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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싱턴 포스트> 지에 실린 이 책의 광고 문구가 인상적이었다. "반드시 두 권을 사라. 하나는 소장할 책, 하나는 선물할 책으로." 책을 다 읽고 나서 이 문장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그리고 실제로 여러 사람에게 이 책을 추천하기도, 직접 선물하기도 했다. 클레어 키건이라는 엄청난 작가를 알게 되고 그의 명문장들을 흡수할 수 있는 기회를 만나 매우 기쁘다. ​
 
이처럼 사소한 것들
▲ 책표지 이처럼 사소한 것들
ⓒ 다산책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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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18세기부터 20세기 말까지 아일랜드 정부의 협조하에 가톨릭 수녀원을 운영하며 불법적인 잔혹 행위를 저질렀던 '막달레나 세탁소'를 배경으로 전개된다. 자칫 모든 것을 잃을 수도 있는 선택 앞에서 고뇌하는 한 남자의 내면을 치밀하게 그려내고 있다. 짧고 담백하지만 섬세하면서 밀도 높은 문장들이 마치 '시'처럼 읽힌다. 옮긴이는, 반드시 이 책은 천천히 두 번 읽어야 한다고, 두 번 읽어야 비로소 작가가 진짜로 하고 싶은 이야기가 무엇인지 알 수 있다고 말했는데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작가는 사건의 상황과 배경과 인물들의 감정을 친절하게 설명하고 있지는 않다. 뭔가를 억누르고 자제하면서 독자들 스스로 상황 속에 몰입하게 만들고 그 과정에서 깊은 여운을 남긴다. 아울러 읽기를 멈추고 먹먹한 감정으로 고요히 사유하게 만든다. 작가는 사소한 것들처럼 보이는 평범한 일상들이 결코 사소하지 않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 같다. 독자들은 사소한 것들 안에서 찾아낸 작은 희망에서 위로를 받는다.

석탄 파는 일을 하는 펄롱은 자신의 삶에서 '아내 아일린과 딸들 말고 또 뭐가 있을까, 뭐가 중요한 일일까'라는 생각을 종종 했다.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는데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 수 없고, 뭔가 발전하는 것 같지도 않았고, 때로는 '이 나날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멈춰서 생각하고 돌아볼 시간이 있었다면 삶이 달라졌을지, 그렇지 않았을지 확신할 수 없는 채로 삶은 그저 흘러가고 있었던 것이다. 펄롱은 그 '새로울 것 없음'에 허무의 감정을 느낀 듯 보인다.

나이 들어가는 우리 역시 반복적인 일상,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일상, 변화 없는 삶에서 권태로움을 느낄 때가 있다. 때로는 권태를 넘어서는 공포의 감정이 엄습하기도 한다. 무의미한 일상을 하루하루 견뎌내다가 어느 순간 시들어 불쑥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면 얼마나 크게 후회하게 될지, 얼마나 억울할지 생각만 해도 두렵다. 펄롱도 그런 두려움에 휩싸였던 것이 아닌가 짐작해 볼 뿐이다.

수녀원 바닥을 기어다니며 걸레질을 하던 아이가 펄롱에게 "아저씨, 우리 좀 도와주시겠어요? 강까지만 데려가 주세요. 그거면 돼요. 아니면 대문 밖으로 만이라도 나가게 해주세요. 그럼 아저씨 집으로 데려가 주세요. 일하다 죽을 때까지 일할게요"라고 간절하게 도움을 요청했을 때, 외면하고 돌아섰던 펄롱은 죄책감에 휩싸였을 것이다.

아이린의 말처럼 '사람이 살아가려면 모른 척 해야 하는 일도 있는 것'인지, 아니면 '불의에 맞서 용기를 내는 것이 옳은 일'인지 어떤 것이 정답이라고 단정 지어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펄롱이 미시즈 윌슨에게 조건 없는 사랑을 받았던 것처럼 타인들 역시 세상을 향해 무조건적인 사랑을 베풀어야만 한다고 강요할 수도 없다. 삶은 제각기 다른 형태를 지니고 있고, 삶의 방향성 설정 역시 각자의 몫일 테니까 말이다.

