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6.20 11:55최종 업데이트 24.06.20 1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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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한 이름을 가진 동명이인 '오마이뉴스 기자 박정훈'과 '공공운수노조 부위원장 박정훈', 두 사람이 편지를 주고받으며 각자도생의 사회에서 연대를 모색해 나갑니다. [편집자말]

지난 13일 서울 마포구 한국성폭력상담소에서 '밀양 성폭력 사건, 피해자의 삶에서, 피해자의 눈으로, 피해자와 함께 말하기' 기자간담회가 진행되고 있다. ⓒ 연합뉴스


정훈님, 2004년 '밀양 성폭력 사건'이 20년 지나 다시 재조명되고 있습니다. 누리꾼들이 가해자로 추정하는 한 남성이 유명 유튜브 채널에 등장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6월 초부터 온라인 커뮤니티 등에서 가해자 색출과 신상 공개가 시작되고 있어요.

한국성폭력상담소 자료에 따르면 피해자는 1년여 가까이 44명의 가해자에 의해 고통받았습니다. 수사 과정에서도 피해자를 보호해야 할 경찰이 "밀양물을 흐려놓았다" 등의 말로 2차피해를 입혔습니다. 수사 과정에서의 보호도 미흡해, 가해자 가족으로부터의 압박과 모욕에 피해자 가족을 노출시켰고요. 


검찰은 44명 가운데 10명만 기소하고, 20명은 송치, 13명은 '공소권 없음'으로 기각했습니다. 재판부는 기소된 이들에게조차 전과가 남지 않는 '소년부 송치' 결정을 내렸습니다. 피해자가 합의했고 평온한 학교생활을 하고 있다며 면죄부를 준 것이지만, 실상 합의는 아버지의 강요에 의한 것이었고 피해자는 학교를 결석하고 가출한 상태였습니다.

일상 회복과 치유를 원했던 피해자는 사건이 세상에 알려진 이후 더 큰 상처를 입었습니다. 서울로 전학을 갔지만, 가해자 부모가 탄원서를 써달라고 찾아온 후로는 학교도 그만뒀다고 합니다. 

가해자는 전과 기록도 남지 않았는데, 피해자는 여전히 고통 속에 살고 있습니다. 이미경 한국성폭력상담소 이사에 따르면 피해자는 "주거환경도, 사회적 네트워크도, 심리적·육체적 건강도 불안정한 상황"이고 "정식취업이 어려워 아르바이트 및 기초생활수급비로 생계를 이어오고 있다"고 합니다. 

20년이 지났지만 분통 터지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일사부재리 원칙에 따라 수사도, 판결도 다시 할 수 없다고 합니다. 이런 이유로 대중이 직접 심판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습니다. 일명 '사적 제재'입니다. 이런 여론을 등에 업고 유튜버들은 가해자 신상 공개와 저격 콘텐츠를 만들어내고, 사람들은 환호합니다. 

피해자의 동의를 받지 않고도 '동의받았다'라고 주장하거나, 피해자와의 통화나 판결 내용을 무단으로 올리는 유튜버까지 등장했습니다. 심지어 가해자를 잘못 지목해 관련 없는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기도 합니다. 언론들은 그러한 콘텐츠와 이에 대한 반응을 중계하다시피 하며 조회수를 끌어당깁니다. 사람들이 '정의'와 '응징'을 앞세우는 사이, 피해자의 삶은 또 뒷전이 됐습니다. 참 착잡한 현실입니다.

왜 연대하지 않고 심판하는가

"앞으로도 유튜버의 피해자 동의와 보호 없는 이름 노출, 피해자를 비난하는 행동은 삼가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경찰, 검찰에게 2차 가해 겪는 또 다른 피해자가 두 번 다시는 나오지 않기를 바라요. 잘못된 정보와 알 수 없는 사람이 잘못 공개되어 2차 피해가 절대 생기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지난 13일 한국성폭력상담소 기자회견에서 대독된 피해자 자매의 입장입니다. 피해자가 원하는 것은 무분별한 가해자 지목과 신상 공개가 아니라, 자신에 대한 보호와 평안한 일상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대목입니다. 동시에, 이 말은 시민들을 향해 가해자를 찾아내고 심판하면서 분노를 해소하는 '판관'이 아니라, 피해자의 곁을 지키는 '연대자'가 되라는 요청이기도 할 것입니다.

