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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감사의 계절인 오월에 나는 아주 특별한 체험을 했다. 5월3일, 경기도 광주 '나눔의 집'에서 맞이하는 효도와 위로의 잔치에 참여하여 쓸쓸하신 그곳 어른들과 함께 모처럼 생기발랄한 모습으로 즐겁게 해 드리는 것이 나의 방문 목적이었다. 그러나 위로를 드리러 간 내가 오히려 크나큰 감동과 각성의 체험을 한아름 안고 돌아오게 되었으니 '되로 드리고 말로 받은' 셈이다. 

 

나눔의 집은 조선인 모두가 고통스러워하던 일제 강점기 당시 억울하게 참혹한 위안부 생활을 하신 할머니들께서 모여 사시는 곳이다. 사실상 2만 명이 넘는 위안부가 존재하였던 것으로 밝혀졌지만, 그 중 대부분은 현지에서 생을 마감하였고, 살아 돌아온 일부 중에서도 극소수만이 생존해 계신다고 하니 놀랍고 안타까운 마음이다.

 

일본군이 '군위안부'를 만들 당시, 식민지 조선여성들의 사회적 위치는 매우 열악한 상황이었다고 한다. 여기에다가 일본이 침략 전쟁에 돌입하면서부터 아예 여성 매매가 합법화되는 수준에 이르렀고, 이에 일제는 군인과 군 위안부를 설치함으로써 군사적인 효과를 꾀하였다고 한다. 세계 전쟁사상 공식적으로 위안부를 이끌고 전쟁터를 돌아다닌 나라가 없다니, 오늘날 공식적으로 인정과 사과를 하지 않으려는 일본도 그 창피스런 조상의 태도에 대해 수치스러움을 내심 알긴 아는가보다.

 

위안부에 끌려간 여성들은 대부분이 10대 미성년인 소

녀들이었다. 일제는 이들에게 공장 취업이나 돈을 많이 벌게 해 주겠다는 유혹을 해 이들을 위안소로 끌고 갔다. 이것으로는 부족했는지 납치, 유괴, 인신매매 등도 공공연히 이루어졌다. 이렇게 모인 소녀들은 군용트럭과 군용 열차에 실려서 이동하였다. 군용트럭이 동원되었는데도 개인적 차원이란 말인가! 간간이 드러나는 각종 공문서도 명백히 이 행위들이 상부의 지휘 아래 조직적으로 이루어진 범죄행위였다는 증거를 말하고 있는데 말이다.

'빨리 돈을 벌어 고향에 가서 결혼도 하고 행복하게 살아야지.' 하는 소녀들의 마음은 잔인한 일제에게는 택도 없는 요구였던 것일까. 군수공장에서 남성 노동력만으로는 모자라 여성 노동력까지 필요하다는 명목의 '여성 근로 정신대'라는 이름으로 모인 이 십대 소녀들은 곧 군 위안부로서 동원되어 성 노예의 삶을 강요당하였다.

 

위안부가 생활했던 한 평 남짓한 모형 위안소의 안에 들어가서, 군 위안부의 참혹한 생활을 국사 책에서만 보았던 것과는 정말로 크게 다른 분노와 현실감을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덩그러니 놓여진 침상 하나, 그 옆에 대야 하나. 당시 위안소는 장소를 가리지 않고 군부대가 신축을 하기도 하고, 원주민이 살던 가옥을 고쳐 이용하기도 하였으며 심지어는 군용트럭을 이용하기도 했단다. 이런 이동식 위안소의 경우에, 군위안부들은 열악한 환경은 물론이거니와 생명의 위협까지 받아야 했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받은 대가는 군표. 그러나 이 군용수표가 화폐로 교환되어 군 위안부의 손에 주어지는 일은 결코 없었다. 대신 성병에 걸리거나 임신하면 쉽게 버려지기 일쑤였다. 사진 중에는 만삭의 임산부가 있는 것도 있었다. 축복받아야 할 임신이 이렇게 험한 상황 속에서 흑백사진 속에 우울한 영상으로 박혀 있어서 나는 마음이 아팠다.

