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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장군 해전 현장 탐사 대원들이 15일간 항해를 마친 후 쓴 항해기입니다. 1차 항해는 5월 22일부터 5월 28일까지 동방항로, 2차 항해는 6월 3일부터 6월 11일까지 서방항로로 15일간입니다.[편집자말]
명량해전 모습을 시연하고 있는 모습. 지인인 박근세씨가 보내왔다.
 명량해전 모습을 시연하고 있는 모습. 지인인 박근세씨가 보내왔다.
ⓒ 박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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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장군이 왜수군과 벌인 전투 중 가장 극적인 장면은 명량해전이다. 오죽했으면 이순신에 관한 모든 영화가 명량해전에 포커스를 맞췄을까? 이순신 장군이 울돌목의 좁은 수로를 이용해 10배 이상의 일본 수군과 대결해 승리했기 때문이다.

이순신 해전 현장 답사에 나선 율리안나호가 강진 마량항에 도착해 청년 두명과 대화하던 중 "우리 배의 목적지는 울돌목을 통과하는 것"이라고 하자 한 청년이 이야기했다.
 
벽파진에서 울돌목 바다가 잠잠해지기를 기다리는 율리안나호 모습
 벽파진에서 울돌목 바다가 잠잠해지기를 기다리는 율리안나호 모습
ⓒ 오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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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런 배가 마량항에 들어온 것은 처음입니다. 지금이 사리 때로 물살이 가장 센 시기입니다. 울돌목 통과가 가능할까요?"

울돌목은 20리 밖에서도 물소리가 들린다고 해서 '울돌목'이라 불릴 정도로 물살이 빠르고 얕아 항해하기 위험한 수로이다. 율리안나호의 평균속도는 시속 5노트다. 교과서와 영화로 수없이 들었고 진도대교 위에서 보기는 했어도 요트를 타고 울돌목을 통과한다는 게 겁났다.

진도와 해남 화원반도 사이에 있는 울돌목은 길이가 약 2킬로미터 내외이고 가장 좁은 곳의 폭이 300미터이다. 울돌목의 최저 수심은 1.9미터이고 조류의 속도는 11.5노트로 율리안나호의 평균속도인 5노트의 두 배다.

율리안나호의 흘수가 1.8미터인데 잘못해 최저수심 방향으로 가면 큰일날 수도 있다. 게다가 율리안나호의 속도보다 물살이 더 빠르다니!

긴장한 대원들은 물 때 시간을 살펴보고 해양경찰에 연락해 율리안나호가 울돌목을 통과해도 좋은 시간을 알려달라고 질문했더니 "저녁 7시 15분쯤이 '정조'시간이니 그 시간에 울돌목을 통과하세요"라고 답변이 왔다. "만일을 대비해 비상통신망까지 열어달라"는 말까지 덧붙였다.

겁먹은 대원들이 서둘러 벽파진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1시 47분이다. 벽파마을 이장 황영일(69)씨의 안내를 받아 마을 주민으로부터 울돌목의 정조시간을 파악한 일행은 명량해전이 일어나기 직전에 이순신 장군이 다가올 해전에 관해 고민하며 조선수군을 지휘했던 벽파정에 올랐다.
 
명량해전이 일어나기 며칠전 전쟁승리를 위해 고뇌하는 모습의 이순신. 벽파정에서 촬영했다.
 명량해전이 일어나기 며칠전 전쟁승리를 위해 고뇌하는 모습의 이순신. 벽파정에서 촬영했다.
ⓒ 오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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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파진에서 울돌목 통과를 기다리던 율리안나호 대원들이 기념비 앞에서 고유제를 올리고 있다. 사진속에 보이는 바다가  일본군선 330척이 포진하고 있었을 것으로  추측되는 바다이다.
 벽파진에서 울돌목 통과를 기다리던 율리안나호 대원들이 기념비 앞에서 고유제를 올리고 있다. 사진속에 보이는 바다가 일본군선 330척이 포진하고 있었을 것으로 추측되는 바다이다.
ⓒ 오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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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파진에서 울돌목까지의 거리를 재어보니 5.13㎞ 떨어져 있었다. 울돌목 물살이 세긴 센가보다. 벽파진 앞바다에 대형바지선을 끌고갈 선박 3척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행은 물길과 조류변동 시간을 잘 아는 바지선을 따라가기로 했다.

