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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관계등록부에 부모와 자식으로 이름을 올리면 절대 삭제하거나 수정할 수 없다. 그럼에도 탈가정한 청년들은 행정적으로 경제적으로 부모와 단절하길 원한다. 족쇄가 돼버린 가족제도에서 탈출을 시도한 이들의 사례들을 찾아보았다.[편집자말]
박세리가 지난 18일 오후 서울 강남구 스페이스쉐어 삼성코엑스센터에서 부친 박준철 씨의 사문서위조 혐의에 대한 입장을 밝히던 중 눈물을 닦고 있다.
 박세리가 지난 18일 오후 서울 강남구 스페이스쉐어 삼성코엑스센터에서 부친 박준철 씨의 사문서위조 혐의에 대한 입장을 밝히던 중 눈물을 닦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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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버지니까, 그래도 내가 나서서 할 수 있는 거 아닌가 이런 생각을 했다."

박세리 박세리희망재단 이사장이 부친 박준철씨를 사문서위조 혐의로 고소하자 박준철씨가 한 언론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박 이사장은 그간 아버지의 채무를 수차례 변제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부모와 절연하는 과정을 인스타툰으로 연재하는 더블유(@w_sosothink) 작가도 부모가 자신의 명의로 신용카드를 만들고 돌려막기를 해 23세에 신용불량자가 됐다고 고백했다.

부모로 인해 곤란을 겪는 자녀들이 있음에도 한국 사회에서 '부모', '혈연', '가족'은 마치 끊을 수 없는 절대적인 관계로 여겨지곤 한다. 부모와 절연한 자식에게는 '불효자'라는 손가락질이 돌아오고, '부모가 없으면 너는 태어나지도 않았다'는 말로 화해를 종용한다(관련기사: "은혜 모른다" 손가락질에도... 저는 부모와 절연한 자식입니다 https://omn.kr/28noc).

절연했지만 서류 정리는 불가능한 부모자식 관계
의료보험 피부양자 등록한 부모, '등재거부 신고' 가능


이런 '절대성' 때문인지 어렵게 부모와 절연하고 '탈가정'한 이후에도 자녀들은 서류상으로는 여전히 가족으로 묶인다. 결국 부모와 절연한 자녀는 부모의 경제공동체로 간주돼 사회적 지원을 받지 못하고 경제적 빈곤을 겪게 된다. <오마이뉴스>는 6월 중순 가정폭력으로 부모와 절연하고 행정적으로도 단절을 시도한 청년 3명을 인터뷰했다.

나무(36)씨는 2019년부터 부모와 연락을 끊고 따로 살고 있다. 그는 부모로부터 "호적에서 파버리겠다"라는 말을 들으면서 자랄 정도였다. 하지만 절연한 지 5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도 나무씨의 서류상 가족은 절연한 부모다. 기존의 '호적'이라 할 수 있는 가족관계등록부는 부모-자녀 관계를 수정하거나 삭제하는 게 원천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차라리 부모의 협박처럼 호적에서 파버리는 게 더 나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럴 수 없다. 
 
부모와 절연한 자녀들은 경제적 사회적 지원을 받지 못해 불안정한 주거 등 심각한 빈곤을 경험하게 된다.
 부모와 절연한 자녀들은 경제적 사회적 지원을 받지 못해 불안정한 주거 등 심각한 빈곤을 경험하게 된다.
ⓒ 위키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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삭제나 수정이 불가한 가족관계등록부는 절연한 자녀에게는 오히려 족쇄가 된다. 부모는 가족관계등록부를 떼서 언제든 자녀의 집 주소를 알아내 찾아올 수 있다. 절연한 부모가 집주소 등 자녀의 정보에 접근하지 못하게 하려면 가정폭력을 증명하고 따로 가족관계등록부 열람 금지를 신청해야 한다. 나무씨는 가정폭력 상담소를 통해 지속적으로 상담을 받으면서 과거에 가정폭력이 있었음을 '증명' 받았지만 "그 전까지는 부모가 언제든 찾아올 수 있는 위험에 노출돼 있었다"라고 했다. 

불안함을 호소하는 그에게 "상담사는 '지금 머무는 곳이 고시원이니 일단 이사를 해 주소를 옮기면 되지 않겠느냐'라고 조언"했다. 고시원도 나무씨에게는 엄연히 집이었는데 상담사는 일시적 거주지로 취급한 것이다. 절연이 아닌 일시적 가출로 여기는 이런 일은 반복됐다. 나무씨는 "생계 급여를 받으려면 부모의 허락이 필요해 (절연했으니) 못하겠다고 말했는데, ''아직도' 서류 동의를 받을 마음이 없으시냐'는 질문을 들었다. 내가 잠시 가출한 것처럼 취급하는 것 같더라"라면서 씁쓸해 했다. 

