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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역에서 내려 지하철 신도림역으로 향할 때였다. 이틀 전 전화통화를 한 김광은(가명)씨의 목소리가 마음에 걸렸다.

"경비실에서는 보는 눈이 많아 그러니께 점심때나 저녁에 만나면 어떨까?"

신도림역 2번 출구로 나오자 김씨의 말대로 마을버스 정류장이 보이고 그 너머로 꼭대기를 가늠할 수 없는 아파트가 빽빽이 들어서 있다. 택시가 도착한 곳은 새마을금고 건너편 한 식당. 정수기에서 빼낸 물로 목을 축인 김씨가 담배를 피워 물었다.

"20여 년 전 해남에서 농사짓다 올라왔는디 아들 땜에 그랬지 뭐. 아들이 꽤나 알려진 대학에 합격을 했거든. 그런디 뒷받침 할 일이 막막했어. 운이 없을라고 그랬는지 고향 떠나오던 그 해는 김농사에 손댔다가 망쪼가 든 해였네."

그렇다고 대학에 들어간 아들을 내버려둘 수 없었다. 전답 농사, 김 농사는 실패했더라도 자식농사만큼은 제대로 한번 지어보고 싶었다. 그해 봄 김씨는 조상님께 죄짓는 마음으로 가산을 정리했다. 그러나 그가 쥔 돈은 고작 22만원. 다른 거라면 몰라도 김씨는 이 돈의 액수를 잊어본 적 없다. 부친에게 물려받은 가산을 정리한 한숨이자 탄식이 배인 돈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나이 마흔일곱 때이었다.

셋방을 얻고 나면 바닥날 돈을 쥐고 찾아간 곳은 인천 부평에 살고 있던 큰처남댁. 처남댁도 변변한 살림은 못되었다. 내외가 얹혀 살기에는 눈치가 보였다. 그런데 마침 그곳이 재개발지역이어서 김씨는 딱지 한 장을 손에 쥘 수 있었다.

아들은 내 희망이었네

ⓒ 김흥구
딱지를 팔아 서울 후암동으로 옮겨온 김씨는 주방기구 유통업체에 취직을 했다. 그의 나이도 어느덧 쉰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도 그렇지만 세상 아버지들 마음이 다 같아. 자식을 위해서라면 무엇인들 못할까. 대학 들어간 아들은 내 희망이었네."

그러나 김씨가 일하던 유통업체는 네 해만에 부도가 나고 말았다. 배운 것 없고, 가진 것 없고, 기술마저 없는 그는 더럭 겁이 났다. 별수 없이 그는 아파트 공사 현장에 나가 날품을 팔았다. 하지만 그 일도 오래 하지는 못했다. 체격이 왜소한 터라 힘이 달렸고, 코피를 쏟는 일이 잦았다. 한번 자리에 누우면 내리 사흘을 몸져누워 있을 때도 있었다. 하필 그날 부평에 사는 장모님이 찾아왔다.

"쯧쯧. 성운이 대학공부 가르치는 것도 좋지만 그러다간 김서방 자네가 먼저 병원에 실려 가겠네. 노가다는 당장 때려치우게나. 내가 경비자리 알아봄세."

한때 아파트 청소를 했던 장모님의 주선으로 찾아간 곳은 여의도 G아파트. 아침 6시 30분까지 출근해서 다음날 아침 6시 30분에 퇴근하는 경비원으로 취직한 김씨는 일주일 80시간 근무에, 한 달 급여 75만원이 적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군에 간 아들이 제대를 한다면 또 모를까 지금으로서는 대만족이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잠깐. 한 주일이 지나고 두 주일이 지나자 김씨는 웃음을 잃어갔다. 달포가 지났을 무렵에는 경비라는 직업이 머슴 중에서 상머슴 축에 든다는 걸 알게 됐기 때문이다.