벽파진에서 울돌목으로 가는 길목에는 녹도가 있고 밤이 되자 조류정보전광판이 작동되고 있었다. 밤 7시 04분 쯤 전광판에는 'S'라는 글자와 '1'이라는 불빛이 켜졌다.
    
저녁 7시 5분, 벽파진에서 앞서가는 바지선을 따라 가던 중 녹도에 있는 조류정보전광판이 'S'에서 'N'으로  바뀌었다. 'S'는 조류가 북쪽에서 남쪽으로 흐른다는 뜻이고 'N'은 조류가 남쪽에서 북쪽으로 흐른다는 뜻이다. 전광판이 'S'에서 'N'으로 바뀌는 순간이 바다가 조용해지는 '정조'시간이다. 벽파진에서 6시간 동안  이순간을 기다렸던 '율리안나호는 재빨리 울돌목을 통과했다.
 저녁 7시 5분, 벽파진에서 앞서가는 바지선을 따라 가던 중 녹도에 있는 조류정보전광판이 'S'에서 'N'으로 바뀌었다. 'S'는 조류가 북쪽에서 남쪽으로 흐른다는 뜻이고 'N'은 조류가 남쪽에서 북쪽으로 흐른다는 뜻이다. 전광판이 'S'에서 'N'으로 바뀌는 순간이 바다가 조용해지는 '정조'시간이다. 벽파진에서 6시간 동안 이순간을 기다렸던 '율리안나호는 재빨리 울돌목을 통과했다.
ⓒ 오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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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돌목 바다가 소용돌이 치는  모습을 지인인 박근세씨가 보내왔다.
 울돌목 바다가 소용돌이 치는 모습을 지인인 박근세씨가 보내왔다.
ⓒ 박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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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1분 후인 7시 05분이 되자 전광판이 'N'자로 바뀌고 '0'이라는 숫자가 나타났다. 일행을 태운 율리안나호는 앞서가는 바지선을 따라 재빨리 울돌목을 건너 우수영으로 들어갔다. 가슴 졸이며 통과한 바다는 조용했다.

전광판 글자 'S', 숫자 '1'은 조류가 우수영쪽에서 남쪽을 향해 시속 1노트로 흐른다는 뜻이고, 전광판 글자 'N', 숫자 '0'은 조류가 벽파진 방향에서 북쪽인 우수영쪽으로 흐른다는 의미이며 조류 속도가 '0'인 '정조'시간대라는 의미다.

"일본 배 1천척이라도 우리 전선을 당할 수 없다"며 독전에 나선 이순신

벽파진에서 바라본 바다는 굉장히 넓었다. 남아 있는 조선수군을 아예 싹 쓸어버릴 작정을 한 일본 수군은 330척의 선단을 구성해 어란진과 벽파진 앞 바다에서 돌격 명령을 기다렸을 것 같다.

하지만 울돌목은 수로가 좁고 물살이 빨라 일본수군의 대형선인 아다케가 쉽게 들어올 수 없는 곳이라 중소형 군선인 세키부네 133척이 울돌목을 향해 출동했다.

1597년 9월 16일 오전 7시, 잠시 정조가 되고 북서류가 시작되어 조류가 일본함대에 유리한 방향으로 흐르자 일본함대는 우수영쪽으로 돌진해 들어왔다.

탐망군에 의해 해상 상황을 파악한 이순신은 장수들을 소집해 작전 지시를 내리고 오전 9~10시경 우수영 앞바다로 나와 진형을 갖추고 일본함대를 기다렸다.

명량해전은 해협을 통과한 일본함대가 우수영 앞바다로 돌진해 이순신 함대를 에워싸면서 시작되었다. 그 시각은 오전 11로 추정된다. 당시의 급박한 상황을 이순신의 <난중일기>에서는 이렇게 기록했다.
        
울돌목을 바라보는 이순신 장군 동상 모습. 진도대교가 보인다
 울돌목을 바라보는 이순신 장군 동상 모습. 진도대교가 보인다
ⓒ 오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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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해전 현장 답사에 나선 율리안나호 대원들이 해남 우수영에 있는  대첩비각 앞에서 기념촬영했다.
 이순신 해전 현장 답사에 나선 율리안나호 대원들이 해남 우수영에 있는 대첩비각 앞에서 기념촬영했다.
ⓒ 오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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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아침에 특별 정찰부대가 '수효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적선이 우리가 진을 치고 있는 곳을 향해 오고 있다'고 보고했다.

