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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어려운 일이다, 분명히 아파하는 환자를 데리고 간 보호자가 '이상 없음'을 수긍하기란. 참 난감한 일이다, 어떤 검사와 진단도 '이상 없음'으로 나오는데 아파하는 환자를 그대로 돌려보내기란. 의료 현장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이야기들 속에서 가장 불편하고 어려운 지점은 환자와 가족과 의사가 질병과 일상 사이에서 서로 이해하지 못할 때이다.

많은 한국인들이 대한민국 의료 현장을 실제로 겪으며 동의하는 것들이 몇 가지 있다. 삶의 위협을 느낄 만한 병이 있어 '좋은 병원'을 찾을 때는 여지없이 수도권 그것도 서울에 있는 큰 병원을 찾게 된다는 것. 그리고 삶의 위협을 느끼며 찾게 되는 '서울에 있는 큰 병원'들에서 환자와 가족은 '5분 진료'로 상징되는 대한민국 의료의 '사람다움이 없음'을 종종 발견하게 된다는 것. 아파서 정말 아파서 큰 병원을 찾지만 막상 사람을 그러니까 환자를 바라보는 시선은 터무니없이 적게 느껴진다는 것. 환자가 아닌 질병에 집중하는 '서울에 있는 큰 병원'을 만나고 돌아갈 때 무언가 못내 서운하고 못내 아쉬울 수밖에 없을 때가 많다는 것.

휴머니즘 의료를 꿈꾸는 의사

<의료쇼핑, 나는 병원에 간다>는 오랜 기간 소아청소년과에서 일해온 의사 최연호가 '휴머니즘 의료'를 외치고 실천해가며 실제로 겪고 깨달은 바를 평소 지론과 함께 풀어낸 책이다.
 
겉표지
▲ <의료쇼핑, 나는 병원에 간다> 겉표지
ⓒ 글항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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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집을 다니는 어린 두 아이를 키우면서 아이를 데리고 병원에 가는 날이면 부모된 우리는 의사에게 여지없이 묻는다. "아이가 어디가 아픈 건가요? 어떻게 해줘야 할까요?" 아픈 아이를 두고 어디가 어떻게 아픈지를 묻는 부모를 보는 의사는 어떻게 반응할까?

성인이 아닌 아이가 아파할 때 보호자인 부모가 느끼는 감정이 어떨지를 잘 아는 소아청소년과 전문 의사 최연호는 '빠른 진단'과 '발빠른 처방'을 기대하는 부모에게 서두르지 말라고 말한다. 의료의 중심에는 진단과 처방보다, 보호자보다, 환자를 먼저 알아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나는 청소년과 의사다. ... 진단을 내리고 치료하는 데 있어서 환자의 입장이 가장 우선시되어야 한다고 느끼기 시작한 계기가 바로 어린 환자의 가족을 같이 보면서다. 아이의 마음이 읽혔다. 엄마와 아빠의 마음도 볼 수 있었다. 가족의 마음을 읽다보니 겉으로 드러난 아이의 증상 뒤에 숨어 있는 깊은 본질이 보였다. 복잡하고 어려운 병이라 해도 검사에 의해 확진되는 질병은 차라리 마음이 편했다. 그런데 큰 병도 아니고 증상도 심하지 않으면서 내 마음이 불편해지는 병들이 있었다. 대부분 안타깝게도 환자 혹은 환자의 가족이 만들어내거나 다른 의사가 잘못 판단한 병들이었다. 그중에는 검사와 치료 약이 필요 없는 경우가 많았다. 이것은 물론 나의 관점이다. 이 책에서 그 관점에 대해 자세히 얘기해보고자 한다. (이 책 5쪽, '머릿말'에서)

의사 최연호는 의사가 질병이 아닌 환자를 먼저 바라볼 때 의료 행위 자체가 얼마나 '사람다움'을 찾고 환자에게 알맞은 의료 행위를 할 수 있는지를 생각해보자고 말한다. 그가 주장하고 실천하기 애쓰는 '휴머니즘 의료'는 환자의 마음을 알아주는 데서 출발한다.