온라인상의 판관들은 책임지지 않습니다. 그러한 행태에 열광하는 이들도 '나쁜 사람을 처단하는 것'에 대리만족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번 '가해자 신상 공개' 사태에서 보듯 사실관계의 진위는 큰 의미가 없어 보이기까지 합니다. 판관 입장에서는 우월적 지위에 서서 '흠결 있는' 누군가를 재단하고 심판한다는 사실이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틀려도 반성하지 않고 판관 노릇을 계속하는 유튜버들이 많을 수밖에요.

온라인상 심판의 대상이 꼭 가해자를 향하는 것만도 아닙니다. 이번 '밀양 성폭력 사건'처럼 오지목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사소한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커뮤니티 여론에 휩쓸려 몰매를 맞는 경우도 많습니다. 심지어 '사이버렉카'의 저격 대상이 되는 경우도 있고요. 노조 활동을 하고 계시는 정훈님에게도 이러한 분위기는 위협이 될 수밖에 없을 겁니다.

곳곳에서 판관들이 심판하면 우르르 몰려가 구경하는 행태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분노 표출과 정의 구현이라는 탈을 썼지만, 실상은 놀이에 가깝습니다. 모두가 욕하고 있으니 고민할 필요도 없습니다. 정의 편에 선다는 (정체가 불분명한) 효능감까지 있습니다. '죄를 지었으니 벌을 받아야 한다'며 비난하고, 조준이 잘못됐거나 소위 '떡밥'이 떨어지면 다른 곳을 찾으면 됩니다. 그러니 얼마나 쉽고 즐거운 일입니까.

반면 연대자는 어렵습니다. 정훈님도 그러한 일을 하고 계시지만, 책임을 지는 일이고 기꺼이 마음을 쓰는 일이라서 그렇습니다. 연대는 자신의 흠결을 숨기고, 누군가의 흠결을 욕하고 평가하는 일과도 거리가 멉니다. 타인을 믿어야 하며, 그 때문에 '모난 돌'이 되는 용기를 낼 수 있어야 합니다. 나의 부족함과 못남을 자각하고 성찰해야 될 때도 생깁니다. 연대자가 되면 자연스럽게 같이 싸우게 되고, 같이 싸우지 못할 때는 죄책감을 느끼게 됩니다. 

한 명의 피해자라도 줄이는 길
 

2016년부터 2018년까지 발생한 '교제살인' 108건 중 피해자가 죽음에 이르기 전 폭행 등 신고로 가해자에 대해 경찰이나 검찰 수사를 받았거나 재판까지 이뤄진 경우는 19건이었다. 공권력은 '살인의 전조'를 분명히 알고 있었다. (사진은 기사 내용과 관련 없음) ⓒ 이정환

 
판관은 결국 어떤 사건이 일어난 후에 심판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성향을 가진 이들이 많아진다는 것은 우리 사회가 그만큼 공정하고 정의롭지 못하다고 느끼는 이들이 많다는 이야기이겠죠. 하지만 이들의 한계 역시 명백합니다. 대체로 '사후적 징벌'에만 관심 있을 뿐, 범죄 등의 피해가 일어나지 않도록 시스템을 만드는 데는 큰 관심이 없으니까요.  

최근에 저는 한 북토크에서 교제폭력(데이트폭력) 상담을 전문으로 하는 심리학자를 만나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연인에게 폭력 피해를 입었을 때 곧바로 헤어지면 좋겠지만, 친밀한 관계이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어려워하는 경우가 많다. 가해자가 (반성한다면) 상담 등을 받도록 유도하는 것도 방법일 듯한데, 선생님은 어떻게 조언하시냐."

그는 곧바로 "저는 단호하게 말합니다"라고 답했습니다. 한 번 폭력 피해를 입은 상황을 그냥 넘어간 뒤, 그다음에 자신을 찾아올 때는 매우 심각한 피해를 입은 상황이 많다면서 말입니다. 그 말을 듣고 슬프고 오싹했습니다. 수많은 교제폭력 피해자들 곁에는 도와주고 연대할 사람이 필요하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연대는 누군가의 회복을 도모하는 동시에, 사건에 개입해 추가적인 피해를 막는 역할도 합니다. 지속적이고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교제폭력, 성폭력의 피해자들을 보호해 주고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움직임인 것입니다. 개인의 손길이 모든 곳에 닿지 않으니, 이를 시스템화하는 것이 정부나 지자체의 역할일 것이고요.

재점화된 밀양 성폭력 사건과 교제폭력에 대한 북토크를 떠올리면서 최근 일어난 수많은 교제살인 사건들을 생각했습니다. 최근 두 달간 보도된 사건들을 볼까요. 

