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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흐를수록 흙은 사라지고 그 위에는 잘 닦인 아스팔트가 깔리는가 하면 초가집이 언제 있었냐는 듯 아파트가 줄기차게 들어서고 있다. 신도시 운운하면서 전 마을을 닭장으로 변모시키는 것이 요즘이다.

▲ 변산바다 쭈꾸미 통신
ⓒ 소나무
그럴수록 생각나는 것은 어린 시절 구부구불한 길을 맨발로 뛰어다니던 고향 마을 풍경이다. 이제는 농촌도 개발되다 보니 길이 닦이고 아파트가 들어서지 않으면 잘 지어진 양옥집이 그 자리를 대신해 고향 풍경 볼 수 있는 날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

바다와 갯가에 끌어 매놓은 꽁댕잇배, 당산나무, 바다를 바라보는 야트막한 초가집, 내 키보다 더 큰 농어를 질질 끌고 오시던 아버지. 한 집 전화기로 모든 것을 해결하던 그 시절의 향수가 물씬 풍겨온다.

이제는 드라마, 영화 혹은 책에서나마 위안을 삼을 수밖에 없게 된 지금 우리의 향수를 자극하는 책 한 권이 출간되었다. 바로 <변산바다 쭈꾸미 통신>이다. 진짜배기 농군이 그려낸 농촌 이야기. 과연 얼마만큼 우리에게 옛 추억을 떠오르게 할 수 있을까.

결과는 100% 만족이다. 이 책의 저자 박형진은 58개띠로 중학교 1학년 중퇴의 학력이다. 서울에서 고물장수로 연명하다가 고향 부안땅 변산에 내려와 농사를 지으며 생활하고 있다. 그는 일곱형제 막둥이로 태어나 어머니 치마꼬리 붙잡고 마실 다니며 '이야기꾼들의 대지'를 품에 안았고 초등학교에 들어가선 100권짜리 <한국문학전집>을 표지가 해지도록 읽어 제낀 문학소년이었다.

젊은 날 시국강연장에 부지런히 드나들다가 94년 <창작과 비평> 추천으로 첫 시집 <바구니 속 감자싹은 시들어 가고>(창비·1994), 산문집 <호박국에 밥 말아먹고 바다에 나가 별을 헤던>(내일을여는책·1996), 두번째 시집 <다시 들판에 서서>(당그레· 2001), 산문집 <모항 막걸리집의 안주는 사람 씹는 맛이제>(디새집·2003)를 쓴 저력있는 작가이다.

글 몇 문장으로 사람을 다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시'로 세계를 노래하듯 박형진을 한마디로 노래하면 '농사짓는 시인'이다.

그는 자식 넷을 두었다. 깡마르고 다부진 첫째 놈은 푸짐이(딸년), 몸피 큰 선머슴아 둘째는 꽃님이(딸년), 얼굴 본 지 한참 되어 지금 워찌큼(어떻게) 컸는지 모를 셋째 놈은 아루(딸년), 엄마가 선생이고 아빠가 운전기사인 놀이방 차에 실려 이틀에 하루거리로 눈에 띄는 막내녀석은 보리(아들 내미)다.

박형진이 이렇게 자식들과 알콩달콩 지내면서 잘 하는 것이 두 가지 있다. 바로 농사와 글이다. 농사나 글 모두 풍년을 들게 할라치면 많은 시간 속에 노하우가 있어야 한다.

가방끈이 짧은 시인이지만 누구 보다 말맛이 있음을 책을 본 이들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박형진 글의 스승이라고 한다면 사랑방에 모여 나물을 다듬으며 속닥거리던 어머니와 생초각시, 갈비이모요, 죽은 사람 관 짜 주고 침 잘 놓던 아버지요, 술 먹고 태봉이네 마당서 쌈질하던 동네 사내들이며, 도깨비 잘 나던 '숯구덩이 미친년 잔등'일 것이다.

박형진이 10년만에 <호박국에 밥 말아먹고 바다에 나가 별을 헤던>의 글을 고쳐 다듬고 새글을 보태 펴낸 <변산바다 쭈꾸미 통신>(소나무·2005)에서 편집자는 그의 글맛을 이렇게 표현한다.

"찰지기로는 인절미같고, 허물없기로는 쑥개떡같고, 맛나기로는 짭쪼롬한 보래새우 젓갈같은 박형진의 글맛은 어디서 온 것인가는 그 살아 온 품새를 보면 알아 볼 만하다"

이 책은 세대 간에 벌어지는 추억의 장소이다. 그 곳에서 살면서 저자의 일상을 그대로 담아내고 있다.