환자의 마음을 먼저 보아야 한다

의사 최연호는 영화 <패치 아담스>를 통해 '휴머니즘 의료'가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를 단번에 알려준다. 의사로서 12년여 간 1만5000명 이상의 환자를 무료로 진료했던 헌터 애덤스는 "구멍 난 곳 즉 상처를 치유한다는 의미로 패치patch라는 별명을 얻는다."(이 책, 25쪽)

어린 시절 겪은 불행한 환경 속에서 자살 미수로 정신병원에 입원한 적도 있었던 헌터 애덤스는 정신병원에서 보았던 수많은 다른 환자들을 보며 사람을 돕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그는 "사람들의 정신적인 상처도 낫게 하는 것이 의사의 몫이라고 믿었던"(이 책, 26쪽) 것이다.

애덤스는 환자를 제대로 쳐다보지도 않고 환자의 질병만 읊어대는 담당의 뒤에서 넌지시 환자의 이름을 물은 적도 있다. 당황해하는 담당 의사를 보며 그는 환자의 이름을 부르며 반갑게 그에게 인사부터 건넸다. 질병을 읊어대고 치료를 말하기 전에.
내가 생각하는 휴머니즘 의료란 현실에서 이루어지는 의료 체계에서 거짓이 없고 통찰이 보이는 의료다. 여기서는 환자가 수단이 되지 않고 의사도 도구로 이용되지 않는다. 환자와 의사 모두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의료를 말한다. 둘 사이의 지식 격차가 워낙 큰 탓에 자칫하면 갑을 관계로 흐를 수 있어서 전문성에 관한 얘기는 배제해야 한다. 그야말로 인간의 존엄성이 처음부터 끝까지 인정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책, 30쪽)

'휴머니즘 의료'에 따르면, 예컨대, 배변할 때마다 아파 고생하는 어린 아이의 고통을 빨리 덜어주고자 약이며 관장이며 처방을 서둘러 (가족이) 요구하고 (의사가) 처방할 때 혹시 아이가 배변의 고통보다 의료 행위가 주는 고통에 짓눌리지 않을지 고려할 필요가 있다. 적절한 의료 행위 자체를 두려워하고 거부하는 마음이 어린 환자의 마음에 자리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환자를 생각하는 가장 좋은 진단과 처방은 환자가 아픈 이유를 알고 환자의 마음을 알아주는 데서 출발한다.

의사 최연호는 '휴머니즘 의료'를 꿈꾸며 그와 함께 하는 의료진들에게도 이를 강조한다. 환자나 가족의 무언의 요구에 반응해주고 심지어 전문성을 드러내고자 환자의 마음과 상태를 고려하지 않은 채 진단과 처방이 이루어지는 것을 의사 최연호는 반대한다. 자칫 의사가 본의 아니게 환자에게 없던 병도 만들어내는 '의원병'을 일으킬 수 있다면서.

아픈 가족을 사랑하는 마음이 지나쳐 의사에게 빠른 진단과 처방을 요구하는 보호자 가족의 행동도 의사 최연호는 반대한다. 자칫 환자인 가족을 아끼는 마음이 지나쳐 불필요한 진단과 처방을 받아내는 '가족원병'을 일으킬 수 있다면서. 게다가 환자의 마음과 요구가 배제된 채 가족과 의사가 환자에 대한 진단과 처방에 '합의'를 하듯 지나치게 서두르면 '의가족원병'도 일으킬 수 있다며 환자를 생각하는 '휴머니즘 의료'를 다시금 강조한다.

'휴머니즘 의료'는 이렇듯 우리 사회에 묻고 요청한다. 환자를 아느냐고, 환자의 마음을 알기 위해 환자를 잘 바라보라고.

덧붙이는 글 | <의료쇼핑, 나는 병원에 간다: 의사, 환자, 가족이 병을 만드는 사회> 최연호 지음. 경기 파주: 글항아리, 2024. 1만7000원


의료쇼핑, 나는 병원에 간다 - 의사, 환자, 가족이 병을 만드는 사회

최연호 (지은이), 글항아리(2024)


태그:#휴머니즘의료, #최연호, #의료쇼핑나는병원에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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