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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서부터 난 공부를 좋아했다. 초등학교에 들어가서 숫자와 한글을 배우며 얼마나 즐거웠는지 모른다. 엄마는 일찍 돌아가셨고, 함께 사는 아버지와 할머니는 한글과 숫자를 전혀 모르는 분들이셨다.

 

한글과 숫자를 알아가는 나를 할머니와 아버지는 너무나 신기해하셨고 아버지는 술만 취하면 나에게 책을 읽어보라고 하시고 벽지로 사용한 신문을 읽어보라고 하셨다. 할머니도 내가 밥상을 책상 삼아 공부를 할라치면 소리 내서 읽으라고 성화를 하셨다.

 

"소리 내서 읽어야 공부가 되는 것잉께. 빨리 소리 내서 읽어봐라. 할미도 좀 듣게..."

가족 중에서 유일하게 글씨를 아는 난 우리 집에서는 영웅이었다.

 

공부가 즐거워 열심히 했고 초등학교를 다니는 내내 난 공부 잘한다는 소리를 들으며 자랐다. 중학교에 들어가서는 공부를 아무리 열심히 해도 성적이 그리 좋지는 않았다. 버스가 없어서 2시간을 넘게 산길과 논둑길을 걸어서 학교에 다녀야했던 나는 밤마다 코피를 흘리기 일쑤였고 학교 오가는 길이 너무 힘들어 집중도 잘 되질 않았었다. 공부에 욕심이 많았던 나는 그래도 공부가 재미있어서 늘 책을 끼고 살았었다.

 

책을 많이 읽고 싶었지만 지지리도 가난한 우리 집엔 어디서 났는지 모를 하이틴 소설책 한 권이 있었고 난 날마다 그 책만을 읽고 또 읽었다. 중학교 졸업을 앞두고 친구들은 고등학교를 어디로 가야할지 고민을 하고 있었지만 나는 고민 할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나는 공부가 너무나 하고 싶었지만 가난한 아버지와 할머니는 나를 중학교만 마치면 서울로 보낼 생각을 진즉부터 하고 있었고 나도 당연히 고등학교 갈 생각은  꿈도 못 꾸었다.

 

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동네 어르신들은 모이기만하면 나를 서울 어느 집에 식모로 보내면 공부도 하게 해준다는데 거기로 보낼까, 아니면 누구네 딸이 바느질하는 공장(봉제공장)에 다닌다는데 거기로 보낼까를 의논했다. 선택의 여지가 없던 나는 결국 부산에 있는, 미애언니가 다니는 봉제공장에 취직을 했고 재봉사 보조로 일을 시작했다.

 

첫 월급을 타고 내가 제일 먼저 한 일은 책을 사는 일이었고 가난한 시골에서 잘 먹지도 못하고 자란 난 과자와 음료수를 사 먹었다. 가난은 그렇게 공부하고 싶던 내 길을 막아버렸지만 나는 포기하지 않고 월급을 타면 늘 책 사는 걸 1등으로 했었다.

 

학교에 다니진 못했지만 기회만 되면 책을 사보고 혼자서 공부도 게을리 하지 않았었다.

어려운 책은 배움의 길이가 짧아 읽지 못했지만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선에서 많이 사 보았다. 책 속에 길이 있었고 힘겹게 살면서도 내가 비뚤어지지 않게 살려고 노력했던 것도 다 책 덕분이었다.

 

결혼해서 아이 둘을 낳고서 살면서 참 어려운 일이 많았다. IMF때부터 지금까지 우리 집 형편은 별로 나아진 게 없다. 아들은 초등학교를 다니는 내내 학원을 한 번도 못 보내보고 중학교에 들어갔다.

 

학원에 보내지 못하는 대신 아이들에게 책을 사서 많이 읽게 해줬고 학원에 다녀보지 못 했지만 아들은 백일장에 나가서 상을 타오기도 했고 학교에서 글짓기를 해서 상을 타오기도 해서 나를 기쁘게 했다. 아들은 그렇게 학원도 보내지 못했는데, 공부 욕심이 많은 초등학교 3학년 딸은 날마다 학원에 보내달라고 나를 졸랐다.

 

돈이 없다는 말은 못하고 미루고 또 미루었는데 어느 날, 딸이 친구 학원 앞에서 혼자 쭈그리고 앉아있는 딸을 발견했다. 고개를 푹 숙인 채 혼자서 땅바닥에 그림그리기를 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뭐하냐고 물으니 친구 학원 끝날 시간을 기다린다는 것이었다.

 

딸아이는 학원이 가고 싶어도 보내주지 않자 날마다 친구 학원 앞에서 학원을 쳐다보며 친구가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같이 놀곤 했던 것이다. 눈물이 쏟아졌다. 못난 내가 미웠다. 못난 남편이 미웠다.

 

난 힘들었지만 다음 날 아이에게 학원에 다니라고했고 아이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아이가 되어 활짝 웃었다. 학원에 다닌 이후로 딸아이는 날마다 신이 나서 다닌다. 그 후, 학교에서 시험을 봐도 항상 상을 받아오고 학원에서도 공부 잘하는 아이로 뽑혀 대회에 나가서 상과 메달을 받아온다. 학원 선생님 말을 들으니 다른 아이들 한 페이지 나갈 때 딸아이는 두 페이지씩을 나갈 정도로 공부를 열심히 한다고 했다. 미안하고 고마울 따름이다.

 

그렇지만 나는 공부하라는 말을 아이들에게 절대 하지 않는다. 아무리 공부 잘해도 올바른 인간이 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으니 예의에 어긋나는 일을하면 나는 가차 없이 매를 든다. 훗날, 나는 못했지만 내 딸아이가 훌륭하게 성장하여 엄마처럼 또 딸처럼 공부가 하고 싶어도 못하는 사람들에게 힘이 되어주기를 간절히 바라본다.

덧붙이는 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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