"장을 봐온 사모님(대부분의 경비원들은 이렇게 호칭하고 있었다. 남자는 사장님으로, 여자는 사모님으로)이 주차장에 세워둔 승용차에서 짐을 운반해 달라더라구. 그것까진 참을 수 있었네. 그런데 진짜 화가 나는 건 위아래가 없다는 거야. 나 역시 출가해서 남매를 둔 딸이 둘 있는디 딸 같은 것들이 반말 틱틱 까면서 종부리듯 부리드만. 경비원 직업이 세상 사람들한테 홀대받고 천박하다는 것쯤은 예상했지만 그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네. 주민이 먼저 인사하는 꼴을 못 봤다니께."

한 번은 경비원에게 가장 큰 골칫거리인 주차 때문에 새파랗게 젊은 708호 부부에게 곤욕을 치렀다. 삿대질은 예사고 차마 입에 담지 못할 막말까지 듣고 말았다.

"이 나이 먹어 이런 말 한다는 게 창피하지만 젊디젊은 그 부부가 나더러 뭐라고 한 줄 안가? 주차단속도 하나 못하는 주제에 무슨 경비를 하느냐고 소리를 지르면서, 우리가 뭐 당신한테 그냥 월급 주는 줄 아느냐며 삿대질을 해대는데, 내 일생일대에 그런 모욕은 처음 당해봤네."

그러면서 김씨는 IMF 이후 경비원의 연령이 낮아졌다가 다시 원위치로 돌아간 것도 실은 그 같은 속사정이 있었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나이 먹은 우리도 참기 힘든데 아직 쉰도 안 된 경비원들이 무슨 수로 배겨나겠나."

밥숟갈을 뜨다 말고 김씨가 반주로 시킨 술잔을 그러쥐었다. 고향을 떠나온 지 올해로 22년째가 된다는 예순여덟 그의 눈가에 그렁그렁 눈물이 고였다.

33평 아파트와 반 평 경비실

식당을 나온 건 오후 2시경이었다. 주차문제로 여의도 G아파트에서 잘린 뒤 옮겨왔다는 H아파트로 가는 길에 김씨는 새벽 4시 반에 일어나 씻고 밥 먹고, 5시 반에 집을 나선다고 했다. 어떻게 보면 그의 일과는 순찰, 소등, 잡상인 쫓아내기 등 단순노동의 범주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경비원은 달력의 빨강 숫자와는 별개인, 정해진 휴일이나 연휴, 연차가 없다. 김씨가 일하는 H아파트는 24시간 2교대로 이어지기 때문에 절대 아파서도 안 된다.

김씨가 일하는 경비실로 들어가 의자에 앉았을 때였다. 너무 오래 있지 말고 딱 반 시간 있다 가라며 안으로 들였다. 그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자네는 키가 커서 경비원은 어렵겠구먼. 경비실하고 자네 치수가 안 맞아."

경비실은 비좁았다. 다리를 펼 수 없을 정도였다. 최하가 33평인 H아파트 부지에서 반 평 남짓한 경비실은 밤낮으로 보초를 서는 경비원의 유일한 쉼터였다. 수당은 물론 보너스, 퇴직금, 떡값 한 푼 없는.

"자네가 글을 쓴다니께 생각났는디 여기서는 절대 신문을 봐서는 안 되네. 언제 한번 신문을 보다 들켜 혼난 적이 있었거든. 신문 보고 있다가 잡상인이라도 들어가면 큰일이 아니냐는 거였지."

그때 누군가 경비실 창문을 열더니 요구르트 한 개를 넣어주었다. 허리가 잔뜩 굽은 백발의 노인이었다.

"늙은이는 늙은이하고 통하는 데가 있나 봐. 음료수라도 한 병 넣어주고 가는 이는 나한테 심부름 한 번 시킨 적 없는 바로 저 노인들이거든. 고맙지 뭐. 아참, 잊을 뻔했는디 이거 하나만 꼭 넣어주소."

"그게 뭔데요?"
"고마운 사람하고 미안한 사람인디, 그러니께 고맙다는 말은 지하철 사장님한테 하고 싶고 미안하다는 말은 잡상인들한테 하고 싶어. 공짜로 타는 지하철이 나 같은 늙은이한테 얼마나 큰 힘이 되는 줄 아는가? 전철비 다 내고 다니면 생활하기 어려워. 그리고 아마 모르긴 해도 20년 넘도록 경비를 하면서 가장 많은 죄를 진 사람이 있다면 잡상인들일 걸세. 그동안 내 손으로 내쫓은 사람이 몇인가!"

