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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리> <태극기 휘날리며> <실미도> 같은 영화에 1천만이 넘는 관객이 몰려든 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또 2002년 서울시청 앞 광장의 '대~한민국' 함성과 붉은 물결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필자는 오늘 우리 사회의 병변이 새로운 정체성의 확립 없이는 치유할 수 없다고 말한다. 아니 새로운 정체성을 찾아가는 도정이 병변으로 나타나고 있다고 보고 '스스로 돕는' 길을 제시하고 있다. 우리 사회에 대한 그의 진단과 처방을 8회에 나눠 싣는다. 필자는 조선일보 해직기자로 문화일보 편집국장을 지냈다. <편집자주>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유엔미래포럼' 기획위원회의의 화두는 국가의 미래였다. 영국대표 부르스 데이비스 박사는 런던 사우스뱅크 대학에서 강의를 하지만 프랑스 부근 건지라는 영국령 채널반도의 한 섬 출신으로 유럽시민, 영국시민, 건지섬 주민이라는 세 줄의 아이덴티티를 가졌다며 여권표지를 보여주었다.

그는 앞으로 10, 20년 사이에 국가란 개념에 근본적인 변화가 올 것이며, 대통령이나 총리는 더 이상 통치할 것이 없게 될 것이라고 했다. 또 어느 도시 출신이냐, 어느 회사 혹은 기관, 단체에 근무하느냐가 자신의 정체성이 될 것이라는 설명을 들으니 그가 내민 여권 표지가 예사롭지 않게 느껴졌다.

유럽미래회의는 100여 개나 되는 유럽 각국의 항공사가 10년 안에 모두 다국적항공사로 변해 10개로 통합된다고 발표했다. 에어 프랑스와 네델란드의 KLM이 합병한 것이 예다.

소니는 더 이상 일본회사가 아니며, 바하마에 본부를 두고 세계 도처에서 제조, 조립된다. 영국 첼시 주민들이 너무나 자랑스러워하는 프로축구 첼시의 매니저는 프랑스인이고 선수는 세계 각국에서 들어 왔고, 팀의 주인은 러시아인이다.

그러면 앞으로 지구촌 사회에서 정체성은 어디서 오는가. 국가 단위로 애국심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어느 축구팀을 응원하는가, 어느 교회에 다니는가, 어느 자선단체, 어떤 NGO를 후원하는가 등 자신의 삶의 존재를 알려주는 활동에 연관시키게 될 전망이다.

국가의 의미가 사라질 때 부존자원은 부족하고 인적자원은 풍부한 우리에겐 좋은 기회가 제공되는 것이다. 무국경 지구촌 어디에나 진출해 활동할 수 있기 때문에 무한한 영토확장이 가능하지 않을까.


조선일보 독자 칼럼에 유엔 미래포럼 한국대표라는 분이 실은 글입니다. '지구촌 사회에서 정체성은 어디서 오는가?'

힘들여 절벽을 오르니 위쪽은 평평한 산길과 연결되어 있어서 마침 소풍 나온 사람과 만난 것 같은 기분입니다. 평생을 찾아 헤매든, 어느 회의석상에서 문득 그렇구나하고 느꼈든 문제는 정체성입니다.

정체성을 갈구하는 사회심성은 폭발 직전

'대~한민국의 아이디', 새로운 정체성의 모색보다 지금 우리에게 더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간혹 몇몇 학자들이 '정체성위기'를 거론하지만 아무도 깊이 들어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뭔가 정체성을 갈구하는 '사회심성(社會心性)'은 폭발직전입니다. 사회심성이라는 말은 흔히 쓰이지는 않는 말입니다.

시대정신과는 다른, 인터넷이 만들어 낸 집단심리의 표출, 이 집단심리를 이해하지 못해서는 앞으로는 정치든 경제든 문화든 말할 수가 없습니다. 사회심성이랄 수 있는 집단심리가 사이버 세계에서 현실로 건너와 국면을 장악해 가는, 세계 최초의 네트워크 국가, 영화에서나 있음직한 거기가 여깁니다.

