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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일, <경향신문>에 주목할 만한 기사가 실렸다. '혁명가와 골프'라는 제목의 글이다. 내용인 즉, 체 게바라와 카스트로가 골프를 치는 모습을 담은 사진에 관한 짤막한 감상이었다. 분명 혁명가와 골프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다. 골프란 상위계층이 향유하는 대표적인 스포츠아닌가? 다분히 상징적인 골프를 취미로 가진 혁명가의 존재는 언뜻 외설적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따라서 '혁명가와 골프'의 저자가 사진을 보고 '리무진 진보주의자'를 연상하는 것은 전혀 무리가 아니다. 좌파란 자신이 지향하는 가치를 스스로의 삶으로서 예시해야만 할 테니 말이다.

 

과거 벤야민은 '진정으로 혁명적인 지식인은 자신이 속한 계급을 우선 배반한다'고 말한 바 있다. 다시 말해, 지식인 스스로가 자신이 처한 사회적 조건이 노동자들의 그것과 같다고 인식할 때, 진정한 진보적 주장(삶)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는 노동자가 아니면서 노동자를 대변해야만 하는 진보적 지식인들의 내적 고뇌를 (다시) 대변해주는 언명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부르주아 문화의 중핵을 차지하고 있는 골프를 취미로 가진 체의 모습은 과연 혁명가의 도리를 벗어난 것일까? 따라서 골프를 치는 체의 모습을 담은 사진은 그의 위선을 여실히 보여주는 증표가 될까?

 

물론 결론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상황은 정확히 반대다. 골프치는 체의 모습은 오히려 그의 투철한 혁명정신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사진을 보라. 골프를 치는 체와 동료들의 모습이 위선자로서의 부끄러움을 감당하고 있는가? 중요한 것은 사진 속 체가 골프에 매우 열중하며 즐기고 있다는 것이다. 마치 퍼트에 집중하는 자신의 모습이 사진으로 찍혀 온세상에 퍼지길 기원하는 것처럼.

 

 여기서 던져야 할 질문은 이런 것들이다. 즉 골프가 상징하는 상위계층의 문화와 하위계층 (노동자) 문화의 경계는 누가 부여한 것인가? 상위계층의 향유와 하위계층의 향유는 서로 이질적인 것이며, 그리하여 전혀 다른 공간에서 구현되어야 할 내적 당위성이라도 있는 것인가? 도대체 누가 골프를 취미로 가질 수 있는 자격을 승인하는가?

 

바로 이 지점에서 랑시에르의 '감각적인 것의 재분배'에 관한 논의가 요청된다. 랑시에르는 각자 사회구성원들이 자신의 물리적 활동 혹은 시간과 공간에 대한 감각적 경계설정의 배치에 관해 주목한다. 그에 따르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지배계급이 소유하는 것은 단지 생산수단만의 차원이 아니라, 피지배계급의 활동을 제한하는 시공간의 경계와 배분 자체를 설정할 수 있는 권한까지도 함께 내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상위와 하위 계층의 향유에 관한 위계가 결정된다. 다시 말해 만인이 누릴 수 있어야 할 문화향유에 대한 권리에 일방적인 질서가 생기고, 이것이 고착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삐에르 부르디외가 밝힌) 상징자본의 소유에 따른 문화와 취향에 관한 '구별짓기'는 철저하게 전복되어져야 할 것들이다. 문화의 향유에 대한 고착된 감각 자체를 재배치하고, 전복시키는 일이야말로 진정한 '변화'의 시작이 될 수 있다. 체는 골프를 치는 다분히 상징적인 제스처로서 자신의 진보적 감각을 재현했다(그렇다면 문제는 골프를 치는 체가 아니라 이를 이질적으로 보는 우리의 시선 자체가 된다). 그러므로 체의 지지자들은 골프를 향유하는 그에 대해 고민할 필요가 없다. 설령 그것이 당시의 미 대통령 아이젠하워를 조롱하기 위한 게 아니었다고 해도 말이다.


태그:#체 게바라, #골프, #문화, #향유, #위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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