오늘 자네를 만나 난생처음 당신의 속마음을 털어놓는다며 쓸쓸한 미소로 배웅을 했다. 그와 헤어져 다시 신도림역으로 향할 때였다. 75만원으로 내외가 한 달을 산다는 김씨의 살림살이가 몹시 궁금했다.

경비라는 직업이 천하다지만...

ⓒ 김흥구
서울에서 내려온 다음날 나는 무작정 대구광역시 수성구로 향했다. 버스에서 내린 곳은 지산동 C아파트. 중형 승용차들이 들고나는 아파트 입구 풍경에 넋을 놓고 있던 나는 관리실로 들어갔다. 관리실 바닥에는 택배로 도착한 물건이 무릎 높이로 쌓여 있었다.

"택배 물건이 제법 많네요?"
"이 정도는 마, 일도 아니다. 얼마 전 어버이날에는 택배 온 것 정리하다 팔에 파스를 안 붙였나."

근무일지에 방금 도착한 택배 물건 주인들의 동과 호, 이름을 정신없이 써내려가던 정씨의 손놀림이 멈춘 건 한참 지나서였다. 그제야 낯선 외부인을 발견한 그는 무슨 일로 자신을 찾아왔느냐며 따지듯 물었다.

그러나 숱한 외부인을 접촉해온 이력 탓인지 정씨의 저울질은 오래 가지 않았다. 서랍에 넣어둔 장미 담배를 꺼내 문 그는 마치 신세타령이라도 하려는 사람처럼 택배 이야기를 한 차례 더 늘어놓았다.

"받는 사람 처지에서 보면 택배가 반갑겠지만 이놈아 땜에 치른 일을 생각하면…. 소포 다음으로 생겨난 이놈아는 나한테 골칫덩어리다. 와 그란 줄 아나? 퇴근시간에 찾아가면 될 것을 꼭 안방까지 갖다 달라는 주민들이 있다 아이가. 처음엔 주민들의 편의를 위해서 몇 번 배달해주었다만 사람 맘이라는 거이 참 묘하데. 나이 든 양반이 갖다 달라면 미운 맘이 덜한데 자식 같은 것들이 그러니까네 허파가 뒤집어진다 아이가."

그러면서 그는, 택배 물건을 안방까지 배달해달라는 주민의 연령은 대개 삼십대에서 사십대라고 했다. 그게 못마땅했는지 정씨는 세상 돌아가는 꼬락서니가 좀 우습지 않느냐며 씁쓸함을 감추지 못했다.

장마가 길어지다 보면 밭 작물이 씻겨 내려가고 마침내 녹아버리고 말 듯 지금 당장 자신의 가슴을 MRI로 찍어 보여줄 수 있다면 그와 비슷할 거라던 그는 세 해 전 일을 털어놓았다.

"경비원이 해야 할 일도 아니고 해서 배달을 못 해주겠다니까네 다음날 어떤 소문이 돈 지 아나? 다른 아파트 경비원은 군말 없이 해주는데 C아파트 경비원들만 배짱을 부린다카던가. 내 참. 얼마 뒤에는 경비원을 바꾸자는 말까지 나왔다."

경비원 생활 13년째인 정씨의 속이 문드러지는 일은 이것 말고 또 있다. 그러니까 두 해 전 5동 ###호 주민이 주차장에 막 도착했을 때였다. 출근을 서둘던 마흔 초반의 그 주민은 자신 승용차의 백미러가 부러져 있음을 발견한 뒤 다짜고짜 관리실로 달려갔다.

"###호가 담배만 꼬나물고 있었더라도 아무 일 없었을 끼다. 그란데 이거이 바지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는 찍찍 반말을 까대는데…."

물론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경비라는 직업이 무지하고 직업 중에서도 최고 '하빠리'라는 것쯤은. 다들 경비를 그렇게 알고 있고 취급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날 아침에는 분을 삭일 수 없었다.

그라믄 내 인생도 반년?