▲ 월드컵의 '대~한민국!'은 나라가 제 할 일을 못하기 때문에 시청 앞 광장에 새로운 나라를 만들자는 외침인 것 같았습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쉬리> <태극기 휘날리며> <실미도>같은 영화에 천만이 넘는 관객이 몰려 든 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백만이 관람했다면 영화가 잘 된 것이지만 천만이 동원됐다면 단순한 영화가 아닙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감독도 의식하지 못했을 것이지만, 모두 '국가'를 주제로 한 것들입니다. 사람들이 어딘가 새로운 것에 귀속하고 싶어하는, '정체성'을 갈망하는 집단심리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근대주의에서 벗어날 궁리만을 하는 필자에게는 월드컵의 '대~한민국!'은 나라가 제 할 일을 못하기 때문에 시청 앞 광장에 새로운 나라를 만들자는 외침인 것 같았습니다.

예의 사회심성은 그러나 감정(感情)이어서 뭔가 요구하지만 스스로 해답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엄청난 에너지이지만 공명(共鳴)할 줄 알뿐입니다.

대~한민국의 아이디, 그것을 지금 우리가 만들어 내지 못하면 '만들어 가는 의지'가 나서서 혼돈을 통해, 우리 백성들의 희생을 통해 거기 이르려할 것입니다.

스스로 자족하는 삶 웰빙, 조직화된 사회심성, 우리 국민들은 이미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대혼돈은 희망을 잉태하고 있어서 여기저기서 희망이라는 낱말이 튀어나오고 있습니다.

에코 이니셔티브라는 등불

어둠을 밝히는 등불 하나가 밝게 빛나고 있습니다. 에코 이니셔티브라는 등불입니다.

에코 이니셔티브, 거기서 우리의 비전과 전략을 모두 담아낼 수 있는 새로운 정체성을 찾을 수 있습니다.

미래에 세상이 가는 방향에 깃발을 세우면, 사람들은 그리로 밀려오다가 그 깃발을 보고 거기 모여서 힘을 만들어 낼 것입니다. 낡은 패러다임의 업보(業報)를 도맡아 치르고 있는 우리가 먼저 생태주의 이니셔티브에서 우리의 새로운 정체성을 만들어 나가면, 근대 합리주의체제를 벗어 던지면, 동북아 일대에 엄청난 파장이 일 것입니다.

미국과 중국, 일본들의 강대국 내셔널리즘이 목표를 잃고 허둥댈 것이 아주 분명합니다. 저들의 게임의 룰을 버리면 김정일의 북한 핵보다 상대하기 더 어려울 것입니다.

앞에서 청와대가 '균형자' 이론을 들고 나온 것을 언급했습니다만 그것은 설익은 것입니다. 세력균형이라는 근대국가 게임 자체를 거부해야 합니다.

▲ 에코 이니셔티브, 거기서 우리의 비전과 전략을 모두 담아낼 수 있는 새로운 정체성을 찾을 수 있습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새로운 적'은 증오의 역학이 아니라 사랑으로써만 극복할 수 있다는 확신을 실천해나가는 에코 이니셔티브를 추켜들면 지금 세계를 휩쓸고 있는 반전주의들, 아나키스트들, 에코그룹들, 페미니스트들이 공명해올 것입니다. 이들과 서로 연대해서 게임의 룰을 새로 만들어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에코 이니셔티브는 우선 이니셔티브입니다. 권력이 아니라 이니셔티브입니다. 권력은 정통성을 기반으로 하지만 이니셔티브는 정체성을 만들어 나가는 것입니다.

'권력은 총구로부터 나온다'고 했습니다. 물리적인 힘(force)은 상대가 인정하게 되면 심리적인 힘(power)이 되면서 그 역관계가 법이나 제도, 관습으로 굳어져서 권력이 됩니다.

그러나 이제 근대국가는 적이 없어지면서 그 물리력이 존재 근거를 잃고 있어서 종내는 권력이 무력화되고 있습니다. 권력은 없습니다. 정치는 더 이상 권력이 아니라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창조적 동기(動機), 이니셔티브여야 한다는 것이 분명해지고 있습니다. 무늬만 에코지만 '청계천 복원'이 사회에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도 깊이 음미해야 합니다.

조금만 따져 보면 이미 우리 사회에서 시민운동이나 이른바 '언론 권력'들의 이니셔티브가 권력을 제치고 국면을 주도하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무슨 '민주화'가 되어서 그런 것이 전혀 아닙니다.

여기 다시 IT 직접민주주의를 조응하면 상황은 분명해집니다. 정치는 이미 여의도에서 벗어났습니다.

현실 정치에 교두보를 마련해야 하지만 직접민주주의 시대의 새로운 정치는 운동입니다. 정치와 운동의 결합, 새로운 대중노선으로 낡은 것을 쓸어 버려야합니다.

