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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음악은 비가 오는 날 소개할까 했는데, 요즘 날씨가 너무 더워서 일부러라도 소개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더운 날, 비 오는 날의 느낌을 상상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고, 어쩌면 곳에 따라 한두 차례 소나기가 올지도 모른다는 예보도 있었으니 정말 어쩌면 (곳에 따라) 음악의 내용과도 맞을 수 있지 않을까?

쇼팽은 무척 섬세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베토벤이나 모차르트, 브람스 같은 이들은 다양한 악기를 위해 곡을 썼는데, 쇼팽은 피아노 음악이 아니면 그의 진가가 발휘되지 못하는 작곡가였다.

어렸을 때 처음 쇼팽의 곡을 들었을 때의 인상은 ‘유리가 부서지는 느낌’이었다. ‘깨지는’이 아닌 부서지는 느낌 말이다. 이 곡에선 그 느낌이 크지 않지만, 그의 음악이 전반적으로 투명하고 리듬이 섬세하다는 말이 되겠다.

유리가 부서질 때는 나무가 쪼개지는 것이나, 벽돌이 깨지는 것과는 다른 조그만 리듬을 파생시키니까 말이다. 셀 수 없이 조그만 리듬이 흐르면서 에너지를 받으면, 시간도 박자에 맞추어 정확하게 끊어지는 것이 아닌, 임의적으로 늘어나고 줄어드는 느낌이 든다.

그래서 쇼팽 음악의 연주 특징을 일컬어 필자는, '시간을 트위스트(twist) 하는 것에 있다'고 표현한다. 음악적 표현을 위해 어느 부분에서 느려진다면(템포 루바토), 그 다음엔 꼭 빠르게 진행해서 시간을 만회해 주어야 하는 그 특성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그의 음악은 베토벤이나 브람스 음악 같은 정리된 논리보다, 섬세한 감성에 훨씬 더 많은 비중을 두고 있기 때문일지 모른다.


이 곡은 '빗방울 전주곡(Rain Drops)'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음악에서 유명한 일화나 곡의 부제들이 작곡가가 직접 붙인 것인지에 대해서는 항상 의문의 여지가 있다. 주변 사람들이 전하는 이야기나 편지로 인해 상징화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작곡가가 정확히 그런 이미지를 음악에 투영했는지는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이 경우에는 다음과 같은 연유로 빗방울이란 이름을 갖게 되었던 것 같다. 편지의 내용 중 ‘일정한 속도의 물방울’이란 표현은, 왼손 저음에서 곡 전반적으로 나오는 특성이기도 하기에, 전주곡 중에서 굳이 상드의 편지와 일치하는 곡을 찾는다면 이 곡이라 할 수 있겠다.

이 곡이 속한 24개의 전주곡이 완성되었던 곳은 스페인의 마요르카 섬이었고, 1838년 28살이었던 쇼팽은, 폐병으로 인해 연인인 조르쥬 상드와 함께 요양 중이었다. 상드는 남장을 즐긴 여류 작가였다. 섬세하고 연약한 쇼팽에 비해, 그 둘의 커플관계에서 정열적이고 강한 역할을 하였다고 한다.

조르쥬 상드는 저서 ‘나의 생애’에 이렇게 적고 있다.

‘비가 쏟아져 마차 지붕에 넘쳤다. 너무나도 무서운 어두운 밤길의 위험을 무릅쓰고 달렸다. 우리들은 환자(쇼팽)가 걱정할 것을 생각하며 마음을 재촉했다. 그러나 도착 하였을 땐 그는 정말로 생생하게 않아 조용한 절망 속에서 눈물을 머금은 채 기막힌 자작의 전주곡을 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호수 속에 빠지는 것으로 착각했다. 무겁고 얼음장 같은 물방울이 일정한 속도로 자기의 가슴 위에 떨어진다고 했다. 그날밤의 전주곡은 빗소리에 넘친 것이었고, 그 음이 사원의 지붕에서 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였다 할지라도 그의 작곡은 그의 환상의 음악 속에서 그의 가슴 위로 떨어지는 눈물로 바뀌어진 빗방울이었던 것이다.’

곡의 처음부터 왼손 저음에서 같은 음으로 반복되는 음이 들리시는지. 그것이 이 곡을 빗방울 전주곡이라 부르게 된 가장 중요한 이유이다. 빗방울을 묘사한다고 해서 말이다. 그런데 만일 이곡의 부제나 일화를 몰랐고, 그래서 다른 방식으로 들었다 할지라도 전혀 문제 될 것이 없다. 음악을 감상하는 방법(사실은 그런 것이 절대적으로 있는가에 대해서도 부정적이지만)은 어느 정도까지는 각자의 순수 의식에서 받아들이는 주관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음악을 들을 때는 다른 방식의 언어를 듣는다고 생각하면 된다. 우리가 서로 눈길이나 터치에서도 많은 느낌을 주고 받는 것처럼, 딱히 언어로 무엇을 어떻게 들었다 표현하지 못하더라도, 느낌의 기억은 머릿속에 남아 있는데 그것이 바로 음악이라는 언어가 전달하는 내용이다.

