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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주 힐링캠프
 강신주 힐링캠프
ⓒ S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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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링, 힐링, 이제는 지겹기도 할듯 하건만 최근에 필자는 또 한 번 피곤한 경험을 해야만 했다.

바로 '길 위의 철학박사'라 불리는 강신주의 <힐링캠프> 출연이었다. 강신주와 <힐링캠프>의 만남은 분명 세간의 관심을 뜨겁게 달굴 만했고 시청률도 어느 정도 보장되었을 것이라 여겨진다. 하지만 그 빈약한 내용과 다소 오만한 듯한 이 전도사의 직설화법은 보는 내내 일종의 민망함을 자아냈다.

치료가 필요한 환자는 '개인'이 아닌 '세계'

강연 내내 강신주는 개개인들의 '실력'의 부족함이 아닌 '끈기'가 부족함을 지적하고 질타한다. 하지만 모 정치인이 정치 캐치프레이즈로 '저녁이 있는 삶'이란 문구를 들고 나올 만큼 우리 사회는 치열한 경쟁과 업무로 내몰리고 있다.

그럼에도 이 야박한 사회는 언제나 그렇듯이  모든 것을 희생시키는 기형적인 '끈기'를 강요한다. 이 사회에서 초인적인 끈기는 언제나 그 사람의 성패를 좌우하는 기준으로 작용할 뿐이다.

<힐링캠프>에 출연한 강신주는 분명 자신은 작금의 힐링 문화에 반대한다는 뜻을 강력하게 피력했지만 그 자신 역시 또 다른 힐링의 모순 어법에 빠졌음을 왜 눈치채지 못한 것일까. '끈기'를 강조하는 그의 모습은 마치 신자본주의의 또 다른 교활한 변신을 보는 듯했다.

'끈기'를 강조하는 '힐링'의 연원은 낯선 것이 아니다. 수지 개블릭이 <새로운 장르 공공미술>에서 인용하는 제임스 힐먼의 사례 하나를 꺼내본다(비록 공공미술과 관련된 논의의 책이긴 하지만 힐먼의 관련 책이 번역된 적이 없다는 점에서 부득이하게 위의 책에서 인용하고자 한다).

힐먼은 우리는 100년 동안 정신치료법을 소유해 왔지만 세계는 더 나빠졌다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한다. 그가 주장하기를 정신치료법이 우리의 개인적 만족과 한 개인의 성숙에만 집중하고 이를 강화하는 과정에서 오직 '내부'의 영혼에만 관심을 기울이는 오류를 범했음을 예리하게 파헤쳐 나간다.

즉, 개인이 처한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점들은 철저하게 간과된 채 오직 한 개인에게만 모든 인과관계를 부여한다는 것이다. 그런 관계로 치료는 늘 일시적이며 불안할 수밖에 없다. 힐먼은 정작 치료가 필요한 환자는 '개인'이 아닌 '세계'임을 강하게 피력한다.

이제 '힐링'이라는 단어는 소거되어야

강신주 역시 '나약한 먹잇감'을 찾아다니며 행하는 일시적 치술 요법은 그만두고 보다 현실을 지배하는 사회구조의 모순에 대해 직시해야 할 것이다. 어줍잖은 독설로 개개인의 삶을 재단하고 치유하고자 하는 강신주 식의 오만한 행동은 '강신주'라는 브랜드에 먹칠만 더할 뿐이다. 뿐만 아니라 그를 지지하는 수많은 청년들을 또 다시 절벽으로 내모는 그릇된 행위이다.

물론 그의 강연을 통하여 위안을 얻는 이들이 많다고 항변하는 목소리도 있을 것이다. 허나 구조적인 문제 대신 장사가 되는 언변만을 찬란하게 나열하는 그의 모습에서 일말의 위험성이 감지되는 것 또한 사실이다.

이제 '힐링'이란 위선적인 단어는 소거되어야만 한다. 문화평론가 문강형준은 신자본주의가 사랑하는 '힐링'에 함축된 이데올로기적 기능을 정확하게 파악한다. 그는 힐링이 단순히 "극소수의 승자에게 꽃을 안기는 자본주의의 실패를 가리는 심리적 차원의 스크린" 역할만을 맡지 않는다고 명시한다. '힐링'은 실패자들을 어루만짐으로써 이 불쌍한 중생들을 다시 경쟁으로 내모는 "고도의 무기"로써 기능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시대의 아픈 청년들이 내야 할 목소리는 바로 이러한 게임의 구조와 법칙 자체를 거부하는 쪽으로 모아져야 할 것이다. 또한 이 사회의 어른들 역시 지속적으로 관련된 문제점들을 들춰내야 함이 마땅하다. 하지만 비상한 두뇌를 지녔음직한 강신주는 이와 관련하여 단 한마디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는 말했어야만 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힐링'이 아닌 바로 '혁명'이라는 그 단순명쾌한 사실을.


태그:#강신주, #강신주 힐링캠프, #강신주 힐링, #강신주 철학 상담, #강신주 김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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