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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 국가에 처음으로 살게 되면서 느끼는 '이슬람'은 단순히 이전에 알던 종교 이상의 의미로 다가온다. 정치, 사회, 문화, 예술, 그리고 일상의 사는 모습에 이르기까지, 사람의 삶에 직접적, 간접적으로 연관된 모든 것을 관장하는 이슬람은 마치 'the matrix'와 같은 존재로 느껴진다. 영화에 나오는 그 '매트릭스' 말이다.

어떻게 보면, 선지자 모하메드는, 자신의 유한한 삶을 넘어서는 '매트릭스'를 만들어, 그를 통해 이상사회를 구현하려고 했던 인물이라는 생각을 해 본다. 물론, 그의 말대로, 어떤 초 자연적인 체험이 수반되어 그의 삶의 지향점이 바뀌었다는 것은 나로서는 수긍할 만한 부분이다.

그러나, 그 가운데 그의 이상사회에 대한 '꿈'이 성스러운, 초자연적인 방법만이 아닌 인간적인 의식이 투영되어 이루어져왔던 것도 사실이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다른 모든 영웅과, 창조물이 그렇듯, 그의 인생과 유산은 후대의 똘똘하고 능력 있는 후손들에 의해 확대, 재 생산 된다.

다른 수많은 종교지도자들과 비교할 때, 선지자 모하메드에게는 한가지 특이점이 있다. 종교를 통해 현세 가운데의 이상사회를 구현하려 시도했던 다른 이들의 전형과는 달리 그는 그 스스로를 신격화의 굴레에서 한 발짝 빗겨선 존재로 억제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역사를 통해 지금껏 지켜져 오고 있다.

에이드 엘크빌의 얘기를 이어가려 하다 보니,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바로 그 '이슬람' 이다. 이슬람은, 엘크빌의 의미를 만들고, 그 시기를 정하며, 그 세세한 진행 방법까지도 아우를 정도로 이 사회와 문화 깊숙이 스며들어 있다. 다른 많은 이슬람의 규범들이 그러하듯, 엘크빌에 있어서도 이슬람은 종교로서의 의미뿐만 아니라 사회 유지 및 구성의 장치로서도 기능한다.

꾸란의 한 귀절인 것으로 보인다. 선지자 모하메드는 꾸란을 통해 철저히 우상숭배를 금지하도록 했다. 이를 위해 선지자 자신의 초상화는 물론이거니와 사물의 형체를 지녀 숭배가 될만한 그 어떤 '상(Image)'를 건축물에 사용하는 것을 철저히 배격했다. 아랍어 서예가 발달한 이유고, 이 지역 전통 건축에서 수학적이고 기하학적인 장식이 발전한 이유다.
▲ Ben Youssef 신학교 내부의 벽 장식문양. 꾸란의 한 귀절인 것으로 보인다. 선지자 모하메드는 꾸란을 통해 철저히 우상숭배를 금지하도록 했다. 이를 위해 선지자 자신의 초상화는 물론이거니와 사물의 형체를 지녀 숭배가 될만한 그 어떤 '상(Image)'를 건축물에 사용하는 것을 철저히 배격했다. 아랍어 서예가 발달한 이유고, 이 지역 전통 건축에서 수학적이고 기하학적인 장식이 발전한 이유다.
ⓒ 신유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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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서 만난 현지인 친구 사이드는, 독실한 무슬림이다. 그는, 전심으로 알라를 숭배하고, 알라가 하기를 원하는 일들 (특히 기도, 규례와 같은)은 최선을 다해 해 내기를 원하는 친구다. 사용된 '독실한' 이란 단어를 잠시 짚고 넘어 가야 할듯 하다. 무슬림 하면, 대부분의 일반인들은 베일을 두르고 수류탄과 장총을 들고 포효하는(혹은 광분하는), 일단의 테러리스트를 가장 먼저 떠올린다. 그 다음으로는 알라에 대한 무조건적인 숭배(혹은 충성)와 그로 인한 배타성을 떠올릴 것 같다.

그것은 모든 이슬람은 '독실하다'라는 전제를 바탕으로 한다. 그러나, 시대와 장소에 관계없이 사람의 본성과 관계된 사는 모습들이 어느 정도는 다 엇비슷 하듯, 무슬림 중에도 '날라리 무슬림'은 분명히 존재한다. 또한 "Sunday Christian" 과 대비할 수 있는 "Friday Muslim 무슬림"도 분명 존재한다.(금요일 점심 기도 시간에는 무스끼(사원)에 가야한다. 그래서 마록의 공식적인 금요일 점심시간은 평소보다 한 시간이 더 긴 3시까지 이다)

물론 독실함의 비율이 다른 종교들 보다는 좀 더 많다는 느낌을 받기는 한다. 이슬람은 보다 실제의 생활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일까? 그렇다 해도 이슬람에서도 독실함이란 지향의 대상임에는 틀림없다. 그 독실함은, 규례와 법도를 지키려는 스스로의 의지로 들어난다. 그런 모든 의미에서 독실함을 지향하는 친구 사이드에게 난 엘크빌의 의미를 물었다. 그 친구는 아브라함의 이야기로 화답한다.

천신만고 끝에 아들을 얻은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알라: 둘 다 유일신이라는 의미에서 같은 말이다)은 그 귀한 첫 아들을 바쳐 제사할 것을 요구한다. 그는 하나님의 명령에 묵묵히 복종하고, 지정된 산에서 아들을 '잡기' 직전 하나님의 명령으로 그만 둔다. 하나님은 그의 믿음을 시험하려 했던 것이다.

