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6.24 10:42최종 업데이트 24.06.24 1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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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시 미테구에 있는 ‘평화의 소녀상’ ⓒ AP/연합뉴스

 
일본 기시다 후미오 내각은 소녀상을 철거시키기 위해 세계 곳곳을 압박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도 평화의 소녀상이 이탈리아에 설치돼 만세를 외치게 됐다. 쾌거로 부를 만한 일이다.

정의기억연대가 19일 배포한 보도자료에 따르면, 한국 시각으로 22일 오후 7시 북아프리카 튀니지와 이탈리아반도의 중간쯤인 지중해 사르데냐섬에서 '평화의 소녀상' 제막식이 거행된다. 그리고 이 섬의 서북쪽 모서리인 스틴티노시에서 소녀상이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제막식 장소에 관해 보도자료는 이렇게 설명한다.


"전 유럽과 미국에서 매년 수많은 관광객이 찾는 아름다운 도시다. 고급 휴양지뿐 아니라 기원전 2000년 전부터 존재했던 누라게문명 유적지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설치 장소는 시청에서 불과 200미터 떨어진 바닷가로 관광객이 가장 많이 오가는 곳이다. 소녀상은 지중해를 바라보며 세계 시민들에게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와 평화와 인권을 이야기하게 될 것이다."

과거에 일제 규탄 시위가 가장 많이 벌어진 장소는 '장터'들이다. 이번에 이탈리아 소녀상이 설치될 장소도 그처럼 사람들로 붐비는 곳이다. 더군다나 이 장소는 베를린 소녀상이 위치한 곳처럼 이 도시의 공유지다. 이곳 시민들의 집단적 의지가 소녀상을 지지하고 있음을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2020년 9월 25일 설치된 베를린 소녀상을 철거하기 위한 일본 정부와 한일 극우세력의 합동 작전은 집요하다. 일본 총리실과 외무성이 나서서 미테구나 베를린시뿐 아니라 독일 중앙 정부까지 압박하고 있다. 주옥순 엄마부대 대표가 속한 위안부사기청산연대가 2022년 6월 14일 자 <산케이신문>의 응원을 받으며 베를린으로 날아가 소녀상 철거를 요구하는 일도 있었다. 일본 극우세력은 이들에게 박수를 보내고 있다. (관련 기사: '소녀상' 철거 요청하러 독일 가는 한국인, 반기는 일본 극우 https://omn.kr/1zehl)

이런 시달림을 받아온 베를린시 미테구청은 소녀상 설치 허가를 연장할 수 없다는 입장을 지난 18일에 표명했다. 이에 맞서는 흐름도 만만치 않다. 베를린 소녀상을 지키기 위한 온라인 청원운동이 전개되고 있고, 사민당(SPD) 등에 소속한 구의원들이 소녀상 존치 결의안을 상정했다.

스틴티노시 시민들과 시장이 소녀상을 환영하는 이유
 

이탈리아 사르데냐섬의 모습 ⓒ pixabay

 
소녀상을 설치하면, 그것도 공유지에 설치하면 시달림을 받게 될 것이 예상되는 데도, 스틴티노시는 이를 흔쾌히 수락했다. 위 보도자료에 따르면, 정의기억연대가 소녀상 건립을 제안하는 공문을 발신한 날은 작년 12월 21일이고, 스틴티노시가 수락하는 답신을 발송한 날은 그달 28일이다. 19일 뒤인 금년 1월 16일에 시의회의 승인 결의안이 통과됐고, 4월 8일 부산에서 소녀상이 선적돼 6월 14일 현지에 도착했다.

소녀상을 훼방하는 움직임이 매우 격렬한데도 한국 바깥에 31개의 소녀상이 설치돼 있다. 이게 가능한 것은 일본의 추격으로부터 이들을 숨겨주는 손길들이 세계 곳곳에 있기 때문이다. 그런 손길들이 나오는 것은 소녀상이 외치는 만세가 '대한독립 만세' 차원을 뛰어넘었기 때문이다. 이 만세는 한국만이 아닌 '세상을 위한 만세'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소녀상이 한국을 뛰어넘는 전 세계의 상징물로 인식되고 있다는 점은 스틴티노 시민들과 리타 림바니아 발레벨라 시장이 소녀상을 환영하는 이유에서도 확인된다. 한국어·이탈리아어·영어로 작성된 이번 소녀상 비문의 한국어판에 이런 대목이 있다.

"Rita L. Vallebella 시장은 스틴티노시를 대표해 한국 여성들 및 모든 전시와 일상의 성폭력 피해 여성들에 대한 우정과 연대의 정신으로 평화의 소녀상 건립을 환영합니다. 이 동상은 인류의 마음에 말을 걸고 젠더 폭력에 대한 엄중한 경고가 될 것이며, 이를 보는 사람들에게 전 세계 모든 여성의 자유와 존엄성을 존중하겠다는 다짐을 촉구할 것입니다."

일상의 성폭력과 더불어, 비문에 언급된 전시 성폭력 문제는 소녀상이 세계적 호응을 얻어가는 한 가지 이유를 설명한다. 베를린 소녀상과 관련해 충분히 증명됐듯이 일본은 이를 '한일 양국의 문제'로 몰아가며 '제3자는 빠지세요'라는 식의 논리를 내세우고 있다. 그런데도, 세계 시민들이 소녀상을 옹호하는 것은 이를 양국이 아닌 세계의 문제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전시 성폭력이 군인들의 욕구를 해소하는 부정한 방법 혹은 승자가 행사하는 폭력적 권리 정도로 인식되는 경향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것을 전쟁의 또 다른 수단으로 인식하고 적극 견제하는 경향이 세계적 공감대를 이루고 있다. 그래서 전쟁의 폭력성을 견제하는 평화운동의 차원에서도 전시 성폭력 문제가 인식되고 있다.

