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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사람들은 까마귀는 해를, 두꺼비는 달을 상징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해를 일컫기를 까마귀 오(烏)자를 붙여 준오(踆烏), 금오(金烏), 양오(陽烏), 기오(跂烏), 삼족오(三足烏) 등으로 표현하였다. 달에는 두꺼비 섬(蟾)자를 붙여 금섬(金蟾), 섬여(蟾蜍), 옥섬(玉蟾) 등으로 불렀으며, 때로 토끼와 같이 살고 있다고 하여 토끼 토(兎)자를 붙여 섬토(蟾兎)라고도 하였다. 달빛을 섬광(蟾光)이라 하는 것도 이로부터 유래한다.

해와 달에 관한 이러한 표현들은 시 속에도 자주 등장한다. 고려 시대 백운거사 이규보는 무더위에 지친 나머지 '금오가 제 스스로 불을 뿜어…… 사람 볶는 불이 되었네'라고 읊었으며, 여말선초의 대학자 양촌 권근은 자신은 삼복더위에 괴로워하면서도 오히려 '삼족오가 목말라 죽을까 봐 걱정'하였다.

과거에 뜻을 잃고 전국 명승지를 찾아다녔던 연암 박지원은 총석정에서 해돋이를 구경하고 나서 '세 발 까마귀 빠르게 날아 떠오르니, 누가 그 발 하나를 노끈에 달아맬까'라고 하여 재빨리 떠오르는 해돋이의 아쉬움을 표현하였다. 다산 정약용은 '혹은 요사한 두꺼비가 달을 먹어 토끼 방아 못 찧게 하는 광경도 그리지만'이라 하여 토끼를 괴롭히는 두꺼비를 재미있게 표현하였다.

그렇다면 왜 까마귀와 두꺼비일까? 이에 대해 <성호사설>에서는 28수(宿)의 별자리를 가지고 설명하고 있다.

<상위고>를 고찰해보니, '해도 하나의 별로 방성과 저성 사이에 있는데 태양(太陽)의 정(精)이다'라고 하였다. 또 감씨는 말하기를 '해는 양종(陽宗)의 정으로 다리가 둘인 까마귀가 된다. 까마귀의 정영(精英)은 별이 되어 태양이 운행하는 도수를 맡는다. 해는 동쪽에서 뜨기 때문에 그곳에 있다. 달도 하나의 별로 묘성과 필성 사이에 있다. 달은 음종(陰宗)의 정으로 다리가 셋인 두꺼비가 된다. 두꺼비의 정영도 별이 되어 태음(太陰)의 운행하는 도수를 맡는다. 달이 서쪽에서 뜨기 때문에 그곳에 있다'고 하였다. …… 또한 해와 달이 아무리 밝아도, 이는 기(氣)의 정영일 뿐이다. 따라서 영감(靈感)과 지각(知覺)이 있는 살아 있는 생명체와는 다른 것이다. 그러므로 해와 달을 일컬을 때, 또한 까마귀와 두꺼비라고 부르는 것이다(성호사설 경사문 거저 중에서).

28수는 달의 공전주기가 27.32일이라는 점에 착안하여 북쪽 하늘을 기준으로 하늘을 28개의 구역으로 나눈 별자리이다. 28수를 다시 동, 북, 서, 남의 사궁(四宮)으로 나누고, 각각의 궁에 7수(宿)를 배치하였다. 동궁은 청룡, 남궁은 봉황, 서궁은 호랑이, 북궁은 거북이로 표상된다. 방성과 저성은 동궁, 묘성과 필성은 서궁에 속한 28수 중의 하나이다.

한방의서에서 까마귀는 정력제라고 할 정도로 양기가 센 동물인데, 양의 기운으로 가득한 해를 살아 있는 생명체인 까마귀로 상징하였다. 또한 두꺼비는 음을 상징하는 동물로, 음의 기운으로 가득한 달을 상징하는 것이다.