에코 이니셔티브는 당연히 보수ㆍ진보가 노론ㆍ소론에 불과하다는 전제 위에 섭니다. 시대착오임에도 불구하고 '서로 적대하는 역학'으로 지탱해 온 저들은 에코 이니셔티브가 등장하면 역사 속으로 사라질 것입니다.

한국의 세계화, 그리고 지역화

에코 이니셔티브는 당연히 세계를 유기적인 하나로 만들어 가는 의지의 표현입니다. '한국의 세계화', 팬 코리안들을 모두 모아 거기서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만들어 가는 길이 있습니다.

'한국의 세계화'는, 북쪽의 우리들, 일본의 우리들, 중국의 우리들, 하인즈 워드의 우리들이 하나의 단위가 되는 대~한민국은 남북대립, 동서분열의 낡은 틀을 일거에 휩쓸어 버릴 수 있습니다.

'유엔 미래포럼'처럼 '무국경시대의 영토의 무한한 확장'을 생각하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기존 틀에서 벗어나기만 하면 크게 열려 있는 한결 쉬운 길입니다.

에코 이니셔티브는 또 지역화입니다. 유럽공동체가 물론 대표적인 지역화지만, 구소련권 나라들도 사실상 지역화되어 버렸습니다.

중국이 바다를 낀 연안 지역의 경제가 고속 성장하면서 내륙과 경계를 긋고 있는 것도 크게 보면 지역화입니다. 그러나 이런 '국가단위'만 지역화가 아닙니다. 세계 도처의 민간공동체 운동도 지역화입니다.

다른 한편 요즘 우리 사회처럼 '지방화시대'라든가 '행정수도 이전' '지역 균형 발전'같은 것들은 이런 흐름을 잘못 읽은 설익은 것입니다. 지역화란 근대국가권력이 힘을 잃어 가면서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새로운 모듬살이 틀이라는 것은 까맣게 모르고 있습니다.

'지역화'에서 나라의 정체성을 새롭게 세워 나갈 녹색 비전을 마련해야 합니다. 근대국가적 권력이 아닌 새로운 정체성에 근거한 나라가 20년 30년 후, 재앙이 휩쓸고 간 폐허(廢墟) 위에 나타날 수밖에 없는데 '지역화'로 그것을 앞당겨 놓자는 것뿐입니다.

▲ 신수불이(身水不二), 물은 자연에서 대순환하고 우리 몸에서 소순환하면서 생명의 고리를 이어갑니다. 하늘에서 내려다본 낙동강(항공촬영).
ⓒ 오마이뉴스 권우성
어떤 외국인이 벌써 20년 전에 한국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하이테크 풍수지리' 국가를 만들 수 있는 자연적 인문적 조건을 갖추고 있다고 한 말이 생각납니다. 패러다임만 바꾸면 이 작은 땅 덩어리를 그런 '하나'로 만들어 낼 수 있는 조건은 성숙되었고 이미 우리는 그것을 이뤄 낼 역량을 구비하고 있습니다.

생태주의 이니셔티브의 새로운 정체성은 그러나 구체적인 형태를 갖춰야 합니다. 하늘에서 비가 내리면 산줄기 분수령을 따라 남한강 북한강으로 모여서 바다로 갑니다.

신수불이(身水不二), 물은 자연에서 대순환하고 우리 몸에서 소순환하면서 생명의 고리를 이어갑니다. 여기 자연과 사회를 자연스럽게 엮을 방법이 있습니다.

우리가 무슨 경기도니 경상도니 하는 구분이 아니라 한강이나 낙동강이 중심이 돼서 물이 순환하는 틀을 만들면 한강 동네, 낙동강 동네의 나무하나 풀 한 포기가 한강 사람, 낙동강 사람과 생명으로 이어져 있다는, 자연과 사회를 잇는 '설정'이 가능합니다. 금강ㆍ영산강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군가 백두대간을 트래킹 코스로 만들자는 제안을 했는데 아주 좋은 착상입니다. 나라 전체를 자연과 사회가 하나인 틀로 만드는 것이 생태주의적 정체성에서 중요합니다.

다른 한편, 나라 전체의 규모에서 보면 우리나라에는 나름대로 자생력(自生力), 이른바 시너지 효과를 갖췄거나 갖출 수 있는 어반 클러스터(urban cluster, 인구밀집공업지역)가 네 군데 있습니다.

