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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열된 문화의 폭력

우리 사회의 특징 중 한 가지는 문화의 정체가 모호해졌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사람들에 따라서 '문화'라는 말이 의미하는 내용과 가리키는 대상이 큰 차이를 보인다. 그 결과 사람들의 '문화생활'도 천차만별이고 '교양 있는 문화인'의 모습도 각양각색이 되어 버렸다. 이러한 상황에서 다소 명확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두 가지뿐이다.

첫째는, 개념과 경계는 모호해도 우리의 문화가 고급문화와 대중문화로 양분되어 있다는 점이다. 한편에는 오랜 역사와 전통을 가진 예술을 축으로 하는 고급문화(refined culture)가 있고, 다른 한편에는 텔레비전과 컴퓨터, 인터넷 등 과학기술을 바탕으로 하는 대중문화(mass culture)가 있다. 예술과 기술을 축으로 하는 두 문화가 서로 마주보며 있는 셈이다.

이렇게 서로 반대편에 위치해 있지만, 이들 문화는 모두 사람들의 실제적인 삶의 공간과는 거리를 두고 있다. 일상생활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던 민중ㆍ민속문화(popularㆍfolk culture)가 소멸된 까닭이다. 이로써 우리 삶의 정수(精髓)로 문화가 피어나는 것이 아니라 알 수 없는 문화의 논리에 삶이 휘둘리는 상황이 전개된다.

얼리 어댑터와 타임 걸의 문화

우리 시대의 문화에 대해 말해볼 수 있는 두 번째 사항은, 그 수용 과정에서 유사한 면모가 확인된다는 점이다. '따라하기'와 '과시하기'가 그것이다.

고급문화든 대중문화든 우리는 문화 산물들을 소비하는 데서 남들에게 뒤쳐지지 않도록 노력한다. 집단에서 소외되지 않기 위해서든 남들처럼 산다는 위안을 얻기 위해서든, 새로운 문화 산물들을 끊임없이 소비하는 데 전력을 다하는 것이다.

유행처럼 뚜렷한 근거를 갖지 않은 채 덧없이 변하는 대중문화의 경우 이러한 현상이 좀더 심하지만, 고급문화라고 사정이 다르지는 않다. 예술 애호가로 자처하기 위해서는 각 분야에서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가를 아는 것'이 중요하게 되었다. 새롭게 쏟아져나오는 문화 산물의 동향을 재교육(르시클라주, recyclage)받아야 하는 운명에 처해 있는 것이다.

새로운 산업 제품이 나올 때마다 곧장 그것을 구매하는 얼리 어댑터(early adaptor)와 다를 바 없는 이러한 상황, 문화의 '르시클라주' 현상이 강화되는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전통에서 멀어지고 비판적 사고의 여지를 갖지 못하게 되었다.

의미와 가치를 음미하기 전에 스스로를 재교육시키며 추세를 따라가야 하는 상황이 펼쳐지는 것이다. 이리하여, 문화생활의 영역에서 가장 반문화적으로 행동하게 된다는 우리 시대의 역설이 가능해진다(장 보드리야르, <소비의 사회> 참조).

현대 문화생활의 또 다른 특징은 '과시하기'의 성격이 강하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이러한 태도도 다시 둘로 나눌 수 있는데 첫째는 '따라하기'의 심리가 극대화된 결과라 할 수 있다. '얼리 얼리 어댑터'로 자신을 내세우는 경우이다. 둘째는 양 문화의 경계를 넘어서 따라하기가 이루어질 때이다. 대중문화 수준의 안목을 가진 채 고급문화를 따라하여 생기는 조잡한 문화 곧 '키치(Kitsch)'가 대표적인 예이다.

키치에 대해서는, 대중들의 심미안이 발전해 나가는 과정을 증명해 주는 것이라고 역사적인 면에서 긍정적으로 볼 수도 있지만(에드워드 쉴즈, <대중사회와 대중문화>), 그 원리에 있어, 문화예술을 감상ㆍ이해하기보다 그것을 소유하고 소비함으로써 자신의 욕망을 충족 시키고 지위를 뽐내는 것이라는 점에서 문제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칼리니스쿠, <모더니티의 다섯 얼굴>).

한강변에 늘어선 고딕 풍의 아파트라든가, 바로크적인 외양을 갖춘 가구와 모조 도자기가 함께 진열되는 우리 시대 중산층의 거실 등이 키치적인 문화 수용의 좋은 예가 된다. 이러한 수용자들은, 제대로 읽지도 못하는 <타임>지를 옆에 끼고 다니며 대학생임을 은연중 과시하던 1980년대 '타임 걸'의 선후배며 동료이다.

대중문학의 두 얼굴

문화의 르시클라주 현상이 우리에게 얼리 어댑터의 강박을 부여하고, 키치적인 면모가 우리들을 타임 걸의 후예로 만드는 현상이 좀 더 짙게 드러나는 것은 물론 대중문화에서이다. 대중문학 또한 예외가 아니다.

인터넷에 산재해 있는 대중문학 사이트의 글들 대부분은, 어떠한 작품이 나왔으며 무슨 작품을 읽었다는 사실의 기록에 그쳐 있다. 작품의 의미나 의의에 대한 생각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상황과 동향을 파악하고 따라가는 데 집중할 뿐이다.