이별 통보를 이유로 여자친구를 살해한 '하남 교제 살인사건', '강남역 의대생 교제살인 사건', 가해자가 전 여자친구의 집에 무단침입하고 폭행해 사망에 이르게 한 '거제 교제살인 사건', 베트남 호텔에서 성관계 거부를 이유로 여자친구를 죽인 "베트남 교제살인 사건', 광진구 한 다세대주택에서 여자친구를 흉기로 찔러 죽인 '광진구 교제살인 사건', 60대 남성이 교제하던 여성이 헤어지자고 하자, 여성과 그의 딸까지 죽인 '강남구 오피스텔 교제살인 사건'까지... 살인미수나 폭행, 방화 등 따지자면 이루 말할 수없이 많습니다.

최근 들어서야 교제폭력의 심각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지만, 여전히 법률의 미비로 가정폭력이나 스토킹처럼 명백히 '범죄'로 규정되지 않습니다. 또한 친밀한 관계에 의한 폭력인지라, 손쉽게 은폐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한국여성의전화에 따르면 2023년 한 해 동안 언론에 보도된 '친밀한 관계 내 여성살해' 피해자는 최소 138명, 살인미수 등을 포함하면 449명이라고 합니다. 언론에 보도되지 않은 사례까지 합하면 이보다 훨씬 많을 것입니다. 지난해 데이트폭력 112 신고 건수도 7만 7000여 건입니다. 그러나 교제폭력 피의자가 구속되는 경우는 2.2%밖에 되지 않았고요.

성폭력, 교제폭력 등은 대부분 가해자가 남성이고 피해자가 여성입니다. 판관은 '(나와 상관없는) 나쁜 남자들'이라고 비난하고 넘어가면 그만입니다. 하지만 연대자는 피해자를 보호하는 시스템을 만드는 동시에 '왜 그 남자들이 가해자가 되는지' 물어야 합니다. 그래야 사전 예방을 통해 더 많은 이들을 살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국 사회는 어떤 남자들을 길러내고 있는가
 

한국 사회는 어떤 남성을 길러내고 있는가. ⓒ pickpik

 
"특히 남자 청소년에 대한 성교육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 이것이 얼마나 비인간적인 행동인가에 대한 공감을 하고 있는지, 이런 교육이 이뤄지고 있는지, 대책들이 만들어지고 있는지에 대해 우리가 정말 반성을 하고 우리 사회가 변화하도록 여러 가지 조치가 있어야 된다고 생각한다."

밀양 성폭력 사건에서 피해자를 법률 대리했던 강지원 변호사가 2016년 <MBC 경남> 인터뷰에서 한 말입니다. '밀양 성폭력 사건'과 같은 일이 재발되지 않기를 바라며 우리 사회에 촉구한 부분입니다.

정훈님, 성폭력과 교제폭력 가해자의 압도적 다수가 남성이라면, 한국 사회에서 '남성됨'이 어떤 형태였는지 되돌아봐야 않을까요? 남성 지배의 가부장제 사회는 남성이 여성을 지배하고자 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거나 부추깁니다. 동시에 여성을 이끌거나 여성 위에 군림하는 남성을 '진짜 남성'으로 표상하기도 하고요.

그런 남성들이 우리 사회에 갑자기 등장한 것은 아닐 겁니다. 성평등하지 않은, 여성을 멸시하고 배제하는, 여성의 의사보다 남성의 욕구가 강조되는 그런 '차별적인 공기' 속에서 길러지는 것이겠죠.

정훈님과 저부터 내가 속한 집단이 성평등한지, 젠더폭력 피해에 둔감하지는 않았는지, 여성을 성적으로 도구화하는 문화를 당연하게 여기진 않았는지에 대해서 돌아봐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나아가 강 변호사의 말처럼 '우리 사회가 변화하도록 여러 조치가 있는지' 살펴보고 다 같이 감시하면 좋겠습니다. 밀양 성폭력 사건 피해자 자매는 지난 기자회견에서 우리에게 또 하나의 당부를 남겼습니다. 

"얼굴도 안 봤지만 힘내라는 댓글과 응원에 조금은 힘이 나는 거 같습니다. 혼자가 아니란 걸 느꼈어요. 너무 감사합니다. 잊지 않고 관심 가져주셔서 너무너무 감사합니다. 이 사건이 잠깐 타올랐다가 금방 꺼지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잠깐 반짝하고 피해자에게 상처만 주고 끝나지 않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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