명지대학의 김석철 교수는 경인지역과 부산대구지역 그리고 포항울산지역 등의 기존 어반 클러스터와 더불어 광양만에서 새만금에 이르는 지역에 황해경제권의 중심축이 되는 어반 클러스터를 당장 만들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거기에 다시 한강 낙동강 영산강 섬진강 등 '자연'을 모두 동원하자는 것입니다.

에코 이니셔티브는 그러나 무엇보다 사업입니다. 공자가 말한 바 '성인이 하늘의 뜻을 돕는 사업'이지만 동시에 자원 분배의 우선 순위를 재조정함으로써 엄청난, 세계규모에서 사상 최대의 프로젝트를 펼쳐 일거에 경제를 세계 최고의 '선진경제'로 발전시킬 수 있습니다.

'풍수지리 하이테크'와 더불어 도시와 농촌의 완전 통합과 전국토의 '공원(公園)화'는 대대적 투자경기를 일으켜 농촌문제를 해결하고 앞으로 전개될 부동산 폭락을 완충할 수 있습니다.

또 이를 통한 내수(內需)의 활성화로 고용을 늘리는 한편 우리경제의 대외의존도를 줄여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당장 '경제를 하나 더' 만들지 않으면 살 길이 막힙니다.

주말마다 전국을 뒤덮는 '집을 찾는 행렬'

일본의 오마에 겐이치는 우리나라가 앞으로 인구 500만에서 1000만명 단위의 '지역국가'로 개편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나라를 쪼갤 수야 없지만 그의 이 같은 주장의 근거도 그가 근대국가의 와해를 주장하고 있는 만큼 비슷한 맥락일 것 같습니다.

산에서 사는 방법을 찾을 수는 없을까요? 무조건 '출입금지'로 일관할 것이 아니라 국토의 70%에 달하는 산지, 자연을 내놓아야 합니다. 산지의 활용은 어려운 것 같지만 간벌(間伐) 하나면 끝납니다. '경치가 좋다'는 것은 나무와 물입니다.

나무를 잘 자라도록 간벌을 해서 하늘을 찌를 듯 울창한 거목들이 자라고 그 밑에 냇물도 도도히 흐르게 되면 우리 산야는 어디나 공원입니다.

여기 다시 새로운 산지농업(forest farming)을 펼쳐 산나물과 약용식물 등 갖은 야생초들이 다투어 비집고 자리잡게 하면 거기가 '제2의 경제' 현장일 수 있습니다.

요즘 우리의 산은 칡넝쿨이 아주 점령을 했습니다. 고속도로 연변이든 깊은 산 속이든 나무나 숲이 도처에서 칡넝쿨을 뒤집어 쓴 채 죽어 가고 있습니다.

50, 60년대 우리 산야는 헐벗고 메말랐습니다. 산성 토양으로 하얗게 바랜 민둥산에 비루먹은 짐승처럼 비틀어진 소나무들, 이들은 차라리 우리의 표상(表象)이어서 슬펐습니다.

서울농대의 유달영 교수는 그 비루먹은 소나무들을 사람에 비유했습니다. 누대(累代)에 걸쳐 척박한 환경에서 낙락장송은 사라지고 점점 더 열성인자만 남는 것이 우리 사회와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70, 80년대 산을 그대로 놓아두어서 조금은 숨을 쉴 만해지니까 이번에는 공해와 이상 기온으로 칡넝쿨이 쳐들어 왔습니다. 비유가 아니라 오늘 우리 사회의 일그러진 모습과 유령처럼 칡넝쿨을 뒤집어 쓴 산야는 하납니다.

▲ 주말마다 전국을 뒤덮는 이 행렬은 ecology, 자연에서 집, 마음의 고향이라 해도 좋은, 집을 찾는 행렬입니다.
ⓒ 김정대
김지하 시인은 주말마다 전국의 도로를 가득 메우는 나들이 행렬을 가리켜 유목민이라고 했습니다. 주말 고속도로의 자동차는 늘 30만대를 웃돕니다.

라틴어의 oicos는 economy면서 또 ecology의 뜻을 가지고 있는데, 다른 한편 집입니다. 주말마다 전국을 뒤덮는 이 행렬은 ecology, 자연에서 집, 마음의 고향이라 해도 좋은, 집을 찾는 행렬입니다. 이 에너지가 국토 공원화의 경제(economy)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른바 경제 전문가들에게 이런 주장을 하면 무슨 성장 잠재력을 마모시킨다든가 인플레를 일으킬 것이라든가 하는 낡은 법칙을 들고나올 것입니다. 그러나 거듭 말하지만 종래의 갖가지 정치 경제 경험법칙은 이제는 폐기하고 당장 '과잉시대의 경제학'을 연구하는 것이 시급합니다.