그러고 보니 두 시간 전 나는 경비원을 하려면 눈이 하나 더 있어야 한다는 정씨의 말을 우스갯소리로 흘려들었다. 그러나 그의 그 말은 시간이 지날수록 바늘 끝처럼 다가왔다. 그리고 정씨는 경비원들이 이직률이 높은 이유를 신세대와 구세대의 불협화음 때문이라고 진단했는데 듣고 보니 일리가 있었다.

일반 주택에서 살다 아파트로 이사 온 노인들은 전에 살던 곳의 정서가 남아 있지만 결혼과 함께 아파트에서 살기 시작한 젊은 사람들은 분명 달랐던 것이다. 정씨가 본 그들은 아파트 문을 닫는 순간 쌩하니 찬바람이 인다고 했다. 너는 너고, 나는 나일 뿐인 것이다.

그동안 근무하며 정씨가 보고 느낀 것은 그것만이 아니다. 지금 근무하고 있는 아파트에도 자식들에게서 용돈을 받아 살아가는 노인이 적지 않은데 그 노인들을 볼 때면 착잡한 심정을 가눌 길이 없다.

노인들의 자식이 부러운 날은 자신이 부끄럽고, 고등학교 졸업밖에 못 시킨 남매를 생각할 때면 통곡하고 싶은 것이다. 어찌 남몰래 흘린 눈물이 저 강물에 부족할 것이며 또 자정이 넘은 시각 관리실에서 하염없이 털어 넣은 술잔이 한철 장마만 못할까. 65년의 세월을 돌이켜보건대 많지도 않은 남매의 대학 공부를 시키지 못한 게 그는 두고두고 가슴에 맺혀 있다.

"초창기에는 많이 힘들었다. 잘살아도 너무 잘사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 여게 아이가. 이런 곳에서 나같이 천한 사람이 종처럼 일하고 있으니 이걸 숙명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무슨 수로 견딘단 말이가. 저 사람들이 나를 인간 취급해줄 거라고는 첨부터 꿈 안 꿨다. 그냥 숙명이라고 생각하니까네 맘이 가라앉더라."

그런데 왜 그는 근무일지 작성을 다 마친 뒤 무슨 미련이 남은 사람처럼 회한의 장탄식을 내뱉었던 것일까. 지난달에는 정씨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엄청난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동안은 주민자치 형태로 근무해왔으나 지난달부터는 경비원 전원을 용역회사로 전환해버린 것이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그로서는 청천 하늘에 날벼락이 아닐 수 없었다.

"하늘이 노랗더라니. 용역으로 들어가면 정년이 예순다섯이 되는데 그라믄 내 인생도 반년밖에 더 남았나? 우리 집 할망구가 걱정이다. 우리 집 할망구 10년 전에 암 수술받고 나만 바라보고 산다 아이가."

물론 용역회사에서는 정씨의 나이가 정년이 지나더라도 자르지 않을 테니 마음을 놓으라며 안심을 시키지만 그는 요즘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다. 그들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이미 또 동네방네나 교차로를 통해 그 점을 확인하기도 했다.

"교차로 보면 경비원 모집 연령이 50에서 60세로 돼 있다. 전에 비해 다섯 살이나 줄어들었단 말이다. 이런 마당에 어느 주민이 나같이 나이 많은 사람을 경비원으로 쓰고 싶겠나. 두고 보면 알겠지만 국회에서 말하는 거하고 아파트 주민이 생각하는 거 하고는 천지차이다."

할 말이 많았던 것일까. 아니면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내일이 암담했던 것일까. 한동안 정씨는 굳게 입을 다물어버렸다. 그가 다시 입을 연 건 열쇠를 맡긴 주민에게 열쇠를 꺼내준 뒤였다. 답답하고 초조한 표정으로 관리실 천장을 멍하니 올려다보던 그는 "이 직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보름 주기로 머리 염색을 해온 내 심정을 아느냐?"며 벌써 네 개비째 담배를 피워 물고 있었다.

덧붙이는 글 | 이 원고는 국가인권위원회에서 발간한 <인권> 잡지 5, 6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글을 쓴 소설가 박영희님은 대구에 살고 있는 시인으로 얼마 전 르포집 <아파서 우는 게 아닙니다>, 시집 <즐거운 세탁>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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