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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00년대 말 대련지역 러시아 조차지
ⓒ 이상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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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련은 근대 제국주의의 시련을 많이 겪은 곳이다. 특히 중국의 동부 연해 지역을 살펴보면 청도·상하이·영파·하문·광동 등이 지리적인 이유로 중국에서 제국주의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았던 곳으로 기억된다.

당시 중국에서 경쟁을 하던 제국들은 미국·러시아·독일·프랑스·일본 등이 있었는데, 일본은 만주 진출을 위해 요동 반도를 점유하고자 하였다. 그래서 일본은 1894년 7월 25일 선전포고도 없이 청군을 공격하면서 청일 전쟁이 일어났는데, 전쟁 승리 이후 요동 반도의 여순항을 점령했다.

그리고 다음해에 대만과 요동 반도를 할양 받고자 중국과 '시모노세키조약'을 체결했다. 당시 러시아는 일본의 요동반도 할양이 러시아 남하정책에 위협이 된다고 생각해 프랑스와 독일의 지지를 얻어 요동 반도의 중국 반환을 요구했고 일본은 굴복하게 된다.

 러시아의 여순 도시 계획도
ⓒ 이상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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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곧 1898년 러시아는 청나라와 불평등조약인 '여대조차조약(旅大租借條約)'을 맺고 대련지역을 차지하게 되었다. 러시아는 요동 반도의 대련과 여순을 남하정책의 기지로 부동항 건설을 시작하면서 중국 침략의 근거지로 삼았다.

러시아 황제였던 니콜라이 2세는 ‘칭니와(靑泥洼)’라는 작은 어촌에 불과했던 과거 대련만 지역에 새로운 근대 도시를 건설하고자 했다. 어촌에 살고 있던 중국인을 강제로 이주시킨 후 니콜라 2세는 광장과 방사형 가로구조를 가진 바로크 풍의 식민 도시를 건설하기 시작하였다.

 대련 도시를 설계한 사하로프
ⓒ 요녕인민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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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는 이 새로운 도시를 ‘다아리니(러시아어로 멀리 떨어진 곳이라는 뜻)’라고 이름을 붙였다. 당시 이 새로운 도시를 건설한 사람은 블라디미르 사하로프(Vladimir Saharov) 였는데 그는 이전에 블라디보스톡 항구를 설계한 적이 있는 유능한 기사장이었다.

부동항 ‘다아리니’는 1899년 제1기 3년 공사가 시작되었다. 그 후 4년째 되던 1902년 러시아는 이 도시를 특별시로 지정하였고 도시의 설계자였던 사하로프는 초대 시장이 되었다.

당시 도시는 크게 두 부분으로 구분하였는데, 칭니와를 경계로 동쪽은 러시아인을 포함한 유럽인들이 살 수 있는 지구로 설정하였고, 서쪽은 중국인 지구로 만들었다. 지금 현재 남아 있는 승리교 주변의 러시아 풍경거리는 당시 유럽인 지구 중에서도 행정구에 해당하는 곳이었다. 그 외에도 상업구와 주택구로 유럽인 지구는 구성되었다.

 1904년 러시아 행정구
ⓒ 요녕인민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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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도시의 설계에서 외부 세계와의 소통을 위해 중요한 역할을 하는 항구와 철도가 만들어졌다. 물론 이것은 식민지 수탈을 위한 인프라 시설의 일환이었지만 이후 현재까지 초기의 항구와 철도는 대련 도시 발전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대련에 처음 오는 사람들이 인상깊게 느끼는 것이 중산 광장, 우호 광장, 3·8 광장과 같은 ‘광장들’이다. 이러한 광장의 시작은 바로 러시아 시대에 이루어진 것이다. 러시아가 처음 도시 계획을 할 때 그들은 유럽의 도시 설계를 차용하였는데, 광장은 특히 프랑스 파리 건설을 그 모델로 했다.

파리가 개선문 광장을 중심으로 뻗어나간 방사형 도시라면 대련은 당시 니꼴라예브스키 광장을 중심으로 방사형으로 조직되고 있었다. 현재는 중산 광장으로 그 이름이 바뀌었고, 주변의 건물도 일제시기에 바뀌었지만 과거 이 광장을 중심으로 10 갈래의 도로가 방사형으로 계획되었다.

러시아는 이 중심 광장을 다른 원형 광장들과 연결하면서 시가지 도로망을 만들어 나갔다. 가장 큰 대로는 현재의 항만광장에서 중산광장을 통과해서 중국인 주거지역으로 연결되는 도로였는데 현재의 중산로(中山路)에 해당되는 길이다.

러시아는 여순은 군항으로 외부로 부터의 출입을 금지시켰고, 대련은 자유 무역항으로 외부 세계에 개방하였다. 원래 러시아 도시 설계상으로는 5기의 부두를 건설할 예정이었고, 실제로 제 1기 공사를 진행하면서 2기가 완성되었다.

5기가 완성되었다면 규모로 따지면 1000톤급 선박 25척이 접안할 수 있는 항만이 될 수 있었다. 또한 러시아는 부두 서쪽에 조선소를 건설하였다. 기록에 의하면 당시에 3천여 명의 러시아인이 대련에 거주했다고 한다.

그들은 러시아식 레스토랑에 식사를 할 수 있었고, 서점, 과자가게, 세탁소, 약국 등과 같은 시설을 사용할 수 있었다. 이렇게 점차 근대 도시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한 대련은 러시아 니콜라이 2세의 중국 진출의 야심을 잘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대련 지역을 포기하지 못한 일본은 1904년 2월 8일 여순 공격을 감행하면서 러•일 전쟁을 일으켰다. 러일전쟁 당시의 국제 정세는 영국과 미국의 동맹과 러시아, 프랑스, 독일의 동맹으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일본이 영국과 동맹을 맺으면서 러시아와의 관계가 대립적으로 변화하였다.

더군다나 당시 조선과 만주 지역에서 러시아의 남하 정책은 일본에게 위협적이었다. 1905년 일본이 러시아를 격퇴한 후 대련을 비롯한 만주 지역과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하였다. 이로써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영원한 부동항의 꿈은 좌절이 되고 말았다. 이후 일본은 러시아 시대 도시 계획을 다시 조정하고 변화시켜 그들의 식민 도시로 만들기 시작하였다.

 러시아 시대 ‘다아리니’ 시정부 건물
ⓒ 요녕인민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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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이 되면 휴양을 위해 대련을 방문하는 러시아인들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대련은 러시아의 역사 속에서 잠깐이나마 니콜라이 2세의 꿈이 실현되었던 곳으로 자리 매김하고 있다.

요즘과 같이 화창한 날 러시아 풍경거리를 방문해서 20세기 초 러시아 행정구의 모습을 새롭게 확인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풍경 거리로 조성된 대로 주변 샛길로 들어가면 100년 이상의 역사를 담은 러시아식 건물들이 여전히 빈곤한 중국인들의 보금자리로 쓰이는 것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태그:#대련, #러시아 부동항, #여순, #니꼴라이, #여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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