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나는 소비자다, 고로 까칠하다

누군가 당신에게 전화를 걸어, 또는 문자로, 아니면 팩스로 상품을 광고한다면? 불법이다. 3천만 원 이하의 벌금을 내야 한다. 물론 사전에 당신이 광고를 받아보겠다고 동의했다면 예외다. 인터넷 상에서 답이 뻔한 경품 퀴즈에 응모하고 나면 보험에 들어라, 인터넷을 바꿔라 등등 광고 전화나 문자를 받을 것이다. 경품을 받자고 응모하려면 당신 정보를 좀 내놓으라는 것이고, 그 개인정보는 합법적으로 광고를 보내는데 이용된다.

사전에 동의하지 않았다면 광고할 수 없는 것을 '옵트 인 방식'이라 부른다. 우리나라는 2005년 3월 31일부터 이 제도를 도입했다. 전화를 이용한 모든 광고는 사전에 동의한 사람에게만 보낼 수 있다. 이메일은 예외다. 당신에게 지겹게 날아오는 광고스팸문자, 한 건당 삼천만 원짜리다. 그 사람들, 돈도 많다.

[관련기사 : 옵트인 시행후 휴대전화 스팸 60%쯤 감소]

나는 특히 팩스 광고에 민감하다. 팩스는 전화나 문자처럼 스팸 등록을 해둘 수도 없다. 아무 때나 울리고 싶을 때 울려서는 자동으로 철커덕거리며 인쇄를 해 토해낸다. 난 그럴 때마다 내 자유의지가 조금씩 짓밟히는 심정이 된다. 대체 이 자들은 무슨 권리로 내 시간과 자원과 분노를 날치기해가는 것일까?

개인이 보내거나 작은 업체라면, 전화해서 팩스 보내지 말라고 말해두고 끊는다. 어쩌랴. 옵트 인 방식이 무언지, 팩스로 광고물을 보내면 왜 죄가 되는지도 모르는 분이 많다. 먹고 살자고 보냈습니다라는데, 딱히 말을 더 할 것도 없다. 그저 부디 제 번호로 두 번 보내지는 마십시오, 부탁드릴밖에.

문제는 대기업(정확히 말하자면 그 회사 대리점들)들이다. 최근에 겪은 사례는 이렇다. SK 브로드밴드와 SK 텔링크라는 회사(의 대리점)가 같은 내용으로 연달아 세 번이나 스팸 팩스를 보냈다. SK 브로드밴드 키폰전화를 무료로 준다는 것이다. 회사도 다르고 대리점도 다른데 문안도 디자인도 동일한 것을 보니, 대리점 차원에서 만든 광고가 아니라 본사에서 시킨 게 아닌가 의심스러울 정도다. SK가 휴대폰 시장이 포화상태에 이르자 유선전화망으로 사업영역을 확대한 모양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광고란 불가피한 것이다. 광고하고픈 대로 하라. 텔레비전 광고든 길거리에서 경품을 나눠주든 당신들 마음대로 하라. 단 법에서 허용한 한도 내에서 하라. 왜 내 시간과 자원과 분노까지 당신들 마음대로 좌우하려 드는가?

사실 난 SK에게 조그만 호감을 갖고 있었다. 그룹 회장인 최태원씨가 주주총회 자리에서 이사로 임명된 임원진에게 큰절을 했다는 가십 때문이다. 물론 쇼이지만, 그러면 또 어떤가. 지도자란 때론 그런 쇼맨십을 통해서 자기를 낮추는 모습을 보일 수도 있는 법이다. 아무튼 그룹 총수가 큰절을 올렸으니, 그 절을 받은 임원은 얼마나 감격스러워 했을까. 분골쇄신 열심히 일하겠다 다짐했으리라. 그런데 그 결과가 고작 불법 팩스 광고질인가?

팩스광고를 보낸 사람은 대리점 사장이나 영원사원일 것이다. 설마 SK 정도 되는 회사가 앞장서서 불법을 저지르면서까지 영업을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대리점이 한 일이니 본사에는 책임이 없는 것일까?

본사 책임이 더 크다. 대리점 교육을 잘 못 시킨 죄가 크고, 시정을 요구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또 동일한 팩스를 받았다. 내 팩스번호를 삭제하겠다는 약속을 받았음에도 다시 또 팩스가 오는 걸 보니, 그 회사 시스템에 무언가 중대한 결함이 있는 게 분명하다. 아니면 고객 알기를 껌 종이만도 못하게 여기든가. 껌 종이는 나중에 쓰려고 주머니 안에 넣어두기라도 한다. 약속하고 안 지키면 껌 종이만도 못한 취급 아닌가.