그 명령과 더불어 하나님은 제사를 할 숫양을 그들에게 제공 한다. 제사는 숫양으로 대신 이루어진다. 사이드가 해 준 이야기는 성경의 이 일화와 정확히 일치한다. 다만, 그는 아브라함의 아들 '이스마엘'을 기념하기 위해 에이드 엘크빌을 지키는 것이고, 성경에서 아브라함의 아들은 이삭이라는 것이 '결정적인' 차이점이다.

이 '결정적인' 차이가 후대 세계의 역사를 뒤흔들게 된다. (성경에서 이스마엘은, 이삭을 낳기 전에 아브라함이 이집트 태생인 그의 아내의 몸종, 하갈을 씨받이 삼아 낳은 자식으로 나온다. 출산 이후 그녀의 역할로 미루어 보면, 씨받이라는 우리말 단어가 가장 적합할 듯)

종교적인 의미에서 이슬람은 이와 같이 역사상 믿음의 조상인 인물과 그의 사건을 기념하기 위한 지극히 종교적인 행사며 명절이다. 그러나, 첫날은 내장과 머리를 먹고, 둘째 날에는 살코기를 먹게 하는 이슬람은 분명히 이 중동 지역의 생활과 밀접히 맞닿아 있다. 양 한 마리를 다 먹어야 하는 상황에서, 상하기 쉬운 부분부터 먹도록 하는 것이다.

이것은 생활의 지혜로 전수될 수도 있는 별것도 아닌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것이 종교적인 방법으로 제공되고 제한될 때, 사람들은 생각 없이도 생활에 있어서 어떤 최소한의 '안전'을 확보하게 된다. 생활 습관에 대한 규범 중 한 가지인, 돼지를 금하는 것도 이와 비슷한 의미가 있다. 더운 중동의 기후에서 상하기 쉽고, 상한 돼지는 사람에게 독이 되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만이 명확한 이유는 될 수 없다. 그리고 그 명분은 다분히 종교적인 의미로 나타난다.

다시 에이드 이야기로 돌아가면, 그 사회적인 의미는 경제적인 장치로서의 의미에 맞닿아 있다. '양 한 마리 잡는데 무슨 경제까지'라는 의문이 들 수도 있다. 그러나 이날, 거국적으로, 아니 전 이슬람 국가에서 초거국 적으로 집집마다, 그것도 가능할 경우 성인 남자 한 명마다 양 한 마리씩을 잡아내는 날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면. 이는 곧 어마어마한 재화의 이동을 뜻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슬람이 짜 놓은 프로그램 속에서 이 엄청난 재화는 도시에서 농촌으로 곧, 부유한 집단에서 빈곤한 집단으로 이동한다. 일종의 분배를 위한 장치라는 것이다. 도시가 곧 '부'라고만 보기에는 무리가 있지만, 능력에 따라 비둘기를 잡을 수도 있다는, 여지를 남겨둔 것을 감안하면, 사회적인 재화의 배분이라는 취지는 어느 정도 성취된다고 봐야 한다.

에이드 엘크빌이 다가오면, 전국의 양 값이 엄청나게 폭등(이는 자본주의 이전부터도 그랬다 한다) 하는 것과, 또 그런 가격으로도 모두가 불평 없이 순순히 구입하는 현실은 그를 뒷받침한다. 얼마 전, 이곳에서 우리네로 치면 밥에 해당하는 주식인 ‘홉스’ 빵의 값 1딜함10쌍띰(현재 환율로 약 160원 정도)을 조금 더 올리기 위한 빵 제조업자들의 파업이 있었다. 이슬람으로 에이드를 보지 않는다면, 가격이 이만큼 폭등한 양을 자발적으로 순순히 구입하는 것은 불합리에 대한 이해할 수 없는 사회적 침묵이라고 밖에는 볼 수 없다.

그 오랜 영욕의 세월을 견디어 온 이슬람 왕국이지만, 그 역시 오늘날 자본주의가 급속히 사회의 근간이 되어가고 있다. 에이드와 더불어 광고가 시작되는 은행권의 '양 대출'은 그 단면을 보여준다.

명절을 위한 양 한 마리를 구입하기 어려운 이들에게 금융권은 1년 정도를 약정으로 대출해 주고 매월 상환하는 이른바 '양 대출' 상품을 내 놓는다. 그러나 그 대부분은 엄청난 고리의 이자를 바탕으로 한다. 농촌으로 이동하는 돈 가운데 일부는 상술 좋은 은행권으로 흘러 가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넉넉한 돈'이 아닌 '빠듯한 돈'일수록 그렇다.

시대가 흘러도 변치 않는 이상사회를 현세에서도 구현하고자 했다는 측면에선 선지자 모하메드는 위대한 정치가이자 철학자였다. 후대를 걸쳐 삶의 세부적인 부분까지 보다 완벽한 사회를 위해 정비되어 온 이슬람도, 시류가 변해오는 세월 앞에, 인간의 본성 앞에 변해오는 모습을 보며, 어쩌면 현실에 대한 우리의 불만에 기준이 되기도 하고, 우리 모두 살기를 바라기도 하는 그 이상적인 사회의 상태란 ‘구현’ 되기 보다는 ‘지향’됨으로만 남는 무엇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본다.

덧붙이는 글 | 아랍어 에이드(Aid)는 우리말 '명절' 중 '절' 정도에 해당됩니다. 크빌(Kbir)은 크다, 첫째 정도고, 엘(El)은 정관사. 모로코에선 이맘때쯤 에이드라고 하면 다 에이드 엘크빌을 의미합니다. 이 글은 모로코 체류하던 2004년 적어둔 글로, 오늘(12월 9일)이 모로코 현지에선 에이드 시작이라는 친구 연락을 받고 소개하게 되었습니다.



태그:#이슬람, #에이드엘크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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