도깨비불 날던 곳 '고향', 고구마 두둑 쩍쩍 금이 가던 '가을', 가마솥 콩물 줄줄이 흘러 넘치던 '겨울', 쑥개떡 향 아른아른한 '봄', 너벅너벅한 상추쌈 볼태기 터지는 '여름'을 구수한 글 맛으로 담갔다. 무심코 집어든 책이라도 읽다보면 때론 코끝이 시큰해지고 때론 가슴 안쪽이 구들장처럼 천천히 뜨뜻해진다.

변산바다 쭈꾸미 통신에는 세 가지 맛이 있다.

첫째, 군침이 도는 음식 맛과 글 맛이다.

나는 부엌에서 "니미럴! 나도 한 잔 주면서 처먹어라" 욕을 하면 나한테도 크라스 소주잔이 막 돌아온다. 요리도 술 한 잔 들어가서 기가 승해야 잘 되는 것이다. 대가리는 미리 삶아서 푹 익혀야 맛이 나고 발은 살짝 삶아야 연하다. 조미료는 빼 버리고 고춧가루, 쪽파 굵직하게 썬 것, 마늘, 설탕, 간은 소금간이라야 맛이 있는데 왜간장을 약간 쳐도 무난하다. 그러나 왜간장만으로 간을 해서는 안 된다. 초를 좀 많이 넣고 큰 양푼에 양념을 버무린 다음 여기에 삶은 쭈꾸미를 넣고 뒤적거려야 한다.

쭈꾸미 회는 뜨겁고 맵고 신맛이 강해야 제 맛이 난다. 매운 맛이나 신맛은 음식이 뜨거워야 더 강하게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무친 것은 벌써 몇 점 집지 않아서 이마에 땀이 맺힌다. 알이 가득 찬 대가리는 입안에 넣고 뜨거워서 씹지를 못하고 얼굴들이 벌겋다. (본문 140쪽)


음식이 맛있다는 것이, 글이 맛있다는 것이 이를 두고 한 말인가. 저자가 늘어놓는 철따라 해 먹었던 음식 이야기는 보지도 않고 상상만 해도 군침이 넘어가도록 하는 재주가 있다. 칠남매의 막둥이로 어머니 치마꼬리 잡고 다니며 음식 만드는 구경을 많이 했다지만 그 자신이 음식 만들기를 즐기는 사람이 아니었다면 쓰지 못할 글이지 않겠는가.

두 번째, 그의 구수한 사투리를 빼놓을 수 없다. 사투리가 많이 없어지고 표준어가 자리를 잡아 그 구수한 맛을 들으면 지금처럼 향수에 젖어 새록새록 더 해진다. 그래서 이 책에 저자가 말하는 사투리는 잊을 수 없다.

'시뿌장스러운'(마음에 차지 않아서 시들한), '알음짱하고'(눈치로 넌지시 알려 주고), '약꼽재기'(속이 좁고 약아빠진 사람), '달롱개'(달래), '나숭개'(냉이), '그중스러우니'(아주 걱정스러우니), '굴풋한'(배가 고픈 듯한), '뒷서두리하는'(뒤에서 서둘러 일 도와 주는) 같은 전라북도하고도 변산 갯가 마을의 쫄깃한 사투리가 쏟아진다.

특히 이런 사투리를 저자의 솜씨인지 책을 만든 이들의 노고인지 문장마다 쏟아지는 사투리의 해설을 따로 달아놓아 젊은 세대들에게도 낯선 재미를 안겨다 줄 수 있다는 점이 또 하나의 매력이다.

그리고 마지막 우리의 추억이 방울방울 열리게 만드는 고향 풍경이다. 그것이 빚어낸 풍경은 달리단 추억의 맛을 느끼게 하는데 충분하다.

빨간 크레용을 입술에 찍어 바르던 이웃집 누님, 아이스 케키 장수 넘어오던 몬당(언덕), 큰 눈 지고 그치면 나서던 토끼몰이... 한 집의 아들이 군대에서 보낸 편지를 온 동네가 돌려보던 시절, 대처에 돈 벌러 나간 어린 자식들 돌아오는 명절이면 고향집 불빛보다 먼저 풍물소리 달려와 가슴 어루만지던 시절의 고향 풍경이 때론 익살맞게, 때론 구슬프게 그려져 웃다가 울다가 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 책을 보면서 추억의 향기를 느끼고자 한다면 충분히 회상에 잠길 수 있을 것이다. 쉽사리 읽고 넘어갈 수 없을 만큼 글맛이 뛰어난 <변산바다 쭈꾸미 통신>을 천천히 읽어보기 바란다.

변산바다 쭈꾸미 통신 - 꼴까닥 침 넘어가는 고향이야기

박형진 지음, 소나무(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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