곧 여러 배에 명령하여 닻을 올려 바다로 나아가니 130여척의 적선이 우리 배를 에워쌌다. 여러 장수는 적은 수로 많은 적과 대적해야 하므로 스스로 낙심하여 모두 도망칠 꾀만 내는데 우수사 김억추가 탄 배는 벌써 2마장 밖에 나가 있었다.

나는 바삐 노를 저어 앞으로 돌진하며 지자, 현자 등 각종 총통을 마구 쏘아 대니 탄환이 마치 폭풍우처럼 쏟아지고 배 위에서는 군관들이 늘어서서 화살을 빗발처럼 쏘니 적들이 감히 대들지 못하고 나왔다 물러갔다 하였다.

그러나 우리 배가 여러겹으로 둘러싸여 있으므로 형세가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어 배에 있는 사람마다 서로 쳐다보며 안색이 질려 있었다.

그래서 나는 '아무리 적선이 많더라도 쉽사리 우리 배를 침범하지는 못할 것이니 조금도 동요하지 말고 다시 사력을 다해 적과 싸워라'라고 타일렀다."
 
이순신이 몸소 최선봉에 나서 일본함대에 포위당한 채 상당한 시간 홀로 버텼다. 이때 휘하의 일부 전선은 도주하려는 듯이 몇 백미터 뒤처져 있었다.

이순신은 호각을 불어 중군에게 명령을 내리는 기를 세우라 지시하고 초요기를 세웠더니 중군장 김응함의 배가 다가오고 거제현령 안위의 배는 더 먼저 다가왔다. 이순신이 외쳤다.
 
 "안위야! 군법에 죽고 싶으냐? 네가 도망간다고 어디 가서 살 것이냐."
 
하고 호령하니 안위도 황급히 적선 속으로 돌입했다. 또 김응함을 불렀다.
 
"너는 중군이면서도 대장을 구원해 주지 않으니 그 죄를 어찌 면하겠느냐. 당장 처형할 것이거늘 지금은 적세가 급하므로 우선 공을 세울 기회를 준다."
  
해남 우수영 어느 민가벽에 그려진 강강술래 벽화 모습
 해남 우수영 어느 민가벽에 그려진 강강술래 벽화 모습
ⓒ 오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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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였다. 정조로 멈췄던 조류가 이순신 함대에 유리한 남동류로 바뀌기 시작했다. 바뀐 조류를 타고 두 배가 적진을 향해 앞서 나가자 적장이 탄 배가 그 휘하의 배 2척에 지시하여 일시에 안위의 배가 집중 포위되고 말았다.

이때 이순신의 대장선을 비롯한 모든 전선이 집중 공격을 펼쳐 안위의 전선을 구하는 동시에 31척을 격파했다. 이때 이순신 함대는 해적 출신 장수로 선봉에 섰던 구루시마 미치후사를 사살하고 목을 쳐 일본 수군의 기세를 꺾었다.

31척을 잃은 일본군선은 뒤로 물러나고 양측이 대치하다가 명량해전은 끝이 났다. 이순신은 <난중일기>에서 "이것은 실로 천행이다"라고 적었다.

우수영에 도착한 일행은 인근 펜션에 여장을 풀었다. 다음 날 새벽 5시쯤 잠이 깼는데 뒷산에서 뻐꾸기가 울고 있었다. 낯익은 소리다. 조선수군이 거의 전멸당한 칠천량 인근 펜션에서 잠이 깼을 때도 뻐꾸기 소리가 들려왔었는데….

뻐꾹~ 뻐꾹~ 뻐꾹하고 우는 뻐꾹새 울음소리가 마치 전쟁 당시 죽어간 영혼들의 울음소리같이 들렸다.
  
해남 우수영에는 법정스님이 탄생한 생가가 있었다.
 해남 우수영에는 법정스님이 탄생한 생가가 있었다.
ⓒ 오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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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원들과 함께 해남 우수영을 돌아본 후 택시를 타고 이순신 장군 동상 가까이 갔을 때 울돌목에서는 바다도 울고, 사람도 울고, 뻐꾸기도 울고 있었다.

덧붙이는 글 | 여수넷통뉴스와 광양경제신문에도 송고합니다


태그:#이순신해전현장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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