웃기는 일은 더 있었다. SK 브로드밴드 고객상담실로 전화를 해서 대리점 교육을 담당하는 부서 전화번호를 알려달라고 요청했다. 답변은 간단했다. 그런 부서 없단다. 기가 막혀서, "아니 그 회사는 대리점 관리부서도 없단 말이오?"라고 묻자, 역시 간단명료하게 답변한다. "예, 없습니다." 그리곤 할 말 있으면 자기에게 하란다.

내가 상담사를 낮추어 보는 게 아니라, 그들이 이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없잖은가. 내가 원하는 것은 대리점 교육을 담당하는 부서 책임자에게, 당신들 교육 시스템에 심각한 문제가 있으니 시정하란 말을 전하고, 책임 있는 사람의 사과를 받길 원했던 것이다. 전화 상담사가 개입할 여지가 전혀 없지 않은가. 그런데 그런 부서가 없다는 것이다.

참 괴이한 회사다. 분명히 대리점은 여기저기 있어서 그들이 불법으로 팩스를 날리고 있는데, 그것도 버젓이 SK 브로드밴드란 회사 상호를 사용해서, 정작 그런 대리점을 담당하는 부서는 없다고? 그 말을 믿으란 말인가?

우여곡절 끝에 고객보호팀인가 고충처리팀인가 과장과 통화가 연결됐다. 그 사이 내가 거쳐야 했던 수많은 사람들은 기억도 나지 않고 기억하고 싶지도 않다. 미안함이라곤 전혀 느낄 수 없는 상투적인 죄송멘트와 발뺌과 기만(대리점 담당 부서 자체가 없다니, 그걸 믿으란 건가?) 속에서 한 시간 반이 흘렀다. 나도 나름 바쁜 사람이다. 하지만 오기와 분노가 내 오전을 지명해버려, 처리해야 할 일들은 그저 책상 위에서 빈둥거리며 날 찜찜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이봐, 잊어버려. 어차피 둥글둥글 살아가는 게 좋은 세상이야. 네가 핏대 세워봐야 바뀌는 건 없다고. 말이 좋아 고객님이지, 언제 고객님 대접 받아봤어? 당신은 정작 고객 대접 제대로 해봤어? 첫 번째 팩스 보낸 치 말마따나 넌 불법 안 해봤어?

그럼에도 내가 끝까지 수화기를 붙들고 있었던 이유는, 그들이 대기업이기 때문에, 그들이 언필칭 윤리경영을 선언했고, 그 잘난 윤리경영 강령을 홈페이지에 걸어뒀기 때문에, 그렇지만 대기업이나 윤리경영이란 이름에 반하는 행동을 일삼고 있기 때문에, 그리고 결정적으로 나는 소비자이기 때문에 전화기를 내려놓지 못했다.

마침내 통화에 성공한 고객보호팀(이던가?)의 장 과장은 놀랍게도 나와 9일 전에 통화했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 내게 사과를 하면서 다시는 이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조처하겠다던 그 사람, 대기업이 이러면 되겠느냐는 내 항변에 공손히 시정하겠노라고 말하던 그 사람이었다. 물론 이번에도 그는 공손했고, 거듭 사과를 했고, 다시는 이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조처하겠다고 약속했다.

한 번이나 속지 두 번은 어림없다. 나는 아퀴를 지었다. 본사 감사실로 내용증명 및 배달증명으로 이러저러한 일이 있었고, 그것이 세 번이나 되풀이 됐으며(세 번 중 한 번은 SK 텔링크란 회사다. 텔링크든 브로드밴드든 내겐 다 똑같은 SK일 뿐이다), 한 번만 더 불법 팩스를 보내면 SK를 상대로 만원짜리 소송을 걸고, 보도자료를 내서 모든 언론기관에 알리겠다고 경고했다.

싸우는 건 불편한 일이다. 그렇지만 난 앞으로도 적어도 대기업이 이런 식으로 무책임한 짓거리를 한다면 기꺼이 싸움닭을 자처할 참이다. 나는 소비자다. 너희들을 먹여 살리는 사람이다. 그러니 제발 호구로 보지 마라. 그리고 우리나라 법치국가다. 제발 법 좀 지켜라. 네깟 것들이 뭔데 법 알기를 여물통에 뒹구는 건초더미처럼 함부로 씹어대는가.

덧붙이는 글 | 다음 카페, 무브온 등에 동시 게재합니다.



#불법팩스광고#SK브로드밴드#소비자정신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