어느 날 나무씨 앞으로 자신이 부모의 피부양자로 의료보험에 등록됐다는 우편 안내문이 날아들었다. 그는 즉시 국민건강보험공단을 방문해 부모와 절연했음을 설명하면서 피부양자로 등재되지 않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국민건강보험공단에 따르면 이는 '피부양자 등재 거부 신고서'를 작성해 제출하는 것으로 가능하다. 절연이 아니더라도 여러 사유로 인해 피부양자로 등재 거부를 할 수 있다. 피부양자로 등록돼 있으면 경제적으로 부모와 연관돼있다고 간주돼 기초생활수급자 등 자격이 되지 않는다. 
 
나무씨는 건강보험 피부양자 등재 거부 신고서를 작성하고 건강보험공단에 제출했다고 말했다. 이 경우에 굳이 절연을 증명하지 않아도 된다.
 나무씨는 건강보험 피부양자 등재 거부 신고서를 작성하고 건강보험공단에 제출했다고 말했다. 이 경우에 굳이 절연을 증명하지 않아도 된다.
ⓒ 유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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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양포기각서 작성하고 통장 까고... 쉽지 않은 세대분리

부모와 절연한 당사자면서 절연 청년 인터뷰를 진행했던 김혜미 작가는 "부자들이 아니라 가난한 이들이야말로 살아남기 위해서 누구보다 부지런하게 관련 정보를 꿰고 있어야 한다. 이 사람들에게는 돈이라는 보호막이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김씨 또한 절연 과정에서 심각한 경제적 위기를 겪었지만 부모의 재산 조회에 걸려 관련 지원을 받지 못했다. 

기초생활 급여 등 신청은 단독 세대주만 가능한데 우리나라 주민등록법상 단독 세대주가 되려면 만 30세 이상이어야 한다. 30세 이전에는 결혼을 하거나 최저생계비 이상의 일정한 소득을 증명해야 단독 세대주가 될 수 있다. 

가정폭력으로 2021년 스무살의 나이로 부모와 절연한 비줄(23)씨는 집에서 나가기로 마음을 먹고서 통장이랑 인감 도장부터 먼저 챙겼다. 그 정도로 매사에 야무진 그지만 그에게도 부모와의 행정적 절연은 쉽지 않았다. 

비줄씨가 독립 세대주 자격을 얻으려면 만 30세까지 10년을 기다려야 했다. 그가 주민센터에 세대 분리를 신청했지만 끝없는 '서류의 늪'에 빠졌다. 그는 "다른 서류를 계속 요구하면서 3번 이상을 주민센터까지 오가게 만들다가 결국 전화로 내가 대학교에서 장학금을 받았기 때문에 분리가 안 된다고 하고 끊더라"라고 말했다.

수급자 신청에도, 청년 주택에 지원하려 해도 절연한 부모는 끊임없이 '걸림돌'이 됐다. 결국 그는 주민센터를 다시 방문해 부모와 자녀 사이에 상호 부양에 대한 책임과 권리를 포기한다는 의미로 '부양 포기 각서'를 작성했다. 일정한 기간 동안 부모에게 경제적인 지원을 받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수개월 간의 통장 계좌를 내보인 후에야 세대 분리를 할 수 있었다.

그는 "기초생활 수급자를 신청하고 인정받는 데까지 상당히 오래 걸렸다. 굶어 죽기 직전에 안 죽었고 버틴다 싶으면 그때서야 내주는 느낌"이라면서 "(세대 분리가 안 됐을 때 가구 단위로 지급된) 코로나19 시기에 1차 재난지원금은 실제로 지급됐는지 잘 모른다. 알아서 부모님이 쓰셨을 것"이라고 답했다. 

비줄씨는 "무엇이든 행정적으로 가능한지는 내가 다 알아보고 가서 요청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해주지 않고, 요청을 해도 모르는 경우가 많다"라고 했다. 그는 실제로 부모와 단절하는 과정에서 일주일에 4번 이상 주민센터를 방문하면서 관련 절차를 담당 공무원 이상으로 꿰뚫게 됐다. 최근에도 습관적으로 청년 관련 정책 사이트를 방문하면서 바뀐 것이 있는지를 확인한다. 

세대분리냐, 차상위냐... 양자선택 강요

한대윤(29)씨는 내년이면 30세가 돼 자동으로 세대 분리가 가능해진다. 그는 10년 전 동아리 방으로 자신의 거처를 옮기며 집에서 벗어나는 탈가정에 성공했지만 이후 사회적 지원을 받지 못해 오랫동안 경제적 곤란을 겪었다.

