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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대행 주식회사> 표지 지식의 풍경
<전쟁 대행 주식회사> 표지 지식의 풍경 ⓒ 지식의 풍경
1991년경부터, 크로아티아에서 소수파인 세르비아계가 유고슬라비아의 지원을 받으며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세르비아계는 비록 수는 적었지만 우월한 화력과 훈련으로 무장하였고 그래서 수적으로 우세한 크로아티아군은 세르비아계 무장 세력을 제압하지 못하고 있었다.

4년 동안 계속되던 크로아티아의 전쟁은 1995년이 되자 휴전 상태에 이르렀다. 그런데 이 모든 상황은 미국 민간 회사 MPRI가 개입하면서 180도 바뀌었다. 1995년 봄, 현대적인 서구식 군대로 바뀐 크로아티아군이 기습적인 '폭풍 작전' 공격을 감행했고 집중적인 기동 작전으로 세르비아계를 물리쳤다. MPRI는 '나토 육군 대학에서 A+ 학점을 받았을'만한 이 작전을 세우면서 어중이떠중이였던 크로아티아군을 뛰어난 현대식 군대로 훈련시켰고, 패배는 승리로 바뀌었다.

놀라운 사실이었다. 우리가 '보스니아 내전'으로만 알고 있던, 1990년대 세르비아계와 크로아티아-보스니아의 전쟁에는 이런 내막이 있었다. 그래서 큰 충격에 빠졌다. 클라우제비츠가 "국가나 조직화된 집단이 정치적 목적을 위해 수행하는 폭력"이라고 한 후 모두의 통념으로 자리 잡은 '전쟁의 정의'가 통째로 흔들리는 순간이었다. 전쟁이 사적인 회사에 의해 좌우되다니….

더 충격적인 것은 이 전쟁만 그러했던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코소보 전쟁, 시에라리온 전쟁, 앙골라 내전 등 세계적 분쟁이 벌어진 곳에는 어김없이 이런 민간 회사들이 있었고 이들이 판도를 뒤집었다.

그런데 민간 회사들의 활동은 실전(實戰)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었다. 영국에서는 해군의 최신형 핵잠수함을 조종하고 미국에서는 ROTC를 운영하고 교범을 개발하며 사우디아라비아에서는 국가방위군 대신 중요 전략 지점을 지키는 등등 전 세계 모든 대륙에서 활동하고 있다.

그러니까 민간 회사의 개입이 전장에서만 벌어지는 일이 아니고, 1990년대에 잠깐 있었던 일이 아니라는 말이다.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약소국에게만 해당되는 얘기 또한 아니고(게다가 <국방 개혁 2020>에 따르면 우리 군도 보급, 정비, 인쇄, 지도창, 복지단 등 총 28개 지원 부대를 아웃소싱할 계획이란다).

이 모든 얘기는 <전쟁 대행 주식회사>(피터 W. 싱어, 지식의 풍경)가 알려 주었다.

그렇다면 이 회사들을 어떻게 볼 것인가? 정체가 무엇인가? <전쟁 대행 주식회사>는 이 회사들을 역사적으로 존재해 왔던 용병(집단)과 똑같이 취급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 이 회사들은 '민간 군사 기업(privatized military firm)'이라는 새로운 종류의 기업으로, '민간 군사 산업'이라는 산업 분야에 속한 기업으로 보아야 한다고 한다.

말하자면 전쟁 대행 주식회사, 즉 민간 군사 기업은 군사(軍事) 용역을 상품으로 파는 기업이다. 즉 전투 활동, 전략 계획, 군사 훈련, 첩보, 병참, 정보전 등 모든 군사 관련 업무를 대행함으로써 이윤을 창출하는 대기업(corporation)이다.

이들은 시에라리온, 앙골라, 콩고공화국, 콜롬비아, 타이완, 인도네시아 같은 약소국에서부터 러시아, 미국, 영국, 오스트레일리아 등의 강대국에 이르는 전 세계 국가들을 상대로 사업을 벌이고 있고, 마약 카르텔이나 반군 같은 문제 단체에서부터 국내외 정부, 다국적 기업, 유엔이나 월드비전 같은 비정부 기구 등까지 상대가 누구냐에 상관없이 용역 활동을 펼치고 있다.

