도 마찬가지다. "희망은 의무를 동반"한다는 말은 날카롭다. 무섭기까지 하다. 행동하지 않으며 '희망'과 '미래'를 말하는 것은 "가식"이라는 그의 말은 진실을 우리와 대면시킨다. '진리' 따위가 아닌 삶의 실재를 바로 앞에 가져다 놓는다.
 
희망은
의무를 동반하지
...
행동이라는 의무를 자임하지 않는
모든 희망은 가식이지
(책, 64쪽, '희망의 의무' 일부)
 
세상을 만드는 데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으며 키보드와 말로 때우는 나에게 그의 시어들은 너무 무겁다. '여럿이 걸어야 희망의 길'을 만들 수 있다는 루쉰의 말을 만났을 때와는 또 다른 무거움이다. 그의 시를 만날 때면 서늘함에 식은 땀을 흘린다.

'의무'라는 말에 토를 달아 도망가 보려고 하지만, "마음 무너졌던 그곳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구절이 벽처럼 막아선다. "누군가의 눈물과 상처가 있는 곳"이 "가장 선한 힘이 새로 돋는 곳"이라는 말에 더는 돌아서지 않을 수 없다.
 
잊을 수 없는 건
영광이 아닌 비참
뜻 세웠던 곳보다 마음 무너졌던
그곳이 세계의 중심
누군가의 눈물과 상처가 있는 곳
그곳이 이 세상에서 가장 선한 힘이 새로 돋는 곳
(책, 13~14쪽, '세계의 중심' 일부)
 
왜 문학 교과서에 이런 시를 만날 수 없을까? "부둥켜안아야 할 일"을 두고 밑줄을 긋고, "직설의 분노"를 쏟아내야 할 순간에 '은유'를 찾지 않게 돼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누군가 만들어 놓은 '억지 스타일'에 갇힐 때가 가끔 있다. '화를 내더라도 논리가 있어야 한다', '슬프더라도 차분하게 말해야 한다'. 억누르는 자들만이 이런 주장을 늘어놓는 것은 아니다. 감정을 숨기고 감응하지 않는 사회는 바뀌기 어렵다.
 
밑줄 그을 문장보다
부둥켜안아야 할 일이 많았고
미문과 은유는 쓸 틈 없이
직설의 분노만 새기며 살아왔던
내 삶의 서재는
(책, 50쪽, '내 삶의 서재는' 일부)
 
"내일 다시 써 보겠습니다". 시집과 시 제목인 이 문장이 참 마음에 든다. 아름답다는 느낌마저 준다. 그만큼 싸웠으면 더 '투명해지기도' 어려울 텐데, '안개'와 '흐릿한 날'을 말하며 "내일 다시 써 보겠습니다"라니!

삶의 안개는 못 보는 이가 더 많다. 본다고 하더라도 무턱대고 뚫고 지나가려는 사람이 많다. 어제의 관성에 이끌려 그저 몸을 내일로 밀어 넣는 때가 허다하다. 그러다 제풀에 지쳐 자신이 만든 안개 속에 갇혀 포기한다. 시인이 도드라지는 이유다.
 
…많은 말을 하며
어제까지는 잘 살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게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무슨 말도 잘 떠오르지 않고 세상과 삶이
안개 속처럼 뿌옇고 흐릿한 날이 있습니다
오늘이 조금 그렇습니다

내일 다시 써 보겠습니다.

(책, 109쪽, '시인 노트' 일부)
 
송경동이 쓴 "내일 다시 써 보겠습니다"라는 문장은 내게 두 가지 의미로 다가왔다. 멈춰서 자신과 주위를 둘러보는 겸손함, 다시 시작하는 끈질김. 모두 상당한 용기가 필요하다.

시인 진은영은 "고통 곁에 머무는 시인의 목소리가 너무나 명료하다"라고 했다(책, 128~129쪽). 송경동의 말이, 그의 시가 뚜렷한 이유는, 그가  언제나 '고통'의 '현장'과 '자신'을 마주할 수 있는 용기를 지녔기 때문일 것이다.

내일 다시 쓰겠습니다

송경동 (지은이), 도서출판 아시아(2023)


태그:#송경동, #내일다시써보겠습니다, #아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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