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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삿날이라기에 모처럼 친정으로 향했다. 시댁일에는 항상 적극적으로 나서서 챙기려고 하고 한 달 전부터 계획하고 철저히 실행하려고 하는 반면에 친정 일은 나몰라라 하기가 일쑤였다.

 

물론 외며느리와 막내딸이라는 직분의 차이도 있겠지만 고만고만한 아이들이 넷인 나에게 친정은 전적으로 내 필요에 의해 언제든지 가서 맘껏 쉬다오는 곳이었지 내게 임무가 있는 곳은 아니라고 생각하며 지내왔다. 그래서 였을까? 넷째를 낳고난 후 딱 한 번 잠깐 들르고는 여지껏 한 번 못갔다. 자가용으로 30분 거리밖에 안 되는데도 말이다.

 

이번 방문도 제사준비 보다는 참기름과 쌀, 김치를 가져올 욕심이 더 컸다. 친정어머니는 여름내 재배한 참깨며 밭벼를 추석 즈음해서 참기름으로 만들고 벼를 도정해서 4남매에게 골고루 나눠주신다. 해마다 갖다 먹었기 때문에 당연한 줄 알았다. 시댁에서 보낸 작은 선물에는 행여 잊을까봐 받는 즉시 감사 전화를 하지만, 친정은 잘 받았냐고 걸려온 전화도 지금 정신없다고 대충받고 끊어버렸다.  

 

특히 이번 제사에는 두 며느리가 못 온다고 했다. 큰 며느리는 늦둥이 출산이 임박했고 작은 며느리는 출산한 지 한달 밖에 안되었기 때문이다. 몇차례 통화로 느낀 바 친정어머니는 은근히 언니와 내가 가서 도와주길 바라는 눈치였다. 아무튼 졸려하는 막내는 태우고 친정으로 가는 길은 가뿐했다. 가을 들녘은 언제나 그렇듯이 휑했지만 하늘은 높고 파랗고 화창했으며 상쾌한 바람이 살살 불고 있었다. 정말 아무 걱정 근심 부담없는 나들이었다.

 

하지만 막상 도착하고 보니 예상 밖이었다. 어머니는 가스불 앞에서 땀 흘리며 혼자 전을 지지고 있었다. 다른 때면 며느리들이 했을 거다.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 앉는 느낌이었다. 어머니의 위태롭게 휘어져가는 등허리 때문이었다. 당장 팔을 걷어부쳤다. 여느때 같으면 아이 맡기고 먹을 거 먼저 챙겼을 텐데 그럴 수가 없었다.

 

올 해 예순여덟인 어머니는 평생 물질(해녀들이 바닷 속에 들어가 해산물을 채취하는 일)을 하셨다. 지금도 농한기에는 가끔 하신다고 했다. 올해들어 아버지께서 관절염으로 일을 못하시게 되자 어머니 혼자 그 많은 농사일을 다 하시다보니 힘드셨던 게다. 하지만 벌써 허리가 휘기 시작하면 안될 말이다.

 

울컥하는 걸 겨우 참으로 가스불 앞에 오랫동안 서서 전을 지졌다. 이젠 제사상도 간단하게 차려야 한다는 잔소리도 한 번씩 해댔다. 그리고 싱크대를 청소하며 버릴 건 버리지 왜 쌓아뒀냐며 짜증을 냈다. 급기야 약간 어긋나 있던 싱크대 문짝을 고치기 시작했고 그 와중에 아버지한테 드라이버 갖다달라, 나사못 두 개 갖다달라, 망치 갖다달라 심부름까지 시켰다. 아버지는 나중에 당신께서 직접 하신다며 그냥 두라셨지만 듣는 척도 않았다.

 

나는 오만 인상을 쓰고 낑낑 대며 문짝을 뜯어냈고 조립하기 시작했다. 일이 커졌다. 생각보다 쉽지 않았지만 그간의 불효를 다 만회하려는 것처럼 문짝 맞추기에 몰입했고 결국 대충 맞췄으며 처음보다 보기 좋게 되었다. 부모님을 위해서 뭔가 해드렸다는 기분이 그런 것일까? 맛있는 커피를 마신 것처럼 개운했다. 하지만 아버지의 표정이 이상했다. 대견해 하실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내가 갖고갈 것을 챙기며 차에 실어주시는 어머니의 표정 또한 그다지 밝아보이지 않았다. 왜 그럴까?

 

내가 정말 잘못했다는 걸 깨달은 건 집에 돌아와 한참 후였다. 내가 지혜롭지 못했다. 아버지 어머니에게 나는 여전히 철없고 약한 막내딸이라는 걸 잊었던 거다. 친정 부모님께 나는 그저 받기만하고 기대기만 해야 하는 막내딸의 모습으로만 있어야 했다. 생각이 짧았다. 듬직한 며느리처럼 굴었다.

 

나는 전을 지지고 있는 어머니 옆에서 말 걸어주며 심부름하고 하나씩 얻어먹으며 맛있다고 더 달라고 보채고 구경만 했어야 했다. 여느 때처럼 아이들 키우는 재미와 어려움을 종알종알 얘기하며 더불어 집에 오니까 너무 좋다라는 추임새를 남발하며 신나게 웃어대며 좋아했어야 했다. 그런 내 모습을 어머니는 더 좋아하셨을 거다.

 

아버지께도 내가 잘못했다. 싱크대 문짝 고치는 건 아버지께서 하시게끔 했어야 했고 나는 옆에서 예전부터 아버지는 이런 거 정말 잘 고쳤었다고 부추기기만 했어야 했다. 나아가 나중에 우리집 와서 아이들 책꽂이 흔들거리는 것도 고쳐주라고 부탁했었다면 더 좋아하셨을 거다. 또 예전처럼 우리집에 오니까 좋다며 낮잠이라도 잠깐 자며 응석부렸어야 했다. 그랬다면 어머니는 애 넷 키우며 고생하는 막내딸이 항상 안쓰럽다고 생각했는데, 기회에 친정에 와서 그렇게라도 쉬는 모습을 보며 그나마 위안삼았을 것이다. 아버지도 나이들고 힘이 예전만 못하지만 자식들 앞에서만큼은 언제나 뭐든 잘 하는 든든한 후원자임을 느끼며 자부심을 가졌을 것이다.

 

언젠가 TV에서 본 기억이 있다. 치매인 노모를 몇 십년 동안 모시고 산 아들의 깨달음이었다. 아들은 늙고 병든 노모를 자신이 모시고 산다고 항상 생각했었는데, 막상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자신이 어머니를 모시고 산 게 아니라, 늙고 병들었던 어머니가 자기를 데리고 살아주셨다는 걸 알았다는 것이다. 어머니가 자식을 위해 그렇게 악착같이 버티어 살아주셨다는 걸 깨달았고 어머니의 빈자리를 느끼며 눈물 흘렸다고 했다. 매일같이 똥오줌 치워도 좋으니 어머니가 곁에 계셨으면 좋겠다고 고백했다.

 

자식이 어찌 부모 마음을 다 알 수 있을까? 다만, 어머니와 아버지께서 내가 항상 웃으며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며 뿌듯해하시는 것처럼, 자식인 나도 어머니·아버지께서 항상 웃으며 행복해했으면 좋겠다. 그럴수만 있다면 앞으로 나는 듬직한 며느리보다는 철없고 약한 막내딸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덧붙이는 글 | 어떤 친구는 두툼한 봉투없이 빈손으로 갔다왔기 땜에 부모님표정이 안좋았던 거라더군요. 정말 그럴까요? ㅋㅋ


태그:#친정부모님, #효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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