분리·독립을 요구하는 알바니아계 코소보자치주 주민들과 세르비아 정부군의 유혈 충돌인 코소보 전쟁(1998~1999)은 전시 성폭력이 우발적이고 부수적인 현상이 아니라 계획적이고 본질적인 전쟁 현상임을 보여줬다. 이 전쟁에서 성폭력은 국가권력에 의한 인종청소와 적군 압박의 수단이었다.

이 전쟁이 막바지에 달했을 때 보도된 1999년 5월 12일 자 <조선일보> 기사 '코소보는 결국 청소됐다'는 "세르비아의 인종청소가 시작된 지 15개월, 코소보는 죽음의 땅, 폐허로 변했다"고 한 뒤 이렇게 보도했다.

"세르비아군의 야만성은 알바니아계 여성에 대한 강간과 신분청소에서 절정을 이룬다. 세르비아군은 페치시의 카라가치호텔에 알바니아계 여성들을 감금해 놓고 위안부로 삼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자코비차에서도 조직적인 강간이 자행됐다."

국가 차원과 별도로 민족 간의 분쟁이 격화된 1990년대부터 전시 성폭력이 전쟁의 핵심 수단으로 부각되는 일이 더욱 많아졌다. 1992년 3월에 발발해 3년 뒤 11월에 끝난 보스니아분쟁(보스니아내전)에서도 이슬람 여성들에 대한 전시 성폭력이 자행됐다. 이 폭력에 여성 6만 명이 노출됐다.

1990년대의 상황은 전시 성폭력에 대한 인류의 인식을 바꿔놓았고, 이는 2000년 10월 31일에 유엔 안보리 결의 1325호가 나오는 원동력이 됐다. '여성·평화·안보'를 키워드로 하는 이 결의안은 무력분쟁 상황에서 여성에게 발생하는 폭력을 종식하고 평화구축 과정에 여성들을 참여시키는 쪽으로 각국의 노력을 촉구했다.

소녀상 지키고자 하는 움직임은 계속돼야
 

베를린소녀상의영구존치를요구하는창원시민, 일본군위안부할머니와함께하는 마창진시민모임은 지난 5월 22일 오후 경남도청 프레스센터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일본 정부는 소녀상 철거 시도를 당장 중단하라. 베를린 시장은 평화의 소녀상 영구 존치를 약속하라”고 했다. ⓒ 윤성효

 
세계적으로 여성의 권익이 크게 향상됐다고는 하지만, 전시 상황에서는 오히려 열악해지고 있다. 미소 냉전이 무너진 1990년대 이후로 국가 이외의 조직들도 전쟁의 유력한 주체로 떠올랐다. 아이티나 에콰도르 같은 중남미 지역의 갱단이나 예멘 같은 중동 지역의 반군단체들이 국가권력을 만만히 보거나 전쟁 수준의 무력행위를 별 어려움 없이 수행하는 세상이 되었다. 

국가들 간에 전쟁이 벌어질 때는 여성·노인·어린이 등의 약자가 미약하나마 어느 정도라도 보호를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약자에 대한 보호 시스템이 별로 갖춰지지 않은 반군단체나 갱단 등이 전쟁을 벌일 경우에는 그나마 그 정도의 보호도 힘들어진다. 그래서 오늘날에는 국가안보보다 인간안보가 더 시급하다. 이런 추세는 여성에 대한 전시 성폭력 방지의 필요성을 더욱 강화하고 있다.

1991년 8월 14일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을 계기로 남북한과 일본에서 위안부 문제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는 상황에서, 1990년대부터 전시 성폭력의 위험성에 대한 세계인들의 인식이 크게 달라졌다. 이는 위안부 문제가 세계적 호응을 얻기 쉽도록 만드는 원인이 됐다. 스틴티노시를 비롯한 세계 각지에서 위안부 소녀상 설치가 현지인들의 호응을 얻는 데는 이런 배경도 작용하고 있다.

소녀상에 대한 응원은 일제에 의한 한국인들의 피해를 동정하는 차원이 아니다. 전 세계 인류가 직면한 현실적 위기에 대처하는 차원에서 소녀상을 유치하고 응원하는 흐름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소녀상은 제국주의의 전시 성폭력을 증언하면서 향후의 전시 성폭력을 경고하는 기능을 하고 있다. 그래서 이는 한국의 소녀상이 아니라 세계의 소녀상이다. 22일의 제막식은 이런 흐름이 지중해 한가운데로도 전파되고 있음을 반영한다.

그러나 안심할 상황은 아니다. 베를린에 이어 스틴티노에서도 시 공유지에 소녀상이 세워지기 때문에 일본 정부와 한일 극우가 이곳에 주목할 수밖에 없다. 일본 정부와 극우 세력은 이를 세계 문제가 아닌 한일 문제로 축소시키며 '빠져주세요'라는 식의 여론전을 벌일 공산이 크다. 소녀상에 대한 지지 여론이 확산되고 있지만, 이에 대한 응원이 계속 유지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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