이들은 전투 인력을 암시장에서 임시변통으로 모아 전장에 투입하는 프리랜서 용병들(용병 집단)과 달리, 민간 군사 기업들은 대부분 공개적으로 거래하고 경쟁하는 등록된 사업체로 활동하고 있으며, 세계 시장에 수직적으로 통합되어 있다.

핼리버튼의 계열사인 브라운 앤드 루트, 미국 고위 장성 출신들이 주도하는 MPRI, 남아공 특수 정예 부대 출신들로 이뤄진 이그제규티브 아웃컴즈, 50여 개 나라에 40여 개 자회사를 두고 있는 아머그룹, 브랜치헤리티지 그룹의 자회사인 샌드라인과 아이비스에어, 다인코프(Dyncorp), 베이커 전 국무 장관과 칼루치 전 국방 장관이 중역으로 있는 투자 회사 칼라일그룹(얼마 전에 우리나라에서 탈세 혐의로 세무 조사를 받았던 그 기업)의 소유인 비넬 등이 대표적인 기업이고, 전 세계에서 활동하는 기업 수가 약 500개 정도인데, 영향력 있는 기업들이 대부분 영국(10개), 미국(수십 개), 프랑스, 이스라엘 등에 본부가 있다.

그런데 이러한 민간 군사 기업은 모두 냉전의 종식과 민영화 혁명이 불러일으킨 변화 속에서 등장했다.

냉전의 종식은 '안보 공백'을 낳았고 그에 따라 분쟁이 엄청나게 늘어나 1990년대 중반에는 냉전 종식 이전보다 5배나 많이 발생했다. 또한 군대 감축과 국가 실종으로 인해 전직 군인들과 무기들이 공개 시장에 넘쳐 나게 되었다.

예를 들어 T-55 탱크 가격이 SUV 차량 값보다 싸고, 우간다에서는 AK-47 소총 한 정이 닭 한 마리 값이면 살 수 있을 정도였다. 게다가 분쟁을 중재하는 주체인 유엔과 지역 기구가 무능력한 반응을 보이고 강대국들이 미온적인 태도를 보임에 따라 분쟁들은 걷잡을 수 없이 번져 갔다. 이러한 상황은 민간 군사 기업이 안보 공백을 메우게 했다.

더불어, 병사, 조직, 돈을 대규모로 축적해야만 벌일 수 있는(그래서 국가 형태가 항상 우월한 위치에 있던) 무력 분쟁이 이제는 자금이 풍부한 사적 행위자들도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전쟁 성격이 변화되고 있었고, 능률과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사영화(민영화)와 아웃소싱을 도입하는 전 세계적 경향이 자연스럽게 안보 영역에까지 침투하였다. 그 결과, 민간 군사 산업의 시대가 도래 한 것이다.

그런데, 이 민간 군사 기업들의 두드러진 점은, 제조업 같은 전통 산업과 달리 어느 정도의 금융 자본과 지적 자본만 있으면 유지될 수 있다는 데 있다. 많은 정규 직원이 필요 없고 그저 적임 인력의 데이터베이스만 있으면 된다. 또한 무기 시스템을 비롯한 군사 장비 역시 그때그때 국제 군사 시장에서 구입하거나 임대하면 된다. 이렇게 고정 비용이 낮다 보니 전 세계 어디든지 소재를 둘 수 있다. 즉 아직까지는 미국과 영국이 주요한 소재지이지만, 남아공의 만델라 정부가 규제를 하자 바로 문을 닫아 버리고 새로이 회사들을 차린 이그제큐티브 아웃컴즈의 경우처럼 언제든 쉽게 소재지를 옮길 수 있다.

그렇다면, 근대 국민 국가의 마지막 보루인 군대(군사)는 어떻게 되는가? 군대의 민영화는 국민 국가의 종말을 가져올 것인가? 전쟁 대행 주식회사라는 괴물이 세계를 배회하고 있는 지금, 만국의 민중들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덧붙이는 글 | 박선미 기자는 지식의 풍경 출판사에서 <전쟁대행주식회사>를 진행한 편집자입니다


전쟁 대행 주식회사

피터 W. 싱어 지음, 유강은 옮김, 지식의풍경(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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