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우리나라에서 가장 흔한 병의 첫째 후보는 흔히 감기라고 부르는 급성상기도감염이다. 어른들은 1년에 평균 2번 이상 걸리고 어린이들은 그보다 훨씬 자주 걸리니 감기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흔한 병임에 틀림이 없다. 하지만 감기는 2주 정도 지나면 저절로 낫기 때문에 어느 한 시점(예를 들면 '오늘' 현재)에 감기에 걸려 있는 사람의 비율(시점유병률)은 생각보다 높지 않을 수 있다. 오뉴월 감기는 개도 안 걸린다는 바로 5월에는 더 그렇다.

반면에 '이 병'은 언제 조사하더라도 전 국민의 1/5에 해당하는 천만 명 이상이 앓고 있기 때문에 시점유병률의 측면에서 보면 단연코 우리나라에서 가장 흔한 병이다. 이 병은 주로 성인 남성에게서 많이 생기는데 질병관리본부에서 2009년에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성인 남자의 46.9%, 성인 여자는 7.1%가 이 병에 걸려 있다. 어린이들은 성인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걸리지만 그래도 남자 중고생의 9.6%, 여자 중고생의 3.3%가 이 병에 걸려 있다.

이 병의 질병코드는 F17이다. 의료계와 관련이 있는 사람들은 눈치를 챘겠지만 질병 코드가 F로 시작되는 다른 질환과 마찬가지로 이 병도 정신과영역의 질환이다. '물질의 반복된 사용 후에 발전하고 약물복용의 강한 욕구, 약물 사용에 대한 절제곤란, 유해한 결과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병의 특징이다.

이 병에 걸렸을 때, 즉 물질을 반복적이고 지속적으로 사용했을 때 발생하는 유해한 결과는 암, 심장병, 폐질환 등 주요 질환을 망라하고 있다. 특히 우리 국민 사망원인 1위를 차지하고 있는 암의 1/3은 이 병의 합병증으로 발생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병의 합병증이 하나같이 생명을 위협하는 중증 질환인지라 이 병에 걸린 사람들은 생명이 평균적으로 10년 정도 단축된다.

유해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특정물질을 반복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이 물질 속에 있는 니코틴 때문이다. 우리 몸에 흡수된 니코틴은 신속하게 뇌로 전달되어 뇌에 있는 수용체와 결합하고 이어서 도파민이라는 신경전달물질을 분비하게 된다. 이 병을 가진 사람들이 이 물질을 사용할 때는 느끼는 쾌락감, 그리고 스트레스와 불안감이 감소하는 효과가 모두 도파민 때문이다.

반면 니코틴이 계속 공급되지 않으면 안절부절못하고, 기분이 가라앉고, 민감해지고, 불안해지는 금단증상이 발생하게 된다. 도파민 분비에 따른 쾌락감을 느끼고 금단증상을 회피하고자 하는 것이 이 물질을 계속 사용하는 이유, 즉 중독의 핵심인 것이다.

이 물질의 사용은 니코틴에 의한 약리작용뿐 아니라 이 물질의 맛과 향과 같은 요인에 의해 더욱 강화된다. 또 이 물질을 사용하는 특정상황, 예를 들면 식사 직후, 화장실, 술자리 등과 연계되면서 조건반사화가 이루어진다.

개에게 종소리를 들려주고 먹이를 주는 일을 되풀이하면 먹이 없이 종소리만으로도 침을 흘리는 것처럼 특정상황에서 이 물질을 사용할 때마다 니코틴에 의해 분비되는 도파민으로 인한 쾌락이 각인되면 그 상황에서는 항상 이 물질을 찾게 되는 것이다. 이런 조건반사화는 뇌의 구조적 변화를 동반하기 때문에 좀처럼 없어지지 않는다. 따라서 이 병은 낫기도 매우 어렵거니와 낫더라도 술자리와 같이 조건반사화된 상황에 처하면 쉽게 재발된다.

이 병은 전염된다. 주위에, 특히 가까운 친구나 영향력이 있는 사람(예를 들면 부모나 선생님)사람이 이 병에 걸리면 자신도 이 병에 걸릴 위험이 굉장히 높아진다. 그런데 전염되는 방식이 특이하다. 보통의 전염병(법이 개정되어 현재는 감염병이 정확한 용어)이 감염된 사람(또는 동물)에 있던 세균이나 바이러스 같은 병원체가 탈출하여 새로운 사람에게 옮겨가는 방식으로 전염되는 데 반해 이 병에서는 사람 간에 옮겨다니는 병원체는 없다.

다른 사람의 행동을 모방하는 과정을 통해서 사람의 뇌에서 뇌로 바로 전달된다. 뇌에서 뇌로 전달되는 보이는 않는 정신적 실체를 표현하기 위해 밈(meme)이라고 용어를 쓰기도 하지만 아직 용어가 확립되어 있지는 않다. 어쨌든 물리적 실체가 아닌지라 전염과정에서 시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다. 만일 얼마 전에 인기리에 방영된 <시크릿가든>의 주인공 현빈이 이 병에 걸린 환자로 나왔다면 이 병 환자 수가 순식간에 늘어났을 것이다.

강력한 중독성과 함께 시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 전염 특성 때문에 담배중독은 지난 100년 동안 전세계적으로 대유행하고 있다. 세계보건기구에 따르면 담배중독의 합병증인 심장마비, 암, 뇌졸중 등의 질환으로 사망하는 사람의 숫자가 한해에 5백만 명을 넘는다.

담배중독에 대처하기 위해서 세계보건기구의 주도로 담배규제기본협약(WHO FCTC)이 맺어졌고 우리나라를 포함한 172개 국가가 가입하였다. 이 협약에 가입한 국가들은 담배중독 환자 수를 줄이기 위해 담배가격 인상정책, 담배포장 및 라벨정책, 간접흡연 보호대책, 담배내용물 관리, 담배광고 및 판촉제한정책 등을 시행할 의무를 지닌다.

우리나라도 협약가입국으로 이런 정책들을 부분적으로 시행하고 있지만 전혀 만족스러운 수준이 아니다. 담배가격 인상은 몇 년째 제자리 걸음이고 발암물질로 가득한 담배내용물을 관리할 생각은 엄두도 못 내고 있다. 담배중독은 그 환자 수가 무려 천만 명이 넘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흔하고 가장 심각한 질환이지만 이 질환에 대응하기 위한 변변한 마스터플랜도 없고 대통령이나 장관이 이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표명한 적도 없다.

5월 31일은 세계보건기구에서 정한 금연의 날이고 올해 금연의 날 주제는 바로 담배규제기본협약이다. 금연의 날 포스터에 제시된 것처럼 담배규제기본협약은 소화기나 구명튜브처럼 바로 생명을 구할 수 있은 직접적인 수단이다. 2012년 담배규제기본협약 당사국 총회는 우리나라에서 개최된다. 개최국 위상에 걸맞는 획기적인 금연정책이 시행되기를 기대해본다.


#담배중독#담배규제기본협약#금연의 날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환경의학 전문가로서 우리 사회가 좀더 건강하게 하는데 관심이 많음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