상황을 주도하는 소수 마니아들의 동향 소개 글이나 드물게 볼 수 있는 다소 깊이 있는 분석 글들을 퍼 나르는 것 또한 동일한 행위에 속한다. 그 글들에 대한 평가나 판단은 거의 없이, 남들보다 빨리 그리고 많이 옮기는 데만 몰두하는 까닭이다. 대중문학의 부정적인 양상은 이렇게, 예술적으로 저급하기는 한 대중문학 작품들 자체의 수준에 있다기보다, 그것을 수용하고 전파하는 일반적인 방식이 보이는 무의식성에서 찾아진다.

대중문학 자체가 나쁘거나 부정적인 것은 아니다. 탄생 과정에서부터 찾아볼 수 있는 역사적인 의의와 더불어 대중문학 작품들의 주제효과 또한 매우 소중하다.

대중문화 및 대중문학의 의의는 무엇보다도 문화 향유의 민주화를 증대 시켰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19세기 중반 프랑스에서 대중문학이 수립된 이후 1950년대 초의 미국 텔레비전 방송에 이르기까지, 형성기의 대중문화는 말 그대로 문화의 대중화에 크게 기여했다.

책과 신문, 라디오, 영화, 텔레비전 등 대중적인 의사소통 매체를 통해 고급문화가 대중들에게로 확산되어 들어간 것이다. 이후 자본의 논리가 우세해지면서 대중문화의 저속화 현상이 심해지기는 했어도 대중문화의 발전이 문화생활의 민주화를 증대시킨 공로는 잊을 수 없다.

대중문화의 산물, 대중문학 작품들이 보이는 작품 세계 또한 나름대로 긍정적인 의미를 갖는다. 초창기 대중문학에 있어서, SF가 보인 과학적 사고에 대한 지지와 경계나 추리소설이 전제로 하는 합리적인 추론 능력에 대한 신뢰 등은 그 자체로 소중한 것이다. 과학의 미래를 낙관하는 줄 베른의 SF는 메리 셀리의 <프랑켄슈타인>이나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 등이 보이는 우려와 균형을 이루고 있으며, <셜록 홈즈 시리즈>는 당대 사회의 사실주의적인 보고 기능도 겸하고 있다.

사실 따지고 보면, 감상성이 짙은 연애소설이나 엽기적인 호러물 또한 필요한 것이고, 실제 사회와는 무관한 세계에서 나름의 법칙을 가지고 전개되는 무협소설이나 판타지 등도 유흥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순기능을 인정하지 못할 것이 아니다.

추리와 환상, 과학적 원리, 에로티즘 등이 대중문학에만 고유한 것이 아님은 자명한 일이니, 그러한 요소로 일관하였다고 대중문학을 탓하는 것은 편협한 처사라 할 수 있다. 고급문학과 교양, 여타 예술이 주는 재미 이외의 측면 즉 인간성을 고양 시키거나 사회적 삶에 대해 반성하게 해주는 것 등과는 거리가 있어도, 대중문학이 제공해주는 유흥과 재미 또한 인간의 필요에 의한 것이기 때문이다.

원한의 치유, 진정한 향유

우리 나라에서 대중문학은 약자의 불행한 역사를 겪어 왔다. 1980년대에 이르기까지 대중문학은 저급한 것으로 여겨져 제대로 된 독서물로 인정받지 못했다. 문학의 유흥 제공 기능이 문학 논의에서 거론조차 되지 않는 시대 분위기 등을 이유로 들 수 있다. 그 결과 SF, 추리, 판타지 등 중요 장르문학들은 주로 아동용으로 소개되고, 연애소설은 하이틴문학으로, 무협은 청소년 및 성인들의 저속한 독서물로 낙인찍혔다.

최근 20년간은 이러한 상황이 극적으로 전복되는 시기였다. '전복'이라는 말이 과장이 아닐 만큼 대중문학의 위력이 막강해져서 본격문학 또한 그 물결에 휩쓸리거나 고립되는 형편이다. 대중문학의 득세로 인해서 대중들의 문학활동 일반이 '따라하기'와 '과장하기'의 위협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상황을 두고 보면, 지나온 불행한 역사 속에서 대중문학이 원한(르상티망, ressentiment)을 품었다고 할 수도 있다. 약한 노예가 약함을 선으로 강함을 악으로 규정하는 도덕상의 반란을 통해 주인을 부정하고, 끝내는 본능을 전도시킨 명제를 따라 폭력을 행사하듯이(니체, <도덕의 계보>), 오늘의 대중문학 특히 그 소비 양상은 문학계 전반에 르시클라주와 키치 현상을 만연 시키며 문학의 죽음을 재촉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에게 남아 있는 탈출구는 무엇인가. 문학 감상이 문화의 향유가 되도록 하는 것뿐이다. 작품을 마주할 때 옆을 힐끗거리거나 남을 의식하지 않고 작품에 담겨 있는 요소들을 작품 내에서 충실히 음미하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문학 읽기가 진정한 문화생활이 되게 해 주는 기본적인 자세이다. 대상이 고전이든 장르문학이든 이러한 사정이 바뀔 리는 없다.

덧붙이는 글 | 박상준 기자는 포항공대 인문사회학부 교수입니다. 

이 글은 포항공대신문(2005.11.23)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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