얼마 전 SNS 피드에서 지나가는 시민들을 대상으로 가상 실험을 하는 몇 가지 영상을 본 적이 있다. 만삭의 임산부가 참외 한 봉지를 들고 가다 무거운 몸을 가누지 못해 바닥에 참외를 몽땅 쏟아내는 상황, 누가 봐도 취업 면접을 하러 가는 청년이 큰 건물 앞에서 넥타이 매는 방법을 몰라 끙끙대고 있는 상황, 몸을 제대로 가눌 수 없는 지체장애인 청년이 풀린 운동화 끈을 매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상황에서 행인들의 반응을 살피는 실험이었다.

슬쩍 쳐다보고 그냥 지나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들에게 다가가 쏟아진 참외를 주워 주고, 넥타이를 직접 매주면서 취업에 꼭 성공하기를 바란다는 따뜻한 덕담을 건네주기도 하고, 허리를 숙여 운동화 끈을 직접 매주고 청년이 찾고 있던 편의점까지 보폭을 맞춰 함께 걸어가 주곤 했다. 우리 일상 속에서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사소한 일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그냥 지나치지 않고 친절과 배려와 온기를 전하는 모습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영상을 보면서 깨달았다. 작고 사소한 것들이 한데 합쳐지고 겹쳐져 비로소 '하나의 삶'을 이루는 것이라는 사실을. 미시즈 윌슨이 펄롱에게 보여줬던 격려와 친절과 사랑이 펄롱의 삶을 포근하게 직조했듯이 말이다. 사소한 어떤 것일지라도 간절히 바라는 누군가에는 가장 위대한 것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각설하고, 펄롱은 저 문 너머에서 기다리고 있을 고생길이 예상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맨발의 아이와 손을 잡고 걸어가기로 결심한다. 단호한 펄롱의 행동에서, 비록 두려움에 압도당했을지라도 어떻게든 해낼 수 있을 거라는 기대와 확고한 믿음이 읽혀 독자들은 안도할 수 있었다.

구출해낸 아이로 인해 앞으로 겪게 될 고통이, 아이가 이전에 겪었던 혹은 앞으로 겪어야 할 고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자위했던 펄롱의 마음은 '할 수 있었는데 하지 않아서 후회할 일'은 없을 거라는 데에서 오는 기쁨이었을 것이라고 믿는다. 독자들은 펄롱의 신념이 담긴, 확신에 찬 감정과 태도에서 발산되는 해방감을 오롯이 흡수하면서 희열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클레어 키건의 <이처럼 사소한 것들>은 사소한 것들 안에서 건져낸 소중하고 의미있는 것들이 거대 서사로 읽히게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는 소설이다. 얇은 두께임에도 불구하고 아주 묵직한 내용을 담고 있다. 독자들로 하여금 '우리의 삶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질문하고 오래 사유하게 만든다는 것이 이 책이 지닌 탁월함이라고 하겠다.

마지막 페이지를 덮으면서, 소설은 끝났지만 다음 이야기가 이미 시작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펄롱의 삶이 여전히 흐르고 있다는 감각에 압도되어 책을 덮고 나서도 한동안 책표지에서 손을 뗄 수가 없었다. 오랜만에 만난 '내면의 깊숙한 감정을 건드려주는 소설' '기필코 살아내야 한다고 믿게 하는 소설'이었다. 시대를 초월해서 오래 읽힐 고전이 되기를 바란다.

이처럼 사소한 것들

클레어 키건 (지은이), 홍한별 (옮긴이), 다산책방(2023)


태그:#이처럼사소한것들, #클레어키건, #다산책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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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시도는 따뜻할 수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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