물론 이런 음악의 특성을 이용해 만들어 놓은 건축물(음악 작품에 대한 필자의 표현)의 역사와 구조를 파악하는 문제는 음악 감상의 확장된 영역이지만, 아름다운 건축물을 보고, 꼭 그것의 건축 방식에 대해 소상히 알아야만 감상이 가능한 것이 아니지 않은가?

다시 곡에 대해 이야기 하자면, 곡은 그저 무심하게 창밖의 빗방울을 바라보는 마음으로 시작한다. 문득 ‘아… 비가 오네’ 하는 느낌. 왼손은 빗방울을 묘사한다지만, 오른손의 멜로디는 떠오르는 상념들이다. 특별히 무겁지 않은 상념들. 가끔 가다 그 상념은 왼손의 빗방울의 존재를 잊어버린 듯한 오른손의 (13초, 혹은 1분 25초 부분) 음들의 덩어리로 마무리 되고 다시 시작한다.

편안했던 상념이 변하기 시작한다. 불안과 공포가 시작된다. 1분 40초부터, 화성은 어둡고 그래서 감정적 내용은 무거워진다. 만일 편지에서 호수에 빠진다는 표현, 자기 가슴 위에 떨어지는 빗방울이란 표현이 맞다면, 이 부분부터 시작하지 않았을까?

1분 40초부터 3분 19초까지 똑똑거리며 계속되는 리듬과 더불어 불안과 공포의 이미지를 주었다면, 3분 19초부터는 환상 속의 공포를 박차고 나오고 싶은, 울먹거리는 연약한 심장이 느껴진다. 감정적 에너지가 고음에서 더 밀도 있게 호소한다. 연약한 감성이 폭발할 것 같다. 작곡가는 현실이 아닌 환상 속에서 치열하게 고통스러워 하고 있는 듯하다. 그러다 불현듯 4분 17, 18초 부분에선 순간적으로 평온한 현실로 돌아온다.

4분 18초부터는 다시 처음의 청명한 상태로 돌아온다. 중간의 어두운 부분에 비해 훨씬 가라앉고 침착하게 되돌아 온 느낌이다. 다시 처음의 마음으로 평온하게 회복하는 과정이다(이 모든 묘사는 필자가 연주할 때 느끼는 상태이므로, 개인적 느낌의 묘사로만 받아주시길…).

편지 대로라면, 쇼팽은 이 곡을 쓰면서 과연 이런 이미지를 가졌던 것일까? 그리고 가장 가까이 지냈던 상드는 그 이미지를 정확히 포착하고 편지에 그 내용을 묘사한 것일까? 그리고 여러분은 이런 편지의 내용과 상관 없이 어떤 느낌을 받았는지 궁금하다.

이 연주는 2년 전 일원동 밀알학교의 세라믹 홀에서 녹음한 것이다. 요즈음 많은 연주회들이 열리고 있는 연주회장이고, 공명이 무척 잘 되는 홀이다. 그 당시 개관하고 얼마 안 되었는데, 우리 나라 최초의 톤 마이스터인 정남일과 녹음하기 좋은 홀을 찾던 중 시도해 보기로 했다.

세라믹 홀은 무척 특이하게 되어 있다. 홀의 안쪽 마감재가 모두 도자기로 되어 있는데, 벽에 동그랗게 붙어 있는 수많은 도자기들이 귀(耳) 같은 인상을 주었다. 도자기들 때문인지 공명이 너무 잘 되어 어떤 곡은 연주하기 좋았지만, 이 곡의 경우엔 깨끗하고 정리된 선율을 표현하기 원했던 부분에 너무 사이즈가 넓은 공명은 거추장스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공명이 너무 잘 되면(목욕탕 안에서처럼) 울림을 줄이기 위해, 마치 실로폰을 칠 때 채를 잡은 손에 힘을 꽉 주고 치게 되는 것처럼, 연주시 몸이 경직된다. 그것은 부드러운 선율을 만드는 음악 표현에 안 좋은 영향을 미치게 되는데, 이 곡을 녹음할 때 그런 애로사항이 있었던 것이 기억난다.

그래서인지, 아니면 인터넷으로 들어서 전달감이 약해서인지 중간 부분에 조금 더 폭발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을 지금 느낀다. 한 곡으로 아쉬워서 그 다음 전주곡인 16번을 첨가하겠다. 설명은 다음번에! 그저 시원한 소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들으시면 어떠할지….


퀴즈문제 : 1초에 몇 개의 음이 진행되는지 들리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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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미정 기자는 피아니스트로서 현재 울산대학교 음악대학 교수이다. 귀국전 14년간 뉴욕에 거주, 평양에서의 연주 및 뉴욕에서의 북한 음악 연주등을 통해 민간 문화교류를 해왔다. 2002년 그의 피아노 독주회시 아리랑과 내고향의 정든 집 등 북한의 피아노곡을 국내 초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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