 

1945년, 민족의 소원이었던 광복이 이루어지던 그 해,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던 사람들이  있었다. 바로 군 위안부들이다. 패전국이 되어버린 일본에게 '위안부'란 남아 있어서는 안 될 기록이었다. 일본군은 퇴각하면서 대부분의 위안부를 한데 모아 죽였다고 한다.

 

이후 몇 십 년의 세월이 흘렀다. 일본에 남아 있는 위안부는 위안부대로, 만신창이가 되어 고향 땅을 밟아 본 위안부는 위안부대로 힘겹고 고통스러운 시간이었다. 위안부였단 사실이 죄인 아닌 죄인이 되어, 부끄러워 그 누구에게도 본인의 고통을 말할 수 없었고 잃어버린 세월을 돌려달라고 화 낼 데도 없었다고 한다.

 

그러던 중 1991년, 첫번째 위안부 피해자가 세상에 자신을 밝혔다. 바로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이었다. 할머니께서는 여성으로서, 인간으로서 견디기 힘들었던 잔인한 군위안부의 실상을 낱낱이 공개하셨다. 진실을 밝히는 것은 때로는 엄청난 용기가 필요하며, 어쩌면 어렵게 안정시켜 놓았을지도 모르는 자기의 모든 현재를 걸고 해야 하는 큰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김학순 할머니의 용기 있는 증언은 극한적인 전쟁 중일지라도 저질러서는 안 될 인간의 잔인한 범죄성에 대한 고발이며, 하마터면 완전범죄로 묻혀버릴 수도 있었던 것을 온몸으로 드러낸 세계사적인 가치가 있는 행위라고 생각한다.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 이후로 피해자들의 신고가 증가하는 한편, 한국 국내에서도 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갔다고 한다. 마침내 1992년, 위안부 할머니들을 위한 '나눔의 집'이 설립 되었다. 한 독지가가 땅을 사고, 거기에 모금한 돈으로 건물을 짓고, 하여 오늘에 이른 것이니, 민족의 아픔을 치유하는 과정인 만큼 많은 사람들의 도움으로 나눔의 집이 건축되었다고 한다.

 

땅을 산 독지가뿐만 아니라 이 일에 도움을 준 여러 사람들이 부러웠다. 번 돈을 이런 곳에 쓰는 것이 멋졌다. 여기에서 할머니들은 젊은 날의 고생으로 인한 육체적 쇠약을 치료할 뿐만 아니라 심리치료 또한 받았으며, 자원봉사자나 사회 복지사 등 많은 이들의 관심 덕분에 '그 동안 맛보지 못했던 진정한 행복'을 느끼며 여생을 보내고 계신다.

 

할머니들의 심리치료 중 눈에 띄는 것은 바로 할머니들의 그림이다. 위안부 역사관에서도 아예 한 전시장을 차지하고 있을 정도로 수많은 그림을 남기셨는데 이중에서 잊혀지지 않는 작품이 있다면 바로 김순덕 할머니의 '끌려감'이었다. 그림 속의 소녀는 커다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다. 순수한 소녀의 놀란 표정은 금방이라도 울 것 같다.

 

김순덕 할머니의 '끌려감'

 

처음 일본군에게 끌려간 것이 몇 십 년이 지났는데도, 김순덕 할머니께서는 그 때 그 날을 생생히 기억하고 계신 듯했다. 위안소에 계실 때도 늘 '그 날만 아니었다면, 그 날만 끌려오지 않았더라면'하고 얼마나 가슴을 쥐어뜯으며 고통스러워 하셨기에... 할머니께는 눈을 감던 그 날까지 한 순간도 지워버릴 수 없었던 마음 속 깊은 상처였을 것이다. 분명 나는 할머니의 그 아픔을 아주 조금, 그러니까 십만분의 일, 백만분의 일, 어쩌면 그보다도 훨씬 적게밖에는 느낄 수 없는 것일 텐데도 그림 속의 조선 소녀를 보고 있자면 나도 모르게 감정이 북받쳐 오름을 느낄 수 있다.