2023년 당시 한씨의 소득은 월 100만 원 정도로 차상위계층 조건이 충족됐다. 하지만 만 30세가 되지 않아 세대 분리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관련 혜택을 전혀 받지 못했다. 30세 이전에 세대 분리를 하려면 최저생계비 이상인 월 130만의 소득을 증명해야 한다. 하지만 월 30만 원 이상 돈을 벌면 차상위계층 혜택을 받지 못하는, 그야말로 '오도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다 그는 우연히 2019년부터 생계급여 수급자의 경우 근로소득이 30% 공제가 되는 기준이 완화됐다는 사실을 알게 돼 좌충우돌 끝에 기초생활 수급자로 인정받게 됐다. 그는 집을 나온 지 10년이 지난 올해 초 LH 임대주택으로 이사했다. 

한대윤씨는 "탈가정하지 않았다면 경제적으로는 더 윤택한 삶을 살았을지 모르겠지만 집을 나오고 후회한 적은 없다"라며 "부모와 같이 사는 친구들보다 더 주체적으로 나의 삶을 시작해볼 수 있는 것이 가장 큰 장점이 될 수 있다"라고 말했다. 

수정-삭제 불가한 가족관계등록부, 최선일까

이들 청년 3명은 입을 모아 현재 탈가정 정책 정보의 격차를 줄이는 것이 급선무라고 말했다. 가구 단위로 이뤄지는 복지 혜택이 많기 때문에, 탈가정으로 경제적 자원이 전무한 자녀들이 지원을 받으려면 어려운 행정적 절차를 홀로 돌파해야 한다. 탈가정 청년의 목소리를 에세이로 묶어낸 282북스의 강미선 대표는 "탈가정 청년들이 대부분 과거를 잊고 다시 시작하고 싶어 하기에 복잡한 행정적 단절 절차를 치르지 않는데, 그러면 복지 지원 등을 받고 싶어도 받지 못하게 된다"라고 했다. 

탈가정한 이들은 가족으로 연을 맺었다는 이유만으로 수정과 삭제가 불가능하게 해둔 가족관계등록부를 절연하고 일정 시간이 지나면 수정과 삭제가 가능하게끔 하는 것도 필요하지 않겠느냐고 제안했다. 가족이라고 할지라도 그 관계는 충분히 변할 수 있다는 사실을 제도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강미선 대표는 "걸림돌이 있음에도 뚫고 나갈 정도로 자립 정신이 투철한 청년들인데 행정이 계속 길을 막는다. 우리 사회가 이렇게 나아가려는 청년들에게 대단한 정책이 필요한 게 아니라, 하다 못해 나아갈 길을 밝힐 수 있는 작은 손전등이라도 쥐어주면 알아서 성장할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 27일 친족 사이에 재산 관련 범죄는 형을 면제하거나 고소해야 공소를 제기하게끔 해둔 특례인 '친족상도례'가 헌법에 어긋난다는 판단이 나왔다. 헌법재판소는 "입법재량을 명백히 일탈해 현저히 불합리하거나 불공정한 것으로서 형사 피해자의 재판절차진술권을 침해한다"라면서 재판관 '전원일치' 의견을 냈다.

몇 해 전 연예인 박수홍씨가 친형에게 방송 출연료 수십억 원을 정산 못 받았다며 고소하자, 사기나 횡령 등 범죄는 친족상도례 대상에서 제외하자는 형법 일부개정법률안이 '박수홍법'이라는 이름으로 발의된 바 있다. '혈연' 가족이라는 '절대적 관계'는 한국 사회에서 조금씩 변하고 있다. 
 
방송인 박수홍이 지난 2023년 3월 15일 오후 서울서부지방법원에서 횡령 혐의로 구속기소 된 친형의 속행공판에 증인으로 출석하며 입장을 발표하고 있다.
▲ 친형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하는 박수홍 방송인 박수홍이 지난 2023년 3월 15일 오후 서울서부지방법원에서 횡령 혐의로 구속기소 된 친형의 속행공판에 증인으로 출석하며 입장을 발표하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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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취재 협조 : 282북스. 282북스는 우리 사회 사각지대의 사회적 스토리를 발굴하고 당사자들의 목소리를 담은 문화예술 콘텐츠를 제작해 이슈를 제기하는 사회적기업입니다. 282북스에서는 2023년 10월 탈가정 청년 에세이집 '어떻게 생각해?'를 내고, 탈가정 청년 당사자를 위한 오픈채팅방을 운영하고 있다.


태그:#가족절연, #가족관계등록부, #세대분리, #기초생활수급자, #친족상도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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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부터 오마이뉴스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팟캐스트 '말하는 몸'을 만들고, 동명의 책을 함께 썼어요. 제보는 이메일 (alreadyblues@gmail.com)로 주시면 끝까지 읽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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