그러나 고대 중국에서는 해와 달 속에 실제로 까마귀와 두꺼비가 산다고 생각하였다. <지봉유설>에서 인용한 기원전 전한 시대의 책인 전국책과 회남자에서는 해와 달이 빛나는 이유를 까마귀와 두꺼비가 그 안에서 해와 달을 좀먹기 때문에 빛을 떨어뜨리는 것으로 설명하였다. 나아가 일식과 월식에 대해서도 똑같은 이유로 설명하였다. 좀먹을 식(蝕)자를 쓰는 것도 이러한 까닭에서이다.

그러나 지봉 이수광은 이것을 근거 없이 전해 오는 말이라고 일축한다.

소동파가 말하기를 '옥천자는 월식시에서 달을 먹는 것은 달 가운데에 있는 두꺼비라 하였고, 매성유는 일식시에서 해를 먹는 것은 발이 두 개 있는 까마귀다'라고 하였다. 이것은 원래 근거 없이 전해 오는 말이다(지봉유설 천문부 일월 중에서).

이처럼 중국 문인들이 일식을 해에 사는 까마귀가 해를 먹음으로써 생겨난 현상이라고 생각한 반면에, 고려와 조선 시대 문인들은 일식은 달에 사는 두꺼비가 해를 먹는 현상이라고 생각했다. 일식은 달이 해를 가리는 현상이니, 고려와 조선 문인들이 사물을 더 실제에 가깝게 관찰한 것이다.

일식 현상이 나타나자, '까마귀는 만고의 사람이 우러러보는 바인데 어쩌다 하루아침에 두꺼비에게 먹히었느냐(<동문선> 중)'라고 읊으며 달이 해를 가렸음을 비유하였다. 또한, 권근은 늙은 두꺼비 넋이 군침을 흘리며 해에 덤벼 먹으려 하는데 세 발 달린 까마귀가 이를 쪼지 못해 잡아먹히는 것으로 일식을 표현하였다.

한편 이처럼 많은 문인들이 해와 달의 본질을 까마귀와 두꺼비를 빌어 설명한 반면 이수광은 사물에 대한 꼼꼼한 관찰과 합리적, 과학적 사고를 통해 판단하고 있다.

나(이수광)는 말한다. 달이 개기식(皆旣蝕)을 하면 그 빛이 어둡고 검다. 이것으로 달이 검은 것을 알 수 있다.

나는 말한다. 달의 본질은 본래 검은 것이니 비록 외면이 햇빛의 조사를 받더라도 거기에 검은 무리가 있는 것은 대체로 그 속의 검은 본질 때문인 것이다.


물론 현대 과학의 눈으로 보자면 항성과 행성의 차이를 모르는, 전근대적인 견해이지만 망원경 등 과학기술의 도구를 사용하지 않고 육안으로만 관찰해서 달의 본질을 사실에 가깝게 논했다는 것 자체가 이수광의 자연과학적 자세를 보여준다.

그 뒤 백오십여 년 후 담헌 홍대용은 청나라 수도 연경에 갔을 때 천주당을 방문하여 서양에서 온 천주교 신부들을 방문하여 조선인으로는 처음으로 망원경을 가지고 태양을 관찰하는 기회를 얻는다. 태양을 보고 나서 홍대용은 해 속에 세 개의 까만 점이 있다고 들었는데, 하나도 보이지 않는 이유를 서양인 신부에게 질문하였다. 이에 서양인 신부 유송령은 검은 점이 셋뿐 아니라 하나나 둘, 또는 여덟 개가 보일 때도 있는데, 지금은 하나도 보이지 않을 때라고 답변한다.

해에서 보이는 세 개의 까만 점은 아마 해의 흑점 활동이 왕성해질 때 가장 크게 생성된 흑점 세 개가 어느 날 육안으로 관찰된 것이 전해내려 온 것으로 판단된다. 홍대용은 이를 해 속에 세 발 달린 까마귀가 사는 것으로 생각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해에 까만 점이 세 개가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처럼 조선 중기 이후에 일단의 양반 지식인들은 자연과학적 태도로 해와 달의 본질에 관해 탐구하고 논하여 고유의 우주론을 형성하기 시작하게 된다.

태그:#개기월식, #이수광, #성호사설, #이익, #까마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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