패러다임 시프트, '세계화'를 주의깊게 살피면 거기서 살 길이 나올 수가 있는 것입니다. 중국이 벌써 20여년 동안 지속적인 성장을 하고 있는 것이나, 요즘 아르헨티나와 브라질이 형편이 크게 나아지는 것들은 세계화 이전의 국제 정치 경제 질서 아래서는 어림없는 일입니다. 세계화로 여기저기 허점이 많아서 가능해진 것입니다.

동북아 생태주의 전략의 핵심은...

한국과 시베리아를 생태축으로 연결하는 것도 지역화입니다. 다음 국면에서 무너져갈 분단체제를 대신하는 새로운 정치경제 틀, 동북아의 여러 지역과 더불어 사는 틀을 모색하는 것입니다.

동북아 생태주의 전략에서 핵심은 2가지입니다. 첫째는 국제적 조건을 정확히 이해하는 것이며 둘째는 동북아경영의 정치 경제 생태적 의미를 올바로 정립하는 일입니다.

고르바초프의 경제브레인이었던 샤탈린은 90년대 초 세계자본의 3분의1을 가지고 있었던 일본을 겨냥하고 4천5백억 달러 규모의 시베리아 개발계획을 세웠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무산된 이유를 그 무렵 <비즈니스 위크>지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었습니다.

냉전이 끝나자 누구나 미국과 일본이 소련과 중국을 자본주의 시장으로 조직해 나가는 경쟁을 벌일 것으로 예측했지만 전혀 그 같은 움직임이 없다, 아마도 한 10년쯤 뒤 세계의 금융자본이 깨져나간 후 시장 확대에 나서는 산업자본이 나타나게 될는지 모르겠다고 했습니다.

이 예측은 대체로 맞아서, 아직도 미국이나 일본이 구소련 권이나 중국으로 진출하려는 본격적인 움직임은 없습니다만 아마도 그런 움직임은 앞으로도 없으면서 자본주의 세계체제가 종언을 고할 가능성이 더 큰 것 같습니다.

금융자본의 세계지배가 다시 산업자본 쪽으로 간다고 보기는 어렵기 때문입니다. 마르크스가 다시 살아난다면 그는 '전제'가 깨져서 그의 이론을 '수정(修正)'하느라 바쁠 것입니다만 자본주의의 마지막 단계로서의 금융자본주의라든가, 국가의 소멸(消滅)들은 수정하지 않을 것입니다.

다른 한편 미국과 일본이 러시아와 중국을 잠재적인 적이 아니라 마샬 플랜식의 시장확대로 간다는 것은 국가주의의 자기부정과 연결되지 않는 한 어려울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우리의 동북아 경영에 대해 미ㆍ일이 견제할지는 모르지만 경쟁에는 소극적이며, 또 러시아가 아니라 시베리아라는 '지역'이 당사자능력을 갖고 있어서 지역 협력이 가능하다는 점입니다.

또 세계의 금융시장에서 자본을 구하기가 용이하기 때문에 성사 가능성이 큽니다. 시베리아 그 드넓은 대지 위에 자연과 인간이 하나로 더불어 사는 방법을 찾는 일은 어렵지 않습니다.

서양의 그린피스나 녹색당들이 좀처럼 전면에 나서지 못하는 것은 근본적인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근대합리주의가 가로막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앞에서 쌀을 합리적으로 관리한 일본이 노른자위랄 수 있는 씨눈을 제거한 백미에 만족하는 반면 쌀 지키기에 실패한 한국에서 새로운 쌀이 나올 수 있다고 했으며, 변두리가 새로운 중심이 되는 논리를 누누이 강조했습니다.

쉽게 말해서 환경이 잘 정비된, 더구나 합리주의의 본산인 유럽은 일원론적 생태주의가 자랄 토양이 아닙니다. 동양사상의 전통 위에 서양합리주의가 고통으로 단련시켜 에너지를 응축시킨 이 땅이 아니면 어디서 진정한 생태주의 국가가 나올 수 있겠습니까.

나는 누구인가 우리는 무엇인가? 정체성(正體性), 만들어 가는 의지가 어렵사리 만들어 가고 있는 아이덴티티(Identity), 거기 일치하지 하려는 노력 없이는 이 대혼돈을 거두어 낼 수가 없습니다.

덧붙이는 글 | 마지막 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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