 

이런 할머니들의 작품 활동은 처음에는 소일거리로 시작되었다. 화가 이경신씨의 도움으로 조금씩 그림을 배우기 시작한 것이 점차할머니들의 심리치료로 이어졌고, 그 과정에서의 작품은 역사적 사실을 고발하는 역할을 해내었다. 나와 같이 할머니들의 그림을 보고 위안부의 인생이 얼마나 비참했는지,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를 자연스럽게 알게 되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일 것이다.

 

전시관을 다 둘러보고 나서 '효 잔치'가 열리는 나눔의 집 앞 공연장에 갔다. 나뿐만 아니라 전국의 많은 중․고등학생들이 있었다. 놀라운 것은 일본인 관광객들도 이곳에 찾아온다는 것이다. 사실 나눔의 집에 찾아오는 사람의 3분의 2는 모두 일본인이다. 전시관 안의 향 앞에서 묵념을 하고 가기도 하고, 직접 할머니들을 만나 뵙기도 한다고 한다.

 

같은 날 온 일본인 중에는 일본의 '헌법 9조 지킴' 단체가 가장 눈에 띄었다. 일본 헌법 9조는 평화헌법이라고도 불리는데, 2차 세계대전의 전범국인 일본이 '전쟁 및 무력에 의한 위협 또는 무력의 행사는 영구히 이를 포기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최근에 일본 정부 내에서 일어나고 있는 움직임은 이와 반대이다. 헌법 9조를 개정해서 군대를 가지려는 모습이 보이는 것이다. 내가 본 단체는 정부의 이런 정책에 반대하며 이를 세계인들에게 알리는 단체였다. 꽤 많은 사람들이 직접 와서 단체의 취지도 밝히고, 할머니들께 노래도 불러드렸다. 보기에 흐뭇한 광경이었다. 전쟁을 일으켰던 나라의 추한 역사를 감추기에 급급한 한 쪽 구석에도 그것의 부끄러움과 부당함을 알고 저항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은, 인간 본성의 선량함에 대한 좋은 믿음을 가지고 싶은 내게 확신을 주었다.

 

 

그밖에도 많은 사람들이 공연을 했다. 할머니들께서 가장 좋아하셨던 부분은 역시 전통 춤과 창. 한 할머니께서는 직접 일어나셔서 덩실덩실 춤도 추셨다. 그때만큼 모든 사람들이 웃으면서 기뻐한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즐거워하시는 할머니들의 모습이 우리도 모르게 뿌듯했기 때문일 것이다.

 

마당에 나가면 이런 시가 하나 새겨져 있다.

 

'꽃다운 나이 일본인들에게 끌려가 짓밟히고 인생 되찾는데 오십년 세월이 걸렸다 이제는 주름투성이 할머니 되었지만 용기 있는 증언 그 증언의 힘으로......'

 

나는 앞으로 공부를 열심히 해서 국제기구에서 일해 보고 싶다. 넓지만 좁은 세상을 향해 나아가, 더 나은 세상을 만들고자 하는 사람들의 노력 속에 나의 힘도 보태어 보고 싶은 것이다. 내 나라 역사 속의 문제가 결국은 인류의 문제가 아닌가. 위안부 할머니들의 문제는 여러 각도에서 바라볼수록 정말 많은 문제가 내포되어 있는 다면성과 심각성을 지녔다고 생각되었다.

 

위안을 드리러 갔던 내가 너무나 큰 것을 얻어가지고 와서 죄송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한 아주 특별한 오월의 어느 날이었다.

 


#나눔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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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과서가 가르치는 것이 이루어지는 사회를 꿈꾸는 평범한 학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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