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 울산 북구 경동그린아파트 '시인' 경비와 주민들이 힘을 모아 아이들을 위한 공부방을 만들었다. 사진은 지난 10일 저녁 열린 첫 수업 장면. 사진 가운데 가르치는 사람이 조남훈 시인이고, 오른쪽 앉아 있는 사람은 안은주 자치회장.
ⓒ 김정숙
'나눔의 글방' 이름 달고 글짓기·한자 수업

"다섯 평 남짓한 공부방이지만 이곳에서 우리 아이들은 삶의 지혜를 배우고 '어린 시인'이 될 것입니다. 더불어 공부방을 만들기까지 힘을 모은 주민들이 있어 우리 아파트는 울산에서 가장 정이 두터운 공동체가 될 거라 자부합니다."

지난 10일 저녁 7시. 울산 북구 중산동 경동그린아파트 관리실 한켠에서는 이같은 희망을 담은 조촐하지만 의미 있는 첫 수업이 진행됐다.

장소 이름은 '나눔의 글방'. 교사는 이곳에서 경비로 일하고 있는 시인 조남훈(62)씨다. 조씨는 "가르친다는 것을 내가 경험한 인생을 나눠 주는 것이라 생각해" 이름을 '나눔의 글방'으로 지었다.

이날 이곳에서 초등학생 2~3학년 10여 명이 탁자 세 개 앞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조씨의 수업을 들었다. 장난꾸러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떠드는 사람 없이 어제까지 '경비 아저씨'였던 글방 선생님의 얘기를 진지하게 듣고 내주는 문제에도 적극적으로 답한다.

이 수업은 앞으로 학년별로 나눠 월요일에서 금요일 저녁 7시 매일 진행된다. 수업에 참여하는 학생은 모두 60여 명으로 학생들은 이곳에서 매일 글짓기와 한자 공부를 하게 된다.

여러 사람의 작은 정성으로 탄생한 글방

▲ 첫 날 수업에서 조 시인이 내준 숙제를 하기 위해 머리를 맞대고 의논하고 있는 아이들.
ⓒ 김정숙
'나눔의 글방'은 누구 한 사람의 의지가 아니라 많은 사람들의 작은 보탬들이 모여 만들어졌다는 데 무엇보다 의미가 크다. 이 글방은 조씨와 아파트 자치회, 그리고 이 뜻에 동의하는 주변 사람들의 힘이 모아져 탄생됐다.

지난 1997년 한화그룹에서 퇴직해 26년간의 직장 생활을 마무리한 뒤 울산에 정착한 시인 조씨는 우연한 계기로 지난 7월 안은주(43) 아파트 자치회장으로부터 "경비 자리가 비었는데 혹시 뜻이 있으시냐"는 전화를 받았다.

조씨는 "경비로 일하는 대신 관리실 한쪽에 창고처럼 비어 있는 방을 고쳐 그곳에서 아이들을 가르칠 수 있도록 해 달라"는 이색 조건을 달았고, 안 회장으로서는 '굴러온 복'과도 같은 이 조건을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조씨는 "매일 지나가는 기차를 보며 '저 기차가 막차겠지'하는 심정으로 바라봤는데 내 인생도 그렇게 생각하며 이 일이 '내게 마지막 주어진 일이겠지' 생각하며 아이들을 내 손자와 같이 생각하며 가르치고 싶었다"며 "무엇보다 자치회장 등 주민의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말했다.

조씨는 지난 8월부터 이 아파트에서 경비 일을 시작했고, 공부방을 만들 때 아파트 주민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자신이 일하던 회사의 후배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이를 통해 울산에 있는 직원 2명이 지난달 직접 와서 도배도 하고 장판을 깔아 버려진 공간을 새로 단장했다. 울산 북구 중산동 메아리 학교(청각장애 특수학교)에서는 칠판을 선물했고, 이웃한 약수초등학교에서는 복사기를 쓸 수 있도록 배려했다.

특히 약수초등학교 민광식 교장은 "우리 동네에 참 경사스러운 일이다. 학교에서 지원할 수 있는 일이 있으면 얘기하라"고 할 정도로 많은 '지지'를 보내줬다고 한다.

글방에서 공부할 아이들은 지난 달 반상회를 통해 주민들 스스로 신청을 해서 모아졌다.

공부뿐만 아니라 인생을 배우는 곳

이곳에서 조씨는 시험에 필요한 공부가 아니라 '공부하는 방법'을 가르치겠다고 한다. 무엇보다 매일 글을 읽히고 독후감을 쓰게 하고, 생활 한자를 재미있게 가르칠 것이라고. 동시도 짓게 해서 1년 뒤엔 동시집을 펴낼 계획이라고 한다.

공부방을 새로 단장해 뿌듯하긴 하지만 아직 부족한 비품들이 많아 가르치고 배우는데 불편함이 있는 것이 아쉬운 점. 그 중에서도 복사기가 없어 가장 아쉽다고 '귀띔'했다. 아이들 교재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조씨가 좋은 글을 복사해 아이들에게 나눠줘야 하는데 지금은 약수초등학교까지 가서 일일이 해와야 하는 형편이기 때문이다.

▲ 시인이자 경비인 조남훈씨는 '나눔의 글방'에서 아이들에게 글짓기와 생활 한자를 매일 가르치게 된다. 무엇보다 공부하는 방법을 가르치고 싶고 자신의 인생 경험을 나눠주고 싶다고.
ⓒ 김정숙
부족한 것이 많은 상태에서 출발하지만 조씨는 그래도 "아이들이 내 경험을 잘 받아들여 그것을 거름으로 성숙한 어른으로 자라면 그보다 더 행복한 일이 없을 것"이라고 흐뭇해 했다.

안은주 자치회장은 "이름도 모르는 변두리 아파트에 불과하지만 공부방을 만든 그 힘이 씨앗이 돼 앞으로 따뜻한 마음과 사람 사는 냄새가 가득한 아파트로, 그래서 울산에서 가장 살기 좋은 아파트가 될 것"이라며 부푼 기대를 감추지 않았다.

아파트 주민들은 "이름도 안 알려진 변두리 아파트지만 이번 공부방 만들기를 통해 따뜻한 마음과 사람 사는 냄세가 가득한, 울산에서 가장 살기 좋은 아파트가 될 것"이라고 흐뭇해 했다.

한편 조씨는 서울에 있을 때 맺어진 울산 메아리학교와의 인연으로 퇴직 후 지난해 울산 북구 중산동에 정착했으며, 62년부터 작품 활동을 시작해 현재 '잉여촌'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울산 북구에 살게 된 뒤 이 지역의 강인 동천을 소재로 한 시 등 다수의 시를 써왔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울산 북구 웹진 <희망북구>(www.hopebukgu.ulsan.kr